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봉 아래로
구월 셋째 일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제주도 바깥 바다에서 동으로 틀어 일본 열도를 따라 나아가는 태풍이 있었다. 그 태풍의 간접 영향으로 우리 지역은 이틀째 하늘이 흐렸다. 추석을 앞두고 선산 벌초를 하러 가는 사람들은 날씨가 무덥지 않아 좋을 듯했다. 우리 집안에서 스무 날 전 벌초를 끝내 주말 시간이 느긋했다. 이른 아침 창원역에서 진해 용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잔뜩 흐렸지만 바람은 그리 세게 불지는 않았다. 창원실내수영장 앞에서 757번을 탔다. 시내를 관통해 안민터널을 빠져 동진해로 나갔다. 진해구청을 지난 대발령에 내리려니 좌석버스는 정차하지 않아 stx조선소 입구까지 갔다. 내가 대발령에 내리려고 한 것은 만장대 아래서 백일 아침 고요 산길을 걸으려고 해서다. 어은동에서 다시 대발령으로 갔다.
어은(御隱)이란 임금이 숨은 자리란 지명이다. 어은동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설화의 현장이다. 이성계가 천하 명당에 부모 산소를 쓰려고 하인을 데리고 팔도를 다녔단다. 진해 시루봉 아래 천자봉에 이르러 진해만을 내려다보며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바닷가 동굴이 두 개였다. 하인은 한 곳에 이성계 선대 유골을, 그 곁에는 자신의 선대 유골을 안치했다.
이후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했다. 그를 수행한 하인 후손은 중국을 건너가 명나라를 개창한 주원장이다. 백일마을은 신안 주 씨 집성촌으로 설화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 주기철 목사가 웅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평양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펼치다 피검됐다.
어은동에서 대발령까지 자동찻길 따라 되돌아왔다. 대발령에는 진해 드림 로드로 연결되는 임도 기점이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니 예초기를 짊어진 사람이 산소에서 벌초를 했다. 잔뜩 흐린 하늘은 성근 빗방울이 들어 우산을 펼쳐 썼다. 산비탈은 갈지자 형태로 오르는 길이었다. 시루봉에서 천자봉과 만장대가 흘러내린 지점에 진해 드림 로드와 연결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부터 백일 아침 고요 산길 구간입니다. 조용하고 아늑한 길을 걸으며 아침의 고요함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백일 아침 고요 산길’은 시민 공모를 거쳐 붙여진 이름이라고 덧붙여 있었다. 길섶에 무성한 풀들은 시청의 관련 부서에서 말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산모롱이를 얼마쯤 돌아가다 위쪽을 바라보니 시루봉에서 흘러내린 천자봉 바위가 드러났다.
산모롱이를 돌아간 산길은 백일마을로 내려갔다. 인적 끊긴 호젓한 산길을 걸어가니 정자가 나타났다.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듯 중년 부부가 간식을 펼쳐 놓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숲으로 드는 지름길로 가질 않고 길고 긴 임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드림 로드를 따라 몇 차례 백일마을을 찾았으나 임도로만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을은 산기슭에 위치해 아주 한적하였다.
부산진해 신항만이 가까웠다. 거대한 크레인이 도열한 항만은 희뿌연 안개에 쌓여 있었다. 항만 배후엔 아파트를 비롯한 업무 빌딩이 들어서고 있어 상전이 벽해로 되어가는 듯했다. 아까 내가 탔던 직행버스 종점이 용원으로 행정구역으로는 경남이고 부산과 맞닿았다. 항만 건너 가덕도는 연륙교가 되었다. 섬 끄트머리서 침매터널 구간과 육상 구간으로 거제도로는 거가대교가 잇는다.
백일마을에서 시루봉 방향으로 오르면 드림 로드 마지막 구간인 소사생태길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건너가질 않고 야트막한 산마루를 내려섰다. 산기슭을 빠져나가니 부추가 가득 심겨진 밭이 나타났다. 도시 근교에서 채소를 키워 시장에 내다 파는 듯했다. 부추는 꽃대가 올라 하얀 꽃을 피웠다. 마을과 제법 떨어진 서중저수지가 나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천 읍성이 있지 싶었다. 17.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