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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19-31)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떠나서 자신의 능력과 힘만을 믿고 사는 자를 꾸짖는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잎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제1독서). 부자는 혼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부자에게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라자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난한 이를 거들떠보지 않고 자기만 만족하며 살던 자가 죽어서 가는 곳은 결국 철저히 고립된 곳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돈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고 가르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배고픔을 해소하려 해도 돈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여가 생활을 하려 해도 돈은 있어야 합니다. 아픈 이에게는 돈이 곧 생명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돈은 꼭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도 물질적인 풍요를 축복이라고 했으며 재물 자체를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 부자와 거지 라자로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구렁을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요? 저 구렁텅이만 없다면 부자도 죽어서 아브라함 품 안에 달려갈 수 있었을 텐데, 결코 건너갈 수 없는 구렁은 왜 생긴 것인지요? 아마도 거지 라자로가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불행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은 바로 이 부자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무나 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햇살이 비치는 쪽을 향해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실내에 두어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이렇게 밝은 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지함을 두려워하지 마라. 엉터리 지식을 두려워하라(파스칼).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양승국신부- <모든 것을 뒤바꾸시는 하느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부자를 탓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축복이 곧 하느님의 축복이고 지상에서의 불행은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그들은 누군가가 나병이나 중풍병 같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면 그가 뭔가 크게 잘못했기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걸로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그릇된 판단입니까?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건강할 때도 있겠지만, 어쩌다보면 본의 아니게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당시 환자 입장에서 참으로 억울했습니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병고와 맞서 싸우느라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세상은 자신을 중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바리사이들의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하신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다음 세상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세리들은 천국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착한 사람들에게는 지상에서의 모든 삶이 술술 잘 풀려야 하고 악한 사람들의 인생은 무조건 꼬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누군가가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면 곧 그 사람이 악하다는 표시로 삼았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비인간적 사고방식, 무자비한 논리를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뒤바꿔놓으십니다. 지상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았던 부자는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극도의 갈증 속에서 물 한 방울조차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지상에서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해오던 라자로라는 거지는 하느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런 모습은 요즘 이 지상에서조차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는데 하루 지나고 나니 지옥입니다. 어제 떵떵거리며 권세를 누렸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불완전한 우리 인간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우여곡절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오늘 부자라 할지라도 자만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유세 부리지 말고, 없는 사람 무시하지 말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베풀고 나누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필요한 노력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 삶이 아무리 힘겹다 할지라도 하느님 자비의 품이 멀지 않기에 좀 더 힘을 내며, 좀 더 인내하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한 가지 하느님의 시각과 우리 인간의 시각을 철저하게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인물의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합니까? 우선적인 평가 기준 가운데 하나가 재물입니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가 기준은 우리 인간의 기준과는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언젠가 우리네 인생의 제2막이 열리면 모든 것이 다 바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지상에서의 첫째가 꼴찌가 되고 맙니다. 부자가 가난해지며 권세 있는 자들이 낮아집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권세를 얻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하게 됩니다. 그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그릇된 생각을 뒤바꿔놓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 판단해왔는지를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지상에서의 삶이 견디기 힘들만큼 혹독한 분들, 극도의 가난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고통을 겪어 오신 분들, 부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힘내시기 바랍니다. 더 큰 희망으로 무장하고 끝까지 견뎌나가시기 바랍니다.
‘고통받는 이’를 위한 사람 -신헌문 신부-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를 아시지요? 그는 저와 같은
비유 속의 부자, 이어지는 이야기 -김태완 신부-
부자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날마다 호화롭고 즐겁게 살면서 자신의 대문 앞에 사는 라자로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누가 우리의 라자로인가? -김찬선신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부족함을 느낄 때 만족함이 필요한 이유 - 송동림 신부-
우리는 ‘부족함’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능력 · 노력 · 실력 · 재력 · 사랑 · 관심 등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부족한 것이 채워지면 마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 간절히 바라던 것이 채워졌을 때 일순간 만족할지는 몰라도 오래지 않아 또 다른 결핍을 느낀다. 문제만 다를 뿐 다시 목마름을 느낀다. 이는 완전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서로의 근황을 묻고 있었습니다. “야, 넌 요새 무슨 일 하냐?” 이 물음에 그 친구는 뻔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 그냥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지 뭐.” “그래? 그런데 니가 전에 뭐 했더라?” 그러자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네요. “놀았잖아.” 남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위축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스스로 실패자라고 하면서 심한 자책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하긴 이러한 말도 있더라고요. 20대가 취직하면 가문의 영광, 30대가 직장 다니면 동네 잔치할 일, 4,50대가 아직 퇴직 안했으면 국가적 경사, 60대가 아직도 은퇴 안했으면 세계 8대 불가사의. 그러나 이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입니다. 실패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가 만든 감옥 속에 스스로 갇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주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어쩌면 이미 왔는데 내가 둔해서 아직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포기와 좌절 속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희망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 행복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라자로의 이 세상 삶은 어떠했습니까?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처럼만 보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은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 곁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에 반해서 부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여유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였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시 상황이 역전되어 불길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따라서 우리는 오늘 독서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바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희망을 간직하며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모습을 갖춘 사람이 바로 내가 되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외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그의 내적 사고의 표현이자 완성이다.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생각이 분명해야 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려면 생각이 훌륭해야 한다(윌리엄 엘러리 채닝).
기다려보세요 -김효준신부- 두 개의 물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과 희망과 건강과 부유함의 물통이고,
무관심과 단절의 지옥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무신론자 -전삼용신부- 예전에 청년 레지오를 할 때였습니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우리들은 그 집에 가서 밤새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족 간에 싸움이 붙었습니다. 물론 가족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한 아저씨가 고의로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우리는 그 분을 집 밖으로 데려나와 싸우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습니다. 계속 들어가 싸움을 벌이려고 하자 저도 힘으로 그 분을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그 분은 힘으로 우리를 뚫고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야.” 우리가 성당 다니는 청년들임을 알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나는 너희들이 믿는 예수가 아니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라면 당신 자신처럼 행동하시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렇지만 당신은 믿는 사람이 아니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것은 이런 말을 신앙인들에게서도 자주 들었습니다. 가끔은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는 식으로 말을 들으면 “난 예수님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교만한 것인 양, 혹은 예수님은 인간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인 양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 분과 한 몸을 이룬다고 믿습니다. 그 분과 한 몸을 이루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과 한 몸이 아니고 그 분은 그 분이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 분이 하셨을 것처럼 살려고 하지 않고 나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신자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처음의 예에서 정말로 믿지 않으시는 분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분과 한 몸은커녕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어떠한 기적도 그 사람에겐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은 거지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겉으로는 믿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인공이 거지 라자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부자이고 예수님은 그를 통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성경말씀대로 살았다고 한다면 거지 라자로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살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절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먹고 즐기라고 가르치지 않고 구약에서조차도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는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살려내어 자신의 형제들은 자신처럼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합니다. 겉으로는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제가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당신 때문에 나도 지옥에 왔다고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자신 때문에 구원받게 된 사람들 때문에 더 행복하게 될 것이고 지옥에서는 자신 때문에 지옥에 오게 된 사람 때문에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 비유말씀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라자로’라는 이름을 그냥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라자로를 죽음에서 불러 살려내십니다. 그러나 역시 바리사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즉,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성경을 믿지 못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들도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은 ‘나는 예수님이 아니니까.’라는 식으로 넘겨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을 먼저 믿지 못하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나의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먼저 성경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성체만 영한다고 다 신앙인이 아닙니다. 성체는 말씀이고 말씀은 성체로써 우리 몸과 하나를 이룹니다. 몸만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하나를 이루어야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그대로 살려고 한다면 나를 버려야합니다. 그렇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애야, 너는 살아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지 않았느냐?"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토록 심한 고통(타는 불꽃 속에서의 갈증)을 겪고 있을까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너무도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닌 재산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 재산을 이용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았습니다. 의식주 그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이 있으면 액수를 따지지 않고 사다가 먹었습니다. 옷은 오로지 최고급 명품으로만 잔뜩 치장했습니다. 집은 임금님 대궐처럼 지었습니다. 매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냥 즐겼습니다. 오직 제 한 몸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즐겼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가 진귀한 음식을 즐기고 있던 바로 그 식탁 밑에만 하더라도 라자로라는 거지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엎드려서 "언제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동네 개 보듯이 했습니다. 기분 좋으면 뜯고 있던 닭다리 하나를 크게 선심 쓰듯이 밑으로 던져주었습니다. 비유에 전개된 상황을 머리 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치가 떨리지만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자의 가장 큰 과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 앞에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잘 나누어 쓰라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임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돈이면 다인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하게도 무시하면서 오만하게, 안하무인격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가서는 지옥불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불평등과 불의, 의인의 고통,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움을 우리 역시 나몰라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성실히, 꾸준히, 정직하게 일해서 획득한 부와 명예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부자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난 후의 처신은 더욱 중요합니다. 본인이 열심히 일한 탓으로 부자가 되기도 했겠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그 부는 너무나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떳떳하고 영광스런 부와 영예, 재능 앞에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신 그 부와 명예, 재능을 하느님께 도로 돌려드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부자,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부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누지 않고 제 한 몸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부자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예수님께서는 잘 묘사하고 계십니다. 이 지상에서 너무나 호의호식했기에 저 세상에 가서는 물 한 방울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물 한 방울만 주셔서 타고 있는 혀를 축여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고, 작은 손길이라도 보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오늘 하루가 되길 빕니다.
장례식장에서 검시관이 죽은 시신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구의 시신을 보는 순간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신들의 얼굴을 보면 빙그레 웃는 표정이었거든요. 이 사람은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데 이렇게 웃다가 죽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첫 번째 사람은 너무 가난하게 살았는데 로또 복권을 사서 당첨이 되었습니다. 몇 십억을 벌게 되었으니 너무 좋아서 웃고 춤추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 역시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조사를 해 보니 아들이 3년간 재수를 했는데 3년 만에 서울대에 합격을 해서 너무 좋아서 춤을 추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세 번째 시신도 “히~” 하고 웃고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번개를 치는데 누가 자기를 사진 찍어 주는지 알고 “히~” 하고 웃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 이야기를 보면서, 누구나 이렇든 저렇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가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수백억의 인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그런 중에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우리 역시 조상님처럼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언젠가는 떠날 것인데,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음을 잘 준비하고 사는 것일까요? 먼저 살다가 떠나가신 조상님들이나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이 지금 우리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복음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라자로는 살아 있을 때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였고, 부자는 반대로 부유하게 살면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큰 죄를 지었을까요? 라자로는 단순히 가난하게 살았던 이유만으로 죽어서 복을 누리는 것일까요?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라자로는 비참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어떤 원망이나 불평이 없었습니다.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그는 무력했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하느님께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즉, 그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말없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들어서서 고통을 받자마자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정도가 라자로하고는 현저하게 차이난다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부자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자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바랐다는 내용의 성경 말씀으로 보아, 부자 곁에 라자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라자로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갓 동물인 개가 그를 핥아도 가만히 놔두는 무관심을 보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바로 사랑에 있었음을 복음에서는 말해줍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깊은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담긴 사랑. 그 사랑의 크기로 인해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사랑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할까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강하고 고결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진정한 용기다.(몽테뉴)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양승국신부- <기회> 그리스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에 가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부조 조각화 한 점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작품입니다. 그냥 지나치는 관광객들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작품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큰 감명과 깨달음을 주곤 한답니다. 주인공의 형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완전 대머리입니다. 발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요,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외적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났든지, 아니면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던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몇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축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좋은 기회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해 어려운 이웃도 돕고 또 자신을 위해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을 보십시오. 라자로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가 자신의 식탁 바로 아래 기어 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기회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우리 역시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기회는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다시금 새 출발할 있는 기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기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 사랑과 자비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누가 더 불행한가? -김찬선신부-
루카 복음에만 있는 이 이야기는 오해와 논쟁의 소지도 많고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 이정배 목사-
오늘 본문은 구약시대에서 내려온 율법, 특히 가난한 이들을 홀대하지 말라는 하느님 말씀을 환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죽은 후 상황이 반전되는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고 부자는 마실 물 한 모금 없는 지옥 불에 던져져 있습니다. 부자는 이런 정황을 자식들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비롯해 뭇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느냐는 것이지요. 이미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듣지 않은 결과가 바로 부자의 운명이란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에는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셔서 한 달에 한번 영성면담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성지도 신부님 중에서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사제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영성면담을 하면서 이 신부님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영성 면담하는 방식을 말씀드려 볼게요. 이웃의 말을 끊지 말고 들읍시다.
빠다킹신부
교회의 사랑 -허찬란 신부-
라자로’란 이름 자체가 가난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의미입니다.
무관심이라는 죄 -이동훈 신부-
필자가 사목하는 ‘살레시오의 집’은 정신지체장애우 시설이다. 장애우 50명에 그들을 돌보는 직원이 34명이다. 직원 수가 다른 시설에 비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직원들이 장애우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며 세세하게 마음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큰 사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장애우들이 서로서로 돕기 때문이다. 돈과 재물 -강영구신부- 스승 예수님, 당신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루가12,15) 이웃을 위한 마음과 눈과 귀 -박상대신부- 마태오, 마르코와 함께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루가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루가 고유의 특수사료들이 많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우선 예수의 전사(前史)가 그렇고,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여자들,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관심을 소재로 삼은 대목들도 그렇다.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는 모습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루가복음의 고유성에 속한다. 루가는 세상의 재물을 놓고 부자와 빈자, 소유와 포기에 관한 문제를 큰 관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죄인들의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에 관한 다양한 비유들도 빼놓을 수 없는 루가의 특수사료들이다. 특히 루가복음 15~16장에는 다른 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유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잃었던 은전의 비유’(15,8-10), ’잃었던 아들의 비유’(15,11-32), ’약은 청지기의 비유’(16,1-15), 그리고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가 그것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우선 부자와 빈자에 관한 비유이다. 오늘의 비유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부자와 빈자가 처해있는 이승의 모습을, 2부는 저승에서의 역전된 상태를, 그리고 3부는 이승과 저승의 관계를 보여준다. 1부에서 부자와 빈자의 대조가 매우 날카롭고 격한 색조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빈자는 빈털터리 거지에다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고, 게다가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을 만큼 비참한 삶을 인내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19-21절) 그런데 2부는 죽음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후에 부자와 빈자의 상태가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개한다. 빈자는 죽자 바로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아브라함 품에 안기었다는 것과 부자는 죽어 그냥 땅에 묻혔다는 대비(對比)가 역전의 전초전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똑같은 저승에서 빈자의 상태와 부자의 상태가 큰 구렁텅이(카스마)를 사이에 두고 전혀 교류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이는 3부의 이승과 저승의 관계로 다시금 강조된다. 저승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 부자가 이승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이승에서의 삶은 이승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부자이건 빈자이건 간에 어떤 모양으로든 교류가 가능하다. 오늘 비유에서 치부(致富)나 부유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관건은 사람자체에 있다. 바로 자신이 가진 부(富)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 말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즉 자기 집 문간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부스러기나 주워먹고, 개들에 의해 종기까지 핥음을 당하는 한 거지를 보고도 보지 못하고, 그 신음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부자 말이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하느님 나라에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모세도 예언자도, 누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부자는 철갑을 뚫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동(動)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비록 이승에서 부자였지만 저승에서는 참으로 가난한 빈털터리였던 셈이다. 세상을 살면서 타인을 위한 눈도, 귀도, 마음도 없는 자는 이와 마찬가지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라자로의 처지가 천국에 빗대어 표현되었으나 부자의 처지가 굳이 지옥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비유가 빈부의 극심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비유는 다만 저승에서 반전된 처지를 통하여 이승의 부자들을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비유는 사실 ’예수의 말씀을 비웃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16,14)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앞서간 대목들을 함께 살펴보면 재산의 소유가 제자로서의 예수님 추종을 줄곧 위협하고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하게 함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재물의 소유가 이승에서는 안위와 행복을 약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도 모르는 저승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빈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빈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의지요 선택이며 사랑이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루가 16,19-31) -유 광수신부-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이마로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개들만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복음에서 부자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남과 나누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기적인 인간을 말한다. 즉 부자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부자들이다. 생명, 시간, 건강, 능력, 이웃, 아름다운 자연,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연인,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많은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친구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저녁에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 온갖 다양한 아름다운 꽃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는가? 부자란 이 모든 것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이다." 부자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즉 부자란 하루 24시간을 몽땅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하느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루 24시간을 자신이 먹고 마시는 일에, 친구를 만나는 일에, 자기 취미생활에, 일을 하는 데에, 여기저기 구경하는 일로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에,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부자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 많은 시간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또는 하느님에게는 인색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왜 예수님은 가난한 라자로가 되셨는가? 예수님이 처음부터 가난하셨던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셨기 때문에 가난한 분이 되셨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삶에 대해 바오로는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고린 후 8,9)라고 설명해 주셨다. 결국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얼마나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부자요, 이웃에게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부자는 항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늘 부자로 살 것이고, 가난한 이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비록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늘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생활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요, 정말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늘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인색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물 한 잔도 청하지 않으셨고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 아니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도 인간을 위해서 다 흘리셨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철저하게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이 지상의 생활하시는 동안에도 가난한 삶을 살으셨고 죽으실 때에도 몸에 걸쳤던 옷까지도 다 벗기우신 채 가난한 죽음을 맞으셨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옵니다."라고 끝까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그 순간에도 당신의 죽음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죽어 가는 왼쪽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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