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가 외세에 끊임없이 시달림과 침략을 받은 것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흑산도가 수많은 섬들 중에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역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3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면적 20.03㎢에 해안선 길이는 41.8㎞에 달하는 제법 큰 섬이다. 흑산도는 섬의 95%가 상록수로 이루어져 멀리서 바라보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일컬어졌다 한다.
흑산도에 처음 오는 사람은 예리항에 닿는 순간 두 번 놀란다 한다. 섬 하면 누구나 조그마한 섬을 연상하게 된다. 공을 차면 금세 바다에 빠지는 정도의 크기를 상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흑산도에 와보면, 먼저 섬의 크기에 놀라게 된다. 그 다음에는 예리항구의 어선들과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또 한 번 놀란다. 섬답지 않게 번화한 규모에 놀라는 것이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출발하는 관광지 홍도와 가거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섬이다. 그러면서도 흑산면의 구심적 기능을 한다. 영산도, 대둔도, 다물도, 장도 같은 섬들이 흑산도를 빙 둘러싸고 있고, 더 멀리로는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만재도, 홍도, 가거도 등의 섬들이 모여 흑산면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들 11개 섬의 해상교통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이 이곳에 와서 배와 그물을 수리하고, 기름과 얼음, 생필품과 물을 실으며, 선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일상인 곳이다.
파시가 성행했던 한때는 개도 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흥청대던 예리항은 파시가 사라진 지금 다른 풍습이 생겨났다. 오히려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는 항구가 된 것이다. 한 예리항 거주민은 태풍을 피해 오는 어선들이 예리항의 주요 수입원이라 말한다. 7~9월 태풍이 기승을 부릴 때면 예리항에 배들로 가득 차게 된다. 어선들뿐 아니라 홍도를 비롯한 흑산면 주위 섬들의 모든 배가 예리항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풍 때면 예리에서 진리까지 배 위로 걸어서 갈 지경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인다고 한다. 지금은 선박의 기능이 좋고 기상정보가 정확하여 미리 목포항으로 피항하는 선박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흑산도는 여전히 북적거린다.
흑산도는 다른 섬들과 달리 사람들이 살기에 조건이 불리한 곳이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관계로 교통의 불편도 불편이려니와 농경지가 부족한 관계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그 옛날에는 보릿고개가 닥칠 때마다 배를 곯아야 했다. 교육과 보건 및 의료 서비스 등도 열악하여 군에서는 육지로 이주계획을 세운 바도 있었다. 그 동안 흑산도는 파시의 성행으로 인한 어업 전진기지로 부상되었지만, 파시의 쇠락으로 홍도 관광길을 거쳐 가는 경유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파시의 쇠퇴로 섬 경제에 미치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속되자 흑산도 젊은이들이 모여 대책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의 해결책은 흑산도 새로 알리기 운동이었다.
▲ 흑산 예리항으로 들어오는 쾌속선목포와 흑산도를 잇는 배가 좌우에 서 있다.
ⓒ 이재언
다행스럽게도 젊은이들의 이러한 노력 끝에 흑산도는 1990년 이후 홍도와 함께 관광의 섬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흑산도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목포에서 2시간 배를 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 기착지인 도초도와 비금도까지는 내해에 속하여 잔잔하나, 나머지 구간은 외해로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높아 멀미가 나는 구간이다. 파도가 높은 날에 배를 타면, 멀미에 약한 사람들은 금세 얼굴이 노랗게 뜨고 속이 울렁거려 흑산도고 뭐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지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조금만 참는다면 아름다운 흑산도의 비경을 마주할 수 있다. 흑산도는 제법 큰 섬이라 곳곳에 숨어 있는 비경도 적잖을 뿐 아니라 유서 깊은 유적들이 많다. 나름대로 관광할 만한 매력을 갖췄으므로 관광의 섬으로서 자리매김할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흑산도 키워드, 파시
수산청에서 1964년에 흑산도를 어업전진기지로 선정한 것은 흑산도 예리항이 갖는 파시의 기능이 실제로 커서였다. 파시란 풍어기에 일시적으로 고기잡이배와 운반선 사이에 고기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배와 배 사이에 형성되는 거래시장을 말한다. 먼 바다에 있는 흑산도는 파시가 설 정도로 엄청난 양의 고기가 잡히는 황금어장의 중심지였다. 홍어뿐 아니라 조기, 고등어, 삼치 등 파시의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흑산도 예리항 이외에는 근처에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었고, 태풍이라도 불라치면 중국과 일본 어선까지 몰려와 국제적인 항구역할마저 해야 했으므로 항구의 확장개발에 대한 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파시가 당시에는 수시로 열려, 흑산도 예리항은 배들, 특히 조깃배로 장관을 이루었다.
▲ 예리항 전경흑산도의 관문 예리항
ⓒ 이재언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들은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 이동하는데, 3월에서 7월까지 흑산도와 재원도, 칠산바다를 거쳐 연평도로 떼지어 올라갔다가, 8월이 되면 다시 제주 남쪽의 따뜻한 바다로 내려간다. 조기의 여정 중 가장 맛이 좋은 때가 서해를 지날 때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흑산도 파시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성황이었던 파시는 197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여 지금은 옛말이 되고 말았다. 파시가 성했던 자리에는 일반 어선과 관광선이나 외지인을 위한 낚싯배 부두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역사를 품은 섬 흑산도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흑산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1966~1967년에 걸친 서울대학교 연구소의 지표조사 결과, 흑산도와 우이도, 태도, 가거도 등에서 돌도끼와 토기가 파묻혀 있는 조개무지와 고인들 등의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었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흑산도가 한?중 해상교통로의 거점이었음이 잘 나타난다. 먼저 장보고의 후원으로 중국 유학생활을 수행한 후에 847년에 귀국했던 일본의 고승 자각대사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귀국길 여정 중 들었던 흑산도에 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고,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흑산도에 대하여 이상의 글들로 보아 당시에는 중국을 오가는 배가 반드시 흑산도를 거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흑산도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국제 해양항로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면서 고대 해양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그러므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흑산도는 가히 역사를 품은 섬이라 할 수 있다. 흑산도가 크게 번성하게 된 것은 828년(신라 흥덕왕 3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하기 위해 흑산도를 중간기점으로 삼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이후 고려시대까지 번성을 누린 흑산도는 교역의 거점항에 해당하는 읍동마을에 해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읍동마을에 산성을 쌓았는데, 상라산성이 그것이다.
▲ 사리에 있는 서당정약전과 서당
ⓒ 이재언
유배의 땅 흑산도
흑산도는 많은 인물이 유배생활을 했던 섬이다. 옛날에는 유배와 절망의 땅이라 여겨 바닷물도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한 곳이라는 표현을 하던 곳이지만, 실제로는 선비들의 정신적 쉼터로서 강인한 삶의 체험지라 할 수 있다.
흑산도 서안의 사리마을에는 유배문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약전을 비롯하여 최익현과 김홍록, 김귀주 등 모두 17명의 개별 비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흑산도로 귀양살이를 다녀간 유배자들의 수가 120명 정도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천주교 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이 섬에 머물면서 자산어보를 썼다. 유배생활중 저술한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으로 생태보고서이자 백과사전으로서 오늘날까지 기여한 바가 큰 책이다. 진리와 천촌리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배지였다. 병자수호조약(1876)이 체결되자 조약을 체결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치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에서 2년 정도 유배되었는데, 유배생활 동안에도 진리에 일심당이란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고 천촌리로 옮긴 후에도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유배중에도 교육사업으로써 섬에 기여했던 것이다. 섬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귀중한 기회였을 것이다.
흑산도 천주교회
유적지 지석묘군을 지나 조금 더 가면 흑산중학교가 있고, 얼마 가지 않아 흑산성당이 보인다. 흑산성당은 바로 앞 흑산진리교회와 마주하고 있다. 유서 깊은 성당이라 박물관까지 있었다. 성당 안에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당의 역사가 깊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천주교 신자 조수덕이 고향 흑산도로 귀향하던 해인 1951년 8월 죽항리에 공소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이곳의 천주교는 여느 섬보다 교세를 확장하였다 한다. 브라질 신부가 1958년 성당을 신축하여 터를 잡은 이후, 1960년에 흑산성모중학교를 설립하여 1973년 공립 흑산중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이 지역 중등교육을 담당하였고, 1969년에 준공한 대건조선소에서는 선박수리와 건조는 물론 이곳에서 나오는 전력으로 예리, 진리 등에 전기를 공급하였다 한다. 1969년에는 흑산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금융지원을 하는 등 천주교가 섬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흑산도 둘러보기
목포연안여객터미널에서 흑산도로 가는 배편은 하루에 두 번, 관광 시즌에는 네 번 있다. 흑산도로 가기 위해 배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략 1시간 50분 정도이다.
흑산항 부근은 거의 상가 위주다. 쌈지공원 북쪽 지점 뒤로 언덕이 있고 정자형 전망대가 있다. 해안도로는 북서쪽 방파제까지 계속 이어진다. 파출소 옆 쌈지공원에 위치한 단층짜리 전망대부터 들렀다. 높지 않아도 그런 대로 조망이 좋아 뿌듯했다. 진리 마을에 있는 진리당에서 언덕을 넘어가면 배낭기변 해변이다. 자칫하면 지나칠 수 있는 위치라 유의해서 찾아야 한다.
▲ 진리에 있는 진리당산 모습숲속에 있는 진리당
ⓒ 이재언
배낭기변 해변은 물이 유리알처럼 맑고 경사가 완만하며 백사장이 자갈 반 모래 반으로 섞여 있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뒤로 소나무 숲이 있고 그 아래 원형의 탁자와 벤치를 갖추어두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사진작가라면 한번은 찾았을 법한 곳이다. 물이 맑고 깨끗한 배낭기변 앞바다에서는 미역과 다시마를 양식하고 있었다. 이 해변 뒤 도로 건너편에는 배낭기미 습지가 있다.
진리 마을 옆에 있는 읍동마을 입구에서 밭을 끼고 가다보면 길은 서서히 오르막길이 되었다가 굽이굽이 구절양장의 상나리고개에 접어든다. 그 유명한 열두 고갯길이다.
▲ 상라산 일주도로항공사진
ⓒ 신안군 제공
이 길은 상라산 전망대까지 오르는 흑산도의 명소이다. 역동적으로 용틀임하는 길 옆에 나지막히 자생하는 동백나무가 운치를 더해주어 사진작가들이 카메라에 즐겨 담는 아름다운 길이다. 산책로를 따라서 가면 봉수대가 있었던 곳, 상라봉 정상에 오르니 탁 트인 전망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굽이굽이 고갯길이 발아래 펼쳐지고 그 앞쪽으로 예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약간 돌리면 푸른 바다 위로 넓게 펼쳐진 예리항과 점점이 박힌 고깃배가 한데 어울려 있어 이 또한 비경이다. 해돋이와 해넘이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급경사진 상라봉 굽이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리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마을 뒤에 있는 천마산(말 천 마리가 운집한 형상)의 정기를 이어받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마리라는 지명이다. 상라봉 전망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 내리막길에 조성된 마리마을이다. 마을의 선착장 주변에는 가오리를 말려두어 작은 섬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그렇게 크지 않은 네모 모양의 선착장이다. 마을은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 있다. 좀 멀리 떨어진 장도에서도 접안에 편리하여 이 선착장을 이용한다고 한다. 마리에서 경사가 급하고 굽이치듯이 휘도는 도로를 따라가면 흑산진의 산 너머 마을이라는 뜻의 전디미, 곧 비리라 불리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 안개가 자욱이 낀 외망덕도상라산 정상에서 찍은 외망덕도
ⓒ 이재언
마리와 비리 사이의 해안도로 중간쯤 바닷가 쪽에 한반도 지도바위가 있다. 파도에 의해 형성된 해식동으로 바다 위에 솟은 기암괴석에 난 구멍이 한반도 모양과 흡사하여 붙인 이름이다. 통일을 기리는 해식동굴 구멍으로 비리마을의 당산이 비친다. 가까이 다가가면 동굴모양이 호주 대륙처럼 바뀌어 보이는 것이 더욱 신비롭다. 비리마을을 지나면 왼쪽 옹벽에 그림이 새겨진 구간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그 유명한 하늘도로가 시작된다. 허공에 떠 있는 형태의 하늘도로. 해안 절벽 따라 교각 없는 다리를 길게 연결해놓은 형태의 이 길은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흑산도 최고봉인 문암산 깃대봉(해발 377m)에서 급하게 흘러내린, 문자 그대로 천인단애인 이곳은 길을 내기가 도무지 어려운 지형이다. 그래서 절벽에 긴 말뚝을 가로로 박은 뒤, 그 위에 도로를 깔았다. 이른바 켄틸레버 공법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도로 아래에 일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그런데 눈을 들어 먼 바다쪽을 바라보면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다. 흑산도 관광명소인 이 하늘도로는 홍합치까지 이어져 있다. 하늘도로 옆으로 길이 48미터나 되는 벽화가 있는데, 신안의 명물과 문화유산을 그려놓았다.
이곳을 지나면 곤촌리 다음은 심리다. 상라봉 전망대에서 심리마을까지 12km에 이르는 일주도로는 줄곧 창망한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이어진다. 흑산도 서쪽 해안 중 가장 깊숙이 들어간 만에 있다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 심리는 흑산도 서남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심리에는 마을 가운데에 후박나무 군락이 있다. 해변을 끼고 있는 도로변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그 앞을 공원처럼 조성하여 후박나무 이야기라는 타이틀도 붙여두었다. 심리보다 작은 마을 암동을 지나치면 가파른 오르막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만나게 된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 한다령이라는 고개를 넘으면 사리마을로 갈 수 있다. 한이 많은 고개라는 이름이 고갯길의 모양새와 왠지 어울려 보인다.
▲ 해안일주도로준공기념비가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25.4km의 흑산도 일주도로는 1984년 첫 삽을 뜬 이후 27년 만인 2010년 3월에야 비로소 개통되었다.
ⓒ 이재언
20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예리에서 버스로 암동마을까지 와서 걸어서 한다령 고개를 넘어갔다. 이곳에도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안일주도로준공기념비가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한 조형물과 함께 세워져 있다. 신안군의 이미지(천사의 섬)를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동서양이 함께하는 의미의 천사를 표현했다는 설명이 안내문에 쓰여 있다. 이곳에도 박도순 시인의 시 한다령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다. 바다를 끼고 빙 둘러 있는 25.4km의 흑산도 일주도로는 1984년 첫 삽을 뜬 이후 27년 만인 2010년 3월에야 비로소 개통되었다. 개통을 기념하여 이곳 한다령에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한다령을 넘어서면 흑산도에서 유명한 사리마을에 들어선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도로에서 멸치를 말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도로 한 쪽으로 길게 늘어놓았거나 길 양 쪽에 지그재그로 늘어두었다. 이 앞에 교회가 있고 그 앞에는 큰 비석이 한 기 세워져 있다. 통정대부중추부동지사의 유허비다. 단을 조성하고 세운 유허비는 옛날 것이 아니다.
사리마을은 모래미라고도 불리는 남쪽의 바닷가 마을이다. 40년전에 사리 마을은 부촌이었다. 멸치가 가장 많이 잡히고 연승으로 조업을 하였다. 그래서 마을에 상고선이 3척이나 있을 정도로 위치가 좋은 마을이다. 흑산도에서 만난 여타 마을과 달리 섬 내에서 농사를 짓는 몇 안 되는 마을 중 한 곳이다. 섬마을의 농사라고 해봐야 가족들이 먹을 것 정도 짓는 것이 고작이지만 농토가 비좁고 주업이 어업인 이곳 섬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농사는 큰 규모이다. 정약전 선생이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가 이런 연유가 아닌가 싶다. 사촌서당은 손암 정약전 선생께서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이다. 사리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산비탈에 이중으로 담장을 두른 사촌서당을 복원해놓았다. 이곳에서 내려와 계속 걸어가면 해안이 나타난다. 여러 개의 돌섬들이 가로막고 있는 사리포구다. 이 포구 앞에 7개의 작은 섬들이 떠서 방파제 구실을 하는 덕분에 동남풍이 불어도 어선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다. 그 앞으로 고깃배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칠형제바위라고 불리는 7개 돌섬이 천연 방파제를 이루는 포구 안쪽으로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오롱조롱 떠 있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 부촌인 사리포구 전경남쪽에 위치한 사라는 멸치잡이와 어선어업이 성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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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에서부터는 다시 가파른 고갯길이 이어진다. 고갯길을 넘어서면서부터 다시 바다와 접하고 섬의 서편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칠형제바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 또한 조망 포인트이다. 이곳에서는 사리포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리재 방향의 S자 길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도 박도순 시인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포인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도로 왼쪽으로 돌탑과 함께 팔각정자 쉼터가 있다. 쉼터이름은 가산쉼터. 거기에서 몇 미터 더 가면 길은 왼쪽으로 급하게 꺾어진다.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왼쪽 산은 솔데미라는 곳이다. 사리마을 다음에 닿는 곳은 소사리 마을이다. 마을 앞에 모래등성이가 있어 소사리라 하였는데 사리 마을과 함께 가장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고 멸치 마을로 유명하다.
이 마을에 탐방로 입구가 있다. 마을 뒤에 높이 솟아 있는 문암산 등산로인데 북서에서 동남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이 하천을 따라 바다로 이어지므로 이곳 소사리 마을은 길 따라 길쭉하다. 마을 앞바다의 구문여는 거센 파도가 칠 때 구멍 사이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 장관이라고 한다.
소사리를 벗어나면 천촌리와 소사리 사이에 있는 모래해변 샛개를 만난다. 흑산도의 2개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샛개 해수욕장이 바다 쪽은 모래, 육지 쪽은 자갈로 되어 있다. 모래알이 분말 같아서 손으로 만지면 먼지처럼 부서질 정도로 곱다. 하지만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편의시설 하나 없으니 숨어 있는 명소라 할수밖에. 예리에서는 차로 25분 정도 소요된다. 소사리에서 승용차로 3~4분 정도만 가면 천촌리 여티미에 닿는다. 천촌리 산이 높고 마을이 길게 뻗었다하여 천촌리라 하였다. 큰 바위 위에 커다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아래쪽에 초라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가 그것이다. 최익현 유적지라는 커다란 안내판에 비해 비석은 매우 작다. 비석을 두른 돌난간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조촐한 면암 유적지에는 근래 세워진 비석 하나 그리고 면암이 암벽에 새겼다는 기봉강산 홍무일월其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글자뿐이다.
▲ 천촌리 최익현 선생 비석면암 최익현 기념비
ⓒ 이재언
천촌리에서 북동쪽으로 구부러지는 완만한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청촌리가 나타난다. 청촌리는 마을 주변이 산림이 우거지고 울창하여 사철 푸르다하여 청촌이라 하였다. 움푹 들어가 포근해 보이는 지형 안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은 넉넉하고 부유해 보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주로 멸치잡이가 생업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젊은 사람이 없어 멸치철이면 육지의 직업소개소에서 사람을 구해 어장에 나간다. 옛날엔 일 년 내내 멸치잡이를 했지만 지금은 잘 안 잡힌다 한다. 마을을 가로질러 언덕을 지나면, 예리항으로 가는 길이자 해안 일주도로를 만나는 지점. 이를테면 일주도로의 종점인 셈이다. 이곳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선착장 시설만 있다. 선착장은 바위섬을 연결한 듯 방파제가 바위섬을 관통한다. 바로 앞 마주 보이는 섬, 영산도로 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이다. 흑산도를 돌아보고 난 다음에 마을마다의 발전상을 종합해 보니 자연 환경에 따라 생업이 많이 달랐다. 예리항은 상업화가 되었고, 동쪽에 위치한 사리와 소사리, 청촌리 등은 어선어업이 발달하였다. 태풍이와도 영향이 없는 서쪽의 비리와 마리, 진리 등은 전복과 우럭 돔 등의 양식업을 하고있다.
이렇게 바람과 파도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바다와 육지의 해변가를 정화시키고 바다를 풍요롭게 해주는 두 얼굴을 가진 자연 자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흑산도 지리
흑산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20.03㎢, 해안선 길이 59.8㎞, 산높이 345m이다. 인구는 1149가구 2,246명 (2012년 기준)이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7.2km 떨어져 있으며, 홍도·다물도·대둔도·영산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신안군 가운데 섬이 많은 면에 속하는 흑산면은 흑산도를 포함한 11개의 유인도와 다수의 무인도를 합쳐 총 100여 개의 섬들로 형성되어 있다.
전통과 민속과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땅 흑산도, 유배와 절망의 땅이었던 흑산도는 바닷물도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한 곳이다. 이제 쾌속선이라는 문명이 들어와 전통과 현대가 함께 어울려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흑산도를 ?고 있다. 파시로 오랫동안 흥청거리던 섬, 해변에 즐비하게 서 있는 생선가게, 식당, 술집. 선구점, 여관, 다방 등등 잡다한 점포들을 지나 흑산도를 떠나기 위해 부두로 나왔다. 지금은 한가롭기 그지없는 항구지만 파시로 흥청 거리던 오래된 항구답게 잔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조기와 고등어, 고래, 삼치, 홍어가 떠난 흑산도, 그들의 회유를 기다리며, 수천척의 어선들과 수백명의 술집, 다방 등의 종업원들이 다시 흑산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뱃고동이 울어 대는 여객선을 향하여 발걸음을 제촉하였다. 조기가 떠난 자리에 관광객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여 다행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기를 바라면서 흑산도를 떠난다.
첫댓글 흑산도 홍도 가고 싶은데 배 멀미가 무서워서
달마대사님 잘보구 갑니다 잘 알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