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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갈맷길 3코스
부산 원도심 속살을 느낄 수 있는 코스.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 부산근대역사관, 국제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등 부산의 근현대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유적지를 감상하는 것이 묘미다. 중구 중앙·남포·부평동 등 원도심에는 허름하지만 맛은 탁월한 식당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자갈치시장 서쪽 끝에 있는 생선구이 골목 방문도 필수. 생선을 산더미만큼 쌓아놓고 껍질은 노릇노릇, 속은 보들보들하게 구워낸다.
3-1구간 11.5㎞, 4시간 ★★
오륙도 유람선선착장~신선대~UN기념공원~(옛)부산외국어대~부산진시장
3-2구간 15.8㎞, 5시간 ★★
부산진시장~증산공원~초량성당~부산역~백산기념관~부산근대역사관~국제시장~자갈치시장~영도대교~남항대교
3-3구간 13.7㎞, 5시간 ★★
남항대교~절영해안산책로~중리해변~감지해변산책로~태종대 입구
신선대(부산)
위치 :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303번길 6 (용당동)
문화재 지정 :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9호(1972.6.26 지정)
황령산에서 뻗어나온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되면서 이루어진 우암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신선대는 오륙도가 있는 탁트인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다. 면적은 4,121.707㎥이며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란 큰 바위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신선대란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말기 최치원이 유람한 곳이라고도 한다.
평화공원
위치 :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447번길 10
부산 시민들의 대표적인 쉼터 평화공원은 동백나무, 소나무 등 수목 3만 그루를 심어 더욱 푸른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공원 한가운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분수가 있어 여름에는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고, 밤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분수가를 배경으로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선장과 함께하는 도시 항해] 4. 우암동 소막마을
부산일보 기사 입력일 : 2018-03-07
글·사진=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길잡이·자료제공=이성훈 선장
산업화가 외면한 도시의 역사 되밟는 길
변방은 말 뜻대로 중심과 동떨어져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미처 그에 못 따라가는 게 변두리 신세다. 심지어 중심의 변화로 생긴 배출물을 고스란히 안아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쓸모가 생기면, 그곳에 또 수고로움을 안기는 것도 도시의 못된 속성이다. 이익 추구란 비수를 등 뒤에 감춘 채 주거시설 개선이란 명분을 내걸며 불도저 날을 주저 없이 들이댄다. 수려한 바다와 화려한 빌딩과 충만한 문화를 자랑한다는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해양수도란 명성을 얻을 때까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지역에 또다시 고된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어찌 없을까.
부산 남구 우암동(牛岩洞)의 현재와 과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 소들의 반출지였고, 그 소막사가 해방 후 귀향자와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삶터가 된 지역이다. 이들은 이후 우암동 일대에 들어선 여러 공장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세월도 오래가지 않았다. 산업구조 재편으로 공장과 사람이 밀려났고, 쓸쓸한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곳에 다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이름하여 재개발 열풍. 지금의 모습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해방 귀향자·전쟁 피란민의 터전
얽힌 미로엔 소막사 형태 가옥들
옛 모습 지워나가는 재개발 바람
주민들과 고락 함께한 동항성당
부산진시장으로 향하는 장고개
도시화에 밀려난 삶의 흔적만…
그래서 이번 도시 항해는 기억을 각인하는 작업이다.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이전의 도시 항해와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이렇게라도 종적을 남겨놔야 훗날 항해의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역사를 기록하고, 공부하는 이유이니까. 이성훈 선장이 뱃고동을 울린다.
■리우데자네이루를 찾아서
우암동에 이런 풍문이 돈다. 리우데자네이루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당장 눈 앞에 펼쳐지는 건 가득한 컨테이너와 크레인, 그리고 군데군데 쓰러져 가는 가옥들이다. 이런 곳에서 세계 3대 미항의 경치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마술을 부리는 카메라의 재주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해본다. 피사체의 크기와 색상, 채도, 명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에 대상을 더 매력 있게 잡아내는 게 사진기 속성이므로.
이런 기대와 의문을 마음에 담고 길을 잡는다. 남부중앙새마을금고 정류장이 출발점이다. 길 너머 새마을금고와 우암2동 우편취급국 건물이 매립 전에 있었던 옛 적기 뱃머리 자리다. 일제강점기 때는 새마을금고 건물 뒤쪽에 우역검역소와 소막사들이 있었다. 거기에 있던 조선 소들이 여기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반출됐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까지 '편리사'라는 통통배가 다녔다. 출퇴근이나 볼일 보러 오가는 우암동 주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적기(赤崎·아까사끼)로 불렸다. 나이 지긋한 이들 중에 지금도 이곳을 그렇게 부른다. 이 지명에 대한 설명은 두 갈래이다. 붉은 산이 있는 우암동의 지질 상 특징에 따른 것이라는 설이 있다.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이 일대 지명인 '감만(戡蠻)'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싫어 일제가 의도적으로 적기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30년대에 우암로 앞쪽이 매립되면서 적기 뱃머리가 사라졌다. 매립지에 부두와 컨테이너 장치장이 들어섰다.
마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발길을 내디딘다. 길가에 낡고, 먼지투성이인 술집 간판이 하나둘 버티고 있다. 호경기로 손님들이 넘쳐났던 시절의 영화는 오간 데 없다. 이곳에도 사람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1960~1970년대에 성창목재와 제분공장, 양말공장 등이 번창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사람과 돈이 돌고 도는 세상, 술집도 어찌 흥청망청하지 않았으리.
SK 명성주유소를 지나자 산 쪽 도로를 만난다. 거기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이는 길이 우암로 200번길이다. 우암동 새 시장이다. 아니, 우암동 새 시장이었다고 과거형을 써야 하나. 인구가 급증하던 시절, 기존 우암시장에 과부하가 걸리자 새로 조성된 시장통이다. 그러나 지금은 썰렁하다. 과연 시장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양달마을 행복센터는 우암동의 유일한 영화관이던 동원극장 터였다. 인구도 줄고, 멀티플렉스 광풍도 부니 영화관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그만큼 쇠락의 속도와 범위는 빠르고도 넓었다. 노동자와 주민에게 현실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게 했던 영화관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행복센터가 이름 그대로 주민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도로 폭이 꽤 넓은 우암양달로로 올라선다. 군데군데 지붕이 무너진 가옥들이 우암동 쇠퇴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소막사 지붕 모습이 그대로
동항성당(東港聖堂)이 우측 산 쪽으로 어깨를 드러낸다. 우암동 주민과 고락을 같이 한 성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역 빈민 사업과 사회 복지 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지역 사회의 빛과 소금이었다. 1959년 3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독일인 하 안토니오 신부는 '판자촌 성자'로 불린다. 사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고, 전쟁고아를 돌보고 가르치는 등 교육 사업에 헌신하며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전시회에서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 우암동 사람들을 '이란 평가를 받았다. 신부는 지난해 95세로 선종했다.
동항성당 정문을 나와 정문 뒤편 '우암동 도시 숲'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 길로 올라가면 동항성당 옥상에 있는 예수상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부산항대교를 품에 안은 듯한 모습이다. 낯익은 광경이다. 그렇다, 찾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항구를 내려다보는 예수상과 모습이 비슷하다. 코르코바도 언덕의 그것과 비교해 크기는 작지만, 포근함은 그에 못지않다. 우암동 주민들에게 동항성당이란 존재의 크기가 그렇다. 아쉬운 건, 이 멋진 조망 포인트가 거미줄 같은 전깃줄에 가려있다는 점이다.
감동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소막마을로 향한다. 출발점이었던 새마을금고 뒤쪽 동네다. 우암동은 그 이름처럼 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우역검역소와 소막사들이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소막사가 피란민들의 수용소로 변했다. 이후 이들은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소막사가 삶의 터전이 된 것이다. 소막마을은 출발지인 남부중앙새마을금고 뒤쪽과 장고개길 왼쪽, 아신아파트 아래쪽에 형성돼 있다. 검역소는 현재 아신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우사 40곳에 19개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소막 하나의 크기는 폭 5칸(약 9m), 길이 15칸(약 27m)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막마을 골목길로 들어선다.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기 어려울 정도의 실핏줄 같은 미로가 이어진다. 소막마을을 양분하는 우암번영로를 제외하곤 모두 좁은 길이다. 이성훈 선장과 공경식 피란자산해설사가 지도를 펴놓고 위치를 가늠한다. 소막 형태가 그대로 남은 집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어떤 집은 지붕의 반쪽만 소막사 형태다. 지붕 일부만 소막사 흔적이 남아 있는 가옥도 보인다.
무허가이다 보니 전면적인 개보수를 하지 못하고 조금씩 고치다 보니 그런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전면은 일본식 가옥이고, 지붕은 소막사 형태인 한 곳이 '소막사 주택 기념관'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골목길 안에는 옛 우물터가 있다. 골목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칠한 노랑 페인트가 정겹다. 아직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좁은 골목길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가스 배달부가 안쓰럽다.
■누굴 위한 재개발인지
옛 검역소가 있었다는 아신아파트 뒤편 동항로에 우암동 쌈지 도서관이 있다. 우암2동 파출소가 있던 자리다. 우암동 인구 격감으로 파출소 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도서관으로 변모했다. 공장들이 폐업하거나 외지로 이전하면서 지역 경제가 계속 침체 상황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고령화 현상도 심각하다. 이런 상태에서 부는 재개발 바람 속에서 오갈 데 없어진 노인들의 신음이 떠다닌다. 경제력과 활동력이 부족한 그들이 보상비로 부산 어디에서 삶터를 마련할 것인가. 그 고통이 도시 항해 중 만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 온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신발이 닳도록 다녔을 장고개를 넘는다. 우암동 쪽에서 문현동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이다. '장을 보러 갈 때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장고개라는 이름이 붙였다. 장바구니와 보따리를 이고 지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 너머 부산진시장으로 향하던 우암동, 감만동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직선으로 새로 닦인 장고개길을 피해 옛길을 걷는다. 그 도중에 있는 우암동 주민체력단련장 마당에 '수출소 검역소 옛터 표시석이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원래 위치와는 동떨어져 있지만, 기록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
남구 문현동 경계 지점인 상경전원아파트 앞이 장고개 마루다. 그곳을 넘어 서니 문현동이다. 길 끝자락에 있는 문현동 곱창거리를 지나면 큰길이다. 우측으로 350m 정도 걸으면 도시철도 2호선 지겟골역 3번 출구가 나온다.
우암동에서 맛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내호냉면(051-646-6195)이다. 'since 1919' 표시가 뚜렷하다. 부산 밀면의 원조로 자부하는 곳이다. 문현동 곱창거리의 칠성식당(051-632-0749)은 영화 친구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간판에 영화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같은 곱창거리에 있는 백년 전통곱창(051-633-6847)과 원조양산곱창(051-635-1571)도 탐식가들로부터 호평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에 가축시장이 있었다. 가난한 시절, 도축장에서 나오는 고기와 부산물을 재료로 하는 음식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곱창이었다.
문현동 곱창 골목
요약 :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에 있는 곱창 요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골목.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일대에는 도축장과 가축 시장이 있었다. 도축된 소와 돼지의 고기는 통조림으로 만들어 만주 등지의 전선(戰線)으로 공수되고 남은 내장 일체를 인근 문현 시장에 공급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현동 곱창 골목이 형성되었다.
일제 강점기 지금의 문현 교차로 북쪽에는 조선방직 사택이 줄지어 있었고, 6·25 전쟁 시기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따라서 문현 시장에서 판매하던 곱창은 일찍부터 노동자들이 즐기던 값싼 음식물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현동 곱창 골목의 전성기는 1970~1980년대이다. 인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공장과 남구 감만동 부두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남구 문현동 일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이들의 유일한 안주거리가 바로 곱창이었다. 노동자의 단골 먹거리가 되면서 1990년대부터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전문 거리를 이루었다. 이후 문현동 곱창 골목은 남구 문현동과 인근에 한정하지 않고 부산 지역 전체 노동자들의 단골 먹거리로 정착되었다. 문현동 곱창 골목은 2001년 영화 「친구」 촬영지가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2년 시작된 문현 곱창 거리 축제 때는 인근까지 연기가 퍼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가게가 줄어 15개소 정도가 있다.
문현 교차로에서 대림 시티 프라자 뒤편 문현 4동 방향으로 늘어선 문현동 곱창 골목에는 15여 곳의 가게가 들어서 있다. 대표적으로 칠성 식당, 원조 문현 할매 곱창, 친구 양 곱창, 봉화 대박 양 곱창, 남해 곱창, 동백 곱창, 산청 곱창, 양산 곱창, 디오니 전통 곱창, 연일 곱창, 백년 전통 곱창 등이다.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문현동 이름을 빌려 간판을 걸고 운영하는 곱창집이 흔하게 눈에 띌 정도로 문현동 곱창 골목은 유명한 곳이다. 영화 「친구」에서 준석[유오성 분]이 친구 상택[서태화 분]과 함께 소주 한잔 걸치며 건달 이야기를 꺼내는 곳이 문현동 곱창 골목 내에 있는 칠성 식당이다. 칠성 식당은 3개 지점으로 확장되었고, 본점은 아직도 영화 속 모습 그대로 보존·운영되고 있다.
흔히 곱창이라고 하면 소 곱창을 떠올린다. 즉, 소 위장인 ‘양’과 ‘곱’이라 부르는 작은창자를 일러 양 곱창이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문현동 곱창 골목은 돼지 곱창이 주 메뉴이다. 현재 문현동 곱창은 구포 등지에서 공수해 온 돼지 내장을 사용하고 있다. 돼지 곱창에는 특유의 구린내가 나는데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밀가루를 푼 물을 이용해서 깨끗이 씻어 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몰지각한 업자가 가루 세제로 씻는다는 보도가 있어 한때 손님이 뚝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은 후로 문현동 곱창 골목은 더욱 철저하게 재료 선별과 관리에 신경을 쓴다.
초벌구이를 한 곱창에 양념을 하고 2차 구이를 한 뒤 손님 불판에 내어놓는데 연탄불의 열기를 받아 3차 구이 되는 곱창은 노릇노릇하여 먹기에 좋다. 잘 익은 곱창은 소스에 찍어서 먹는다. 또는 상추나 깻잎에 얹고 파 겉절이와 소스, 마늘을 얹어 즐기기도 한다.
예전에는 주 고객층이 공사장 노동자나 인근 사무실 샐러리맨이었는데, 최근에는 젊은 연인들과 20~30대 여성들도 자주 찾는다. 곱창은 질긴 듯하지만 육질이 연하고 소화 흡수가 잘 되어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도 잘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비타민 B1과 단백질이 풍부해 피부에 좋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산 진시장
위치 : 부산광역시 동구 진시장로 24
부산진시장은 혼수와 원단특화 전문시장으로 아주 유명한 곳으로서, 서울 동대문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백화점 못지 않은 많은 물품과 방대한 종류의 상품들을 판매하는 1350여 개의 점포들이 입점해 있다. 한복, 원단, 이불, 그릇 등 혼수용품과 의류, 악세사리 뿐 아니라 식육점과 분식점, 해산물까지 수용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혼수, 원단용품 점포가 600여 개에 달하여 경남은 물론 전국에서 도매상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찾을 정도 특화된 시장이다. 부산진시장은 연면적 2만9239m2(8844평) 규모의 지하2층, 지상3층짜리의 현대적 건물로 전 층의 대리석 시설을 완비하여 고객 여러분께 깨끗하고 쾌적한 실내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컴퓨터, 바둑 등을 즐길 수 있는 휴게실과 부모님들의 편의를 위한 유아휴게실 그리고 옥상에 만남의 장이 준비되어 있으며, 10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별도의 주차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40계단을 아시나요?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05.03.07.
[오마이뉴스 김병기 기자]주말 오후의 중앙동(부산 중구 중앙동 4가와 그 일대), 여느 때 같았으면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겠지만 - 중앙동 일대는 해상운송업, 금융업, 육상운송업 등의 회사가 대부분이다 - 정부가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부터는 쉬는 회사가 많아 거리는 한산했다.
중앙동에서 해상 운송업에 종사한 스무 세 해 동안 내 몸을 부려 나와 가족을 먹여 살려 왔으니 대단하기도 하고 가슴 뿌듯한 일이기도 하다.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경칩인 3월 5일이었지만 날은 아직도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산 중구청은 부산시 중구 중앙동 일대에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과 향수가 젖어 있는 거리를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로 지정했는데, 이곳은 국민은행 중앙동 지점에서 40계단을 거쳐 팔성관광에 이르는 일대의 거리를 말한다.
1950년대 6·25 전쟁 당시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어린 식구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며 그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도 오게 된 것이며 이 중앙동과 동광동, 영주동 일대에서도 터를 잡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당시 대부분 동광동, 영주동 산비탈에 판자촌을 이루고 이 40계단을 통하여 삶의 여정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부두의 노역자로,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의 잡부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이 40계단을 오르내렸던 것이며 영도다리와 북항의 배들을 바라보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도 했던 것이다.
안성기, 장동건, 박중훈, 최지우가 열연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의 살인사건 장면이 나오는데 그 촬영 장소가 바로 이 40계단이기도 하다. 지금도 윗동네 동광동, 영주동과 아랫동네 중앙동을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 당시를 살았던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당시의 피난시절을 돌이켜보고 향수에 가득 젖었으리라.
이 테마 거리에는 피난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 조형물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조형물의 면면이 그 당시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삶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중앙동 일대가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1908년경에 매립이 되고(매립 후에 <새마당>이라 불림), 부두가 조성되었으며 이 일대가 부두와 관련된 일을 하는 중요한 장소로 지금까지 발전하여 왔다. 지금은 이곳에 국내외 유수한 선박회사들의 사무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그 외에 이와 관련된 하역 운송 등의 업을 영위하는 사무실도 마찬가지로 들어서 있다.
그런가 하면 부산과 경남의 수출입 화물과 그 부대업무를 관장하는 부산 본부 세관도 있고, 한국과 일본을 잇고 경남 일대 도서지역을 연결하는 국제, 국내여객부두도 이곳에 있다. 이렇게 발전돼온 중앙동 일대가 각 자치단체들의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지역의 특성을 살리는 작업을 중구청이 발 벗고 나서서 1950년대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40계단을 문화적 테마로 삼아 이 거리를 2004년에 조성을 한 것이다.
40계단 중간쯤에는 ‘아코디언 켜는 사람’의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이현우라는 작가(일대에 설치된 조형물의 대부분은 그의 작품)가 만든 작품인데 이 작품 앞에 서면 피란시절 당시의 애환이 서린 1950~60년대에 유행하던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목포 유달산에 가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오고가는 이들의 발목을 잡지만.
이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를 조성한 부산 중구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40계단문화사업회의 ‘경상도아가씨’, ‘용두산 엘레지’ 등 그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를 부르는 가요 콩쿠르를 필두로 하는 40계단문화축제가 매년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일대 주위로는 민족 독립 운동가이셨던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기념관과 용두산 공원, 보수동 책방골목, PIFF 광장 등의 명소가 또한 자리를 잡고 있어 타지의 관광객들이 쉽게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일기예보는 오늘 부산에도 눈이 내릴 것이라 한다. 이 거리를 취재하는 동안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취재 기사를 쓰는 동안 눈이 내린다. 그것도 함박눈이.
부산 용두산공원(釜山 龍頭山公園)
소재지 :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길 37-55
요약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에 있는 공원. 일제강점기에 용두산 신사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6·25전쟁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녹화사업을 진행하고 우남공원으로 개칭했다. 4·19혁명 이후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산탑 및 4·19 의거 기념탑, 이충무공 동상이 세워져 있고 팔각정, 수족관, 과학관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용두산에 있는 공원. 부산항이 동쪽, 부산광역시청이 동남쪽 바로 밑에 있고, 부산 시가지와 영도가 내려다보여 시민들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아낌을 받는 부산의 명소이다.
용두산공원 내에는 부산의 지나간 역사를 반영해주듯 4·19의거 기념탑, 이충무공 동상, 국민교육헌장비 등 동상과 비(碑)가 많이 세워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용두산의 모양이 가마솥 같다 하여 부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하여 송현산이라고도 했고, 임진왜란 후에는 용과 같은 산세가 왜구들을 삼켜버릴 기상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용두산 신사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6·25전쟁 후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판자촌 지대를 형성했으며, 2차례에 걸친 피난민 촌락의 대화재로 울창한 숲은 민둥산이 되는 등 초라해졌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우남공원이라 개칭하고 녹화사업에 힘써 다시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했으며, 4·19혁명 후 다시 용두산공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원 정상에는 1974년에 건설한 부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높이 120m의 부산탑이 세워져 있다. 부산탑에서는 태종대와 오륙도를 비롯해 시야가 좋은 날은 멀리 쓰시마 섬[對馬島]까지 보인다고 한다. 특히 부산탑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항의 야경은 이곳의 큰 자랑이다. 그밖에 팔각정·수족관·과학관 등의 시설을 갖추어놓고 있다. 부산 시가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특히 지하철 남포동역에서 500m 거리에 있다.
부산 근대역사관(釜山 近代歷史館)
요약 :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형성된 부산의 근현대 역사 관련 유물과 영상물, 모형물 등의 전시를 통해 부산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역사박물관.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어진 식민지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미문화원이 철수하면서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의 반환과 함께 부산시가 인수해 2003년 7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부산의 근대거리관,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은 부산의 근대 개항,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 부산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조선 수탈과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주제로 한 상설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에 마련된 부산의 근대거리 전시관은 일제강점기 부산의 중심지였던 대청동 거리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특별전시실에서는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 '근대의 기억, 학교에 가다' 등과 같은 근현대사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전시가 열린 바 있다. 그밖에 부산시민들을 위해 '교실에서 배워보는 부산의 근대역사 이야기', '엄마, 아빠와 함께 떠나는 근대 문화유적 답사'와 같은 사회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별도의 관람료는 없다.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에 위치한다
BIFF 광장
위치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길 4 (남포동3가)
남포동 극장가가 극장들로 자리잡게 된 것은 8. 15해방 후 극장이 한 두 군데 생기면서부터 1960년대에 이르러 20여개소의 극장이 이 곳에 밀집되어 있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지난 1996년부터 부산 국제 영화제(Busan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개최되면서 극장가를 새롭게 단장하고 그 일대를 PIFF 광장(1996. 8. 14/현, BIFF 광장)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영상문화의 저변확대와 새로운 문화관광명소로 새단장하여 국제적 문화관광 도시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남포동 구)부영극장에서 충무동 육교까지 428m에 이르는 도로를 '스타의 거리'와 '영화제의 거리'로 나누어 조성하고 있다.
매년 이곳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야제 행사로 유명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 및 눈꽃점등 행사 등 'BIFF 광장 여는 마당'이 개최되고 있다. 개봉극장이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곳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근래 들어 단순히 영화만 보는 곳이 아닌 쇼핑과 위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공간화되면서 젊은층이 늘어 이 지역 상권의 활기를 되찾는데 큰 역할을 맡고 있다.
국제시장(國際市場)
요약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 동포들과 6·25전쟁으로 밀려온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상권을 이루었으며, 미군의 구호품과 반출물자 등이 유통되면서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1968년 이후 현대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2002년 아케이드가 설치되었으며 2008년에는 인근 시장들과 연합하여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2014년 영화 <국제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개요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대청동, 창선동 일대에 걸쳐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전쟁과 함께 밀려온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기도 했으며, 각종 군용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체 6 공구로 된 지금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인근 시장과 연합하여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역사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48년에 단층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6·25전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국제시장은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했다.
속칭 '케네디 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창선동1·2 가의 의류도매 및 덤핑 시장은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가지들이 많이 거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보세 의류품 등이 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한편,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대규모 화재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산권의 도·소매시장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고 있다.
1968년 1월에 목조건물 3개동을 제외한 나머지 9개동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고, 상가대지 0.007㎢(2,177평)가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에게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면서 이후 2005년까지 공구를 나누어 아케이드를 설치했으며, 2008년에는 인근 부평시장, 만물의 거리, 창선상가 등과 함께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현황
2층 상가 형태로 건축되어 있으며 대지 면적은 7,197m2, 매장 면적은 9,497m2이고, 총 580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 주력 품목은 기계공구, 주방기구, 의류이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각종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도·소매 시장이며, 가방·문구·공예품을 판매하는 1공구, 주방기기·칠기·안경 등을 판매하고 있는 2공구, 침구류·양품을 판매하는 3공구, 포목점·주단점·양단점 등이 있는 4공구, 가전제품·기계·공구 등을 판매하는 5·6공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함께 근처에 구제시장 골목, 팥빙수 골목, 화장품 골목, 먹자골목, 소품골목, 깡통 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2016년 기준 약 1,500명 정도가 국제시장과 인근 일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6.25를 전후한 한국 근대사에서 부산과 국제시장이 차지하던 역할을 알지 못하던 세대에게 당대의 풍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서 부산지역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남포동 깡통시장
알짜배기 쇼핑과 즐거운 눈요기
위치 : 부산 중구 중구로 43번길, 47번길
가는 법 :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 7번 출구에서 도보 7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시장으로 옛날에는 주로 미군 부대에서 반출된 물건을 팔던 곳이었다. 미군 부대에선 주로 통조림 같은 깡통 제품이 많이 반출되었는데 그래서 '깡통 시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수입품을 많이 판매하고 있는데 술, 과자, 의류, 화장품, 가방, 그릇 등 다양한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2013년 10월부터는 깡통 야시장이 개장하여 부산 대표 길거리 음식과 다문화 가정이 함께하는 외국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다. 야시장은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 열리며 늦은 시간까지 부산 시민들과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부산 자갈치시장
요약 :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해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해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타버렸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 1층은 활어·전복(패류)·선어·잡어, 2층은 건어·식품·회센터, 3층은 조합사무실·중매인사무실·수산관계사무실로 이루어졌다.
부산항의 남항에 위치한 3층 건물로, 연근해 어패류를 위판할 수 있는 부산수산업협동조합 및 잠수기수산업협동조합도 함께 들어서 있어 입지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하여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하여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전소되었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
연건평 7,256㎡(1층 2,668㎡, 2층 2,902㎡, 3층 1,686㎡), 건물전장 149.6m이다. 이 시장은 활어·전복·선어·잡어·동식당·서식당·식품·건어부의 총 8개 부서로 되어 있으며, 1층은 활어·전복(패류)·선어·잡어, 2층은 건어·식품·회센터, 3층은 조합사무실·중매인사무실·수산관계사무실로 이루어졌다.
1일총물동량은 활어 8t, 선어 10t, 전복 및 패류 3t, 잡어 4t 등 총 25t, 연간총물동량은 활어 2,880t, 선어 3,600t, 전복 및 패류 1,080t, 잡어 1,440t 등 총 9,000t, 연간매출액 약 170억 원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각종 어패류를 공급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및 중구청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으며, 앞으로 복지시설을 비롯한 각종 시설 보강과 유통구조 개선 등으로 발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부산 영도대교(釜山 影島大橋)
요약 :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교동1가와 중구 남포동1가를 잇는 다리.
총연장 214.63m, 폭 18.3m이다. 1931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준공·개통되면서 섬인 영도가 육지와 연결되었다. 이 다리는 육지 쪽에서 약 31.3m가 위로 들리도록 되어 있어 돛대나 굴뚝이 높은 큰 배가 다리에 걸리지 않고 밑으로 지나다닐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하루에 6번 가량 들렸기 때문에 이것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관광이었다.
특히 6·25전쟁 때 피난민의 애환이 담긴 부산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기계가 낡고, 이 다리에 수도관이 놓여지게 되자 1966년 9월 이후부터는 들어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뒤 영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다리를 통과하는 차량 및 30t 이상의 컨테이너 트럭이 많아지자 1980년 부산영도대교 바로 옆에 부산대교를 건설했다. 이로써 부산대교와 함께 부산 도심지와 영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및 산업도로의 역할을 했다.
2003년 옛 부산시청 자리에 롯데월드가 조성되면서 영도대교를 철거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부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보존의견이 우세해 개보수 작업 후 보행자 전용 교량으로 단장하여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로 결정되었다.
남항대교(南港大橋)
요약 :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과 영도구 영선동을 연결하는 해상다리.
강상형교 1,015m, 강합성교 832m, 램프 94m 등 총연장 1,941m의 교량으로 1997년 10월 착공하여 2008년 7월 개통되었다. 폭 25.6m이며 왕복 6차로이다. 부산 신항과 북항 간의 물동량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명지대교-남항대교-북항대교-광안대교-경부고속도로로 이어지는 부산 해안순환도로의 한 축을 이룬다. 추후 천마터널, 구평터널을 통하여 명지대교와 연결되는 고가도로가 이어서 건설될 전망이다. 이 다리로 인해 부산 서부지역에서 영도구를 오가는 거리가 종전보다 8㎞ 단축되고 운행시간도 30분 정도 줄었다.
다리에 너비 3m의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고, 진출입 구간에는 3~5m, 교각에는 1m 간격으로 1,628개의 조명이 ‘신세기를 열어가는 관문’을 주제로 설치되어 있다.
부산 갈맷길 3-3구간 : 남항대교 ~ 동삼혁신지구 입구(아미르공원 입구)
절영해안산책로 관리센터에서 75광장까지 2.3km 45분 소요 -> 75광장에서 영도해녀문화전시관까지 0.8km 20분 소요 ->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서 한국해양대학교입구까지 2.3km 40분 소요 -> 한국해양대학교입구에서 태종대입구까지 1.3km 30분 소요 ->
태종대입구에서 국립해양박물관까지 7.2km 150분 소요 ->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아미르공원입구까지 1.0km 20분 소요
거리 : 14.9km
소요시간 : 5시간
코스 소개
해안가로 길을 재촉하면 해안을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굽이치는 파도와 더불어 절경을 이루는 절영해안산책로와 태종대가 있다. 절영해안산책로에는 모자이크벽화 타일, 피아노계단, 출렁다리, 대마도 전망대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고 길을 따라 걸으면 남항대교를 배경으로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선박, 그리고 기암절벽이 절경을 어우러져 해양 수도 부산만의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또한 절영해안산책로 위로 흰여울 문화마을이 있고 데크길이 이어져 어린 자녀와 손을 잡고 걷기도 좋다. 태종대 입구에는 조개구이촌 자갈마당이 있고, 매년 대한국민국 100대 관광지로 선정되고 있는 태종대는 영도등대, 태종사 수국, 해상유람선, 다누비열차가 유명하다.
주변 볼거리
흰여울 문화마을 : 영도 봉래산 기슭 해안가의 문화예술마을로 포토죤으로 유명하다
절영해안산책로 : 영도 남항동에서 중리항, 감지해변, 태종대에 이르는 해안길
흰여울 해안터널 : 절영해안산책로에 보행편의를 위해 뚫은 70m길이 터널
태종대 : 영도구 동삼동에 있는 명승지로 울창한 숲과 기안괴석 등이 있다
태종대(영도등대) : 태종대에 위치한 등대로 1906년 설치되어 2004년에 리모델링됨
국립해양박물관 : 해양한국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을 종합 해양박물관
코스 도보 인증대
3-3코스 시작 : 영도절영산책로입구(관리센터)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86-47]
중간 : 영도해녀문화전시관[부산 영도구 중리남로 2-36 (동삼동)]
종점 : 아미르공원(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1165)
부산 갈맷길 [3-1 코스] 지도
부산 갈맷길 [3-2 코스] 지도
부산 갈맷길 3-3코스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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