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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0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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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
* 이름 있는 꽃만 아름다우랴 동학농민운동 (1) *
5월, 너른 청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곳이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초록 물결이 온 들판에 넘실대는 곳~
참으로 넉넉한 정경을 가진 곳이 바로 전라북도 고창(高敞)이다
그러나 100여 년전의 고창
(高敞)은 전혀 넉넉하지가 않았다.
핍박과 설움의 땅이었다.
신분의 멍에에,
외세의 족쇄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던 곳이 고창(高敞)이었다.
그 고창에서도 고부(古阜)라는 마을에 들어가 보면 모양이 제각각인 32개의 비석들을 만날 수 있다.
비석들에는 울분과 비탄의 표정을 짓고 있는 상투 쓴 사람들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의 무명용사들이다
일자무식인 고조할아버지가
일자무식인 증조할아버지를 낳았고
일자무식인 증조할아버지가
일자무식인 할아버지를 낳았다.
녹두밭 곁에서 아버지는 가짜로 족보를 만들었지만 나는 그 족보를 태워버렸다.
주자서절요보다도 먼저 나는 녹두꽃이었다.
사람의 가치가 족보에 있지 않고,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일자무식의 사람들!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일어섰다가 거센 비바람에 녹두꽃으로 떨어져 버린 사람들!
지금부터 여러분이 만나 볼 사람들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끝났고 갑신정변도 막을 내렸다.
이들을 누가 진압했는고 하니 청나라이다.
민씨정권을 두 번이나 살려준 하늘 같은 은인이니 청나라가 요구하면 조선은 주어야 했다.
너희는 우리의 속국이니 시키는 대로 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청(淸)나라의 내정간섭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룬 뜨그랄~민씨들을 욕해야 하나?)
한편 일본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
급진개화파를 도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게다가 창덕궁에서 청나라 군대와 붙었다가 깨진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이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미면교환 시스템, 즉 조선의 쌀을 가져가고 자기네 면제품을 갖다 파는 교환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했다.
(워~매 미운것!)
이런 상황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청(淸)나라의 내정간섭이 민씨 정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자,
명성왕후측은 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비밀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이 사실을 러시아의 유럽 쪽 라이벌인 영국이 알아차렸다.
"뭐? 러시아가 조선과 손을 잡는다고? 그건 절대 안 돼!"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1885년 조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어쩌구리! 누구 맘대로?)
그런데 조선 정부는 거문도
(巨文島)가 영국에게 불법으로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청나라에서 연락이 왔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봐라."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 일 없는데요?"
또 다시 청나라가 연락을 해왔다.
"아냐, 분명 거문도(巨文島)가 점령되어 있을 거야. 가서 알아봐." 구시렁대며 조선은 가보았겠지. 이게 웬일? 거문도에 영국 깃발이 떡하니 꽂혀 있는게 아닌가?
(영국군이 불법 주둔한 거문도)
(거문도 주민과 영국군의 모습)
와! 이게 한 나라의 정부란 말인가?
외세(外勢)가 자국 땅에 들어와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정부를 과연 정부라 할 수 있을까?
이 정부의 관심은 오직 하나, 정권유지 밖에는 없었다.
백성들은 손톱만큼도 안중에 없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2년간 영국의 깃발은 거문도에 꽂혀 있다가 1987년이 되어서야 뽑혔다.
이런 정부였지만 그래도 근대화 작업은 계속 해내고 있었다.
비록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개화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모든 개화 정책이 멈춰버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개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요대목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 에
대하여 잠깐 알아봅시다
동도서기는 19세기 후반 개항기 조선의 온건 개화파들이 내세웠던 개화 사상이자 논리입니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동양의 도(道)를 지키고, 서양의 기(器)를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주요 핵심 내용
이 사상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보존하면서도 국가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려는 절충안이었습니다.
동도(東道):
동양의 정신적 가치와 윤리, 전통적인 유교 체제 및 정치 제도(삼강오륜, 성리학적 질서 등)를 의미합니다.
이는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본질로 보았습니다.
서기(西器):
서양의 과학 기술, 무기, 선박, 기계 등 실용적인 도구를 의미합니다. 부국강병을 위해 적극적으로 배워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주도 세력: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등 온건 개화파가 주도했습니다.
목적:
급격한 서구화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보수 유림층의 반발(위정척사파)을 최소화하면서, 필요한 기술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하고자 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사례:
중국 청나라의 양무운동(중체서용)과 맥락을 같이 하며,
일본이 서양의 제도까지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메이지 유신(문명개화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의의: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근대적인 시설(통리기무아문 설치, 기기창, 박문국 등)을 도입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한계:
정치 체제나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하고 기술적인 측면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근대 국가로의 완전한 전환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동도서기는 당시 지식인들이 우리의 뿌리는 지키되, 필요한 도구는 빌려 쓴다'는 고민 끝에 내놓은 현실적인 대응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기까지 ㅎㅎ
1885년 전신이 부설되고, 1887년 전등이 밝혀지고, 1886년에는 최초의 근대학교인 육영공원이 세워졌다
그리고 1885년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 세워졌다가 같은 해에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꾸었다.
신문으로는 한성순보의 뒤를 이어 한성주보가 발행되었다
자, 이렇듯 1880년대에도 나름의 개혁들이 이루어지도 있었는데 이런 개혁들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갈텐데 어떻게 이 돈을 마련했을까?
그건 바로 세금이었다.
세금을 더 걷어서 개혁이란 것을 하고 있었으니 백성들의 생활은 어찌 되었을지?
(안봐도 비디오어유~~ㅠㅠ)
전신과 전등은 아직 기층 민중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것 없어도 얼마든지 살았고, 육영공원(育英公院)은 고위층 관리들의 자식을 위한 교육기관 이었다.
광혜원(제중원)은 서울에만 있었다.
게다가 지방관리의 부패는 한층 더 심해졌으니 백성들의 눈에는 당시 🐕판인 사회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외세의 횡포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본이 들어와 쌀값을 마구 올려놓고, 영국이 거문도를 마음대로 점령했으니 반외세 생활은 나아진 것도 없는데,
세금만 쪽쪽 뽑아가고 있는 봉건지배층들을 반대해서 반봉건(反封建)! 바로 이것이 19세기 사람들이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그래서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정확히 들고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운동 이었다
♡ 최제우(崔濟愚)와 동학 ♡
서학(西學)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지닌 동학, 동학의 창시자는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제선이었으나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한다'는 뜻을 가진 제우로 개명했다.
경주 부근 월성군에서 태어난 최제우(崔濟愚)는 아들이 없던 60세의 양반 출신 아버지 최옥과 과부 한씨사이에서 태어나 6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최제우(崔濟愚)의 아버지 최옥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지식이었다.
그는 등의 저술을 통해 토지 소유제한과 과거제도 개혁을 주장했던 쓸 만한 선비였다.
최제우(崔濟愚)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경서를 배웠으나, 어머니 한씨가 재가한 상태라 서자출신으로 그 뜻을 펼 수 없었다.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며 청년시절을 보내던 최제우(崔濟愚)는 삶의 무상함과 잘못된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나아가 인간을 두루 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다.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구나.
낡은 도덕은 무너지고 지난날의 윤리는 끊어졌다."
수운(水雲)은 전통종교인 유불선(儒佛仙)이나 새 종교인 서학이 구세할 수 있는 종교가 못 된다고 보고 새로운 도를 찾아 길을 나선 것이었다.
1855년 최제우(崔濟愚)가 울산의 여시바윗골에서 수도를 하던 어느 날, 신비한 사람이 나타나 비서(秘書) 한 권을 내밀었다.
"내가 금강산에서 백일 기도를 마치고 탑 밑에서 잠깐 졸고 나니 이 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혹시 이 책의 내용을 풀 수 있는지요?"
최제우(崔濟愚)는 그 비서
(秘書)의 내용을 3일 만에 풀어냈다.
그 책에는 기도의 방법에 대해 쓰여 있었다.
책의 내용을 들은 그 사람은 최제우에게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그 책을 놓고 갔다.
그 후 최제우(崔濟愚)는 그 책에 쓰여진 대로 기도하며 수련에 힘썼고, 마침내 1860년 갑자기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득도에 관한 꽤나 신비스러운 스토리.. 소설처럼 들리지요? 믿거나말거나 😅 )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치라.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니라."
최제우(崔濟愚)는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교리를 완성하여 동학이라는 민족 종교를 탄생시켰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으로 발전시켜 전국 각지에 퍼트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하늘과 같이 귀한 존재이다. 머지않아 하늘이 개벽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다."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최제우(崔濟愚)의 주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누구나 귀한 존재라는 것은 신분제도가 없는 평등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최제우(崔濟愚)는 포교활동을 하면서 동학의 이론화 작업에 착수하여 동학의 경전인 과 를 만들었다.
한문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과는 지식인층을 위한 경전이었고,
가사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용담유사
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요대목에서 (용담유사) 란 알아봅시다*
용담유사(龍潭遺詞)는 동학의 교조인 수운 최제우가 포교를 위해 지은 한글 가사체 경전입니다.
어려운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 이 주로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용담유사 는 한글을 사용하는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이 동학의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노래처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형식:
4·4조의 가사체로 되어 있어 리듬감이 있고 외우기 쉽습니다.
언어:
순 한글로 기록되어 당시 문맹률이 높았던 민중들에게 동학 사상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내용:
최제우가 도를 깨닫기까지의 과정, 득도 후의 기쁨, 제자들에게 전하는 당부와 훈계 등이 담겨 있습니다.
『용담유사』는 총 8편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마다 담긴 메시지가 다릅니다.
1862년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 최제우(崔濟愚)는 동학 교도들이 봉기에 참여하는 것을 말렸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최제우는 때가 될 때까지 조용히 동학교도들의 힘을 키우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동학(東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자 유림(儒林)과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유림들은 동학은 사악한 학문이라고 규정했고, 조정에서도 동학을 금지시켰다.
결국 최제우(崔濟愚)는 1864년에 동학의 사상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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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 동학농민운동 (2)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에 일어났다.
1884년의 갑신정변 과는 10년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 기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 시기 청(淸)나라는 서구 열강들에게 휘둘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일본도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日本)에서는 헌법 제정을 둘러싸고 의회세력과 정부 세력 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이 10년은 조선에게 있어서는 거듭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략을 제대로 세웠더라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다르게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까비......)
♡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 ♡
조선 조정에서는 동학(東學)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종교라고 단정짓고, 1863년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교도들을 탄압했다
동학의 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의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동학을 포교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다들바위 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자연석으로 최시형이 일월산에 은거해 있을 때 꿈에서 계시를 받아 찾았다고 전해지는 바위)
날이 갈수록 동학 교도의 수는 늘어났고 조직은 체계화되었는데,
이는 '포접제(包接制)'의 역할이 컸다.
교주 아래 대접주, 또 그 밑에 접주를 두어 지역을 관할하게 하는 피라미드식 종교조직이 바로 포접제였고, 이 조직이 동학농민운동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헉 이때부터 이미 다단계가? ㅎㅎ)
"동학은 나라에서 금지한 종교이다. 동학교도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조선 조정의 동학(東學)에 대한 탄압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가혹했다.
수령에게 잡혀간 동학교도들은 관청에 돈을 바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벼슬아치들이 나라에서 동학을 금지했다는 것을 핑계로 동학 교도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퀙~벼룩이 간을 빼 먹지..ㅠㅠ)
이러한 탄압이 계속되자, 1892년 10월 공주집회를 시작으로 동학 교도들은 교주인 최제우(崔濟愚)의 누명을 벗겨주고 동학을 인정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이기 시작했다.
*요대목에서 교조신원운동 에 대하여 *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은 19세기 말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주도하에, 억울하게 처형당한 제1대 교주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동학을 정식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 전개된 조직적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종교적 명예 회복을 넘어, 점차 부패한 관리의 척결과 외세 배척을 외치는 정치적·사회적 투쟁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교조신원운동은 크게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를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공주 및 삼례 집회 (1892년):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수천 명의 교도가 모여 전라 감사를 상대로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 탄압 중지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감사들로부터 "중앙 정부에 건의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서울 복합 상소 (1893년 2월):
박광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대표가 서울 광화문 앞에서 국왕(고종)에게 직접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교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포교의 자유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정부의 강압적인 해산 명령으로 실패했습니다.
보은 집회 (1893년 3월):
서울 상소가 실패하자 충북 보은 장내리에 약 2만 명 이상의 교도가 집결했습니다.
이때부터 성격이 크게 변하여, 단순히 종교적 요구에 그치지 않고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 와 "부패 관리 처단" 같은 정치적 구호를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교조신원운동은 한국 근대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92년 11월 1일, 수천 명의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모였다.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 달라. 동학에 대한 탄압을 멈춰라."
집회를 마친 동학교도들은 전라감사에게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1893년 2월에 동학 지도자 40여 명이 광화문 앞에 엎드려 왕에게 최제우
(崔濟愚)의 누명을 벗겨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3일 동안 엎드려 호소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농민전쟁을 예고하다 ♡
보은과 금구 집회
동학교도들은 삼례집회와 광화문 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에서 각각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동학 교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참여했다.
집회에 참여한 수만 명의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요구도 주장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이다.
'척왜양창의'란 왜놈과 양놈들을 배척하고, 의를 내세운다(倡義)는 뜻이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처벌하라."
"지금 조선 땅은 오통 오랑캐의 소굴이 되었다. 일본과 서양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이자,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 온건개혁파로 비교적 때묻지않은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로 삼아 보은에 내려 보냈다.
조정에서 내려온 어윤중이 동학교도들의 뜻을 왕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하자, 동학교도들은 스스로 흩어졌다.
비록 스스로 흩어졌지만, 보은과 금구집회를 통해 해 그들은 부정부패를 없애고 외국세력을 반대하는 그들의 뜻을 드러내 보였다.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기 전 동학은 크게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한 북접과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남접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접은 보은에서 집회를 열고, 남접은 금구에서 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에서 동학 교도들은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과 서양세력에 대한 배척 등 정치적인 내용을 강조했지만 보은 집회를 이끄는 최시형(崔時亨)의 태도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최시형(崔時亨)은 동학교도들이 정치적인 요구를 하면서 난을 부리는 것을 걱정했다.
동학이 나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부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금구에서도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인 집회가 열렸는데,
이는 최시형 과는 달리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전봉준 (全琫準)의 주도로 이루어 금구집회는
보은 집회보다 훨씬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북접 교도들이 스스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은 스스로 흩어져 새로운 불씨를 준비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0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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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
동학농민운동 (3)
♡ 동학 농민운동의 시발점,
고부 농민 봉기(古阜農民蜂起) ♡
보은과 금구 집회 이후 몇 달 동안 농민들의 봉기(蜂起)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해 10월이 되자, 곳곳에서 백성들의 반발이 다시 이어졌다.
그 해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는데도 관리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금을 올려 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읍의 옛 이름인 고부(古阜)의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농민들을 괴롭혔다.
(지 사촌인 조병식은 백성을 위해 방곡령을 내렸더만..ㅉㅉ)
조병갑(趙秉甲)은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공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다면서 농민들에게 빼앗다시피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이미 예전부터 사용하던 저수지인 예동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새로운 저수지인 만석보(萬石洑)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홍수가 나면 그 만석보(萬石洑) 때문에 냇물이 넘쳐 상류에 있는 농민들은 항상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조병갑(趙秉甲)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백성들에게 세금만 비싸게 받아 챙겼다.
조병갑(趙秉甲)의 횡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잡아들여 '불효를 저질렀다.,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그 사람을 풀어 주는 대가로 돈을 챙길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병갑(趙秉甲)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고부지역의 농민들은 조병갑을 찾아가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병갑(趙秉甲)은 군수를 업신여긴다면서 오히려 매를 때려 내쫓았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爀)도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룬 6시럴~ㅠㅠ)
오래 전부터 농민 봉기를 준비하고 있던 전봉준(全琫準)은 조병갑의 횡포로 불만이 가득한 농민들에게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렸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은 수천 명의 농민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고부 관아로 향했다.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내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몰아 내자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농민들은 단숨에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조병갑(趙秉甲)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줄행랑을 쳤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어 억울하게 잡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고,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에게 빼앗아 갔던 쌀을 다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백산 봉기(白山蜂起) ♡
고부 농민 봉기(古阜農民蜂起)의 상황이 알려지자, 깜짝 놀란 조정은 조병갑(趙秉甲)을 파직시키고, 그 후임으로 용안의 현감이었던 박원명(朴源明)을 임명시켰다.
또한 사태해결을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李容泰)를 보냈다.
1894년 2월 고부군수로 새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군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농민군을 달랬다.
"모든 것은 고부군에서 잘못했습니다.
곧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문제점을 고치겠습니다."
박원명(朴源明)의 말을 믿은 농민군들은 하나 둘씩 해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李容泰)는 농민 봉기의 책임을 모두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에게 떠넘기고 박원명을 책망했다.
이용태(李容泰)는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잡아들이며 농민들을 다시 탄압했고, 이에 농민들의 봉기는 전라도 전체의 저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즉 동학농민운동이 포접제라는 조직을 통해서 농민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한 것이며, 이것이 1894년의' 백산봉기(白山蜂起)'였다
"지금 이 나라는 썩은 벼슬아치들 때문에 백성들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시골에 버려진 백성이지만 나라의 위급함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를 낭독한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華仲)은 약 4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점령한 후에 3월 25일에 백산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華仲)이 농민군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곳곳에서 농민들이 몰려들었다
혹시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나요?
이 말은 백산봉기(白山蜂起)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 죽창을 들고 흰옷을 입은 동학 농민군들이 앉으면 푸른 대나무(竹山)로 산이 덮이고, 일어서면 흰 옷 때문에 산 전체가 하얀색(白山)으로 변한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 전주성(全州城)을 함락시키다 ♡
동학 농민군은 군대의 형식을 갖추어 나가며 진군해 황토현 전투, 황룡촌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간 후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했다
동학 농민군에게 전주성(全州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몹시 당황했다.
전주성(全州城)은 조선 전체가 목줄을 대고 있는 식량의 최다 생산지로 호남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주 이씨들의 본관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보관되어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전주성(全州城)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농민군들이 한양으로 진격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 관군의 힘으로는 농민군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청나라에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조선 조정은 청(淸)나라에 군사를 요청했고, 조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었던 청나라는 군사를 보내 왔다.
청나라 군사가 조선으로 출발하자,
일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있는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일본 역시 조선에 군사를 보냈다.
(역쉬 민씨 정권, 일관성 하나는 정말 끝내줍니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외세를 끌어들이는 그 일관성! 빌어먹을~ㅠㅠ)
일본 입장에서 조선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다.
(다음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당시의 일본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 불신임이다 뭐다 해서 의회의 거센 저항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조선에 들어온다니 이런 기회가 또 없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을 수행한다는 명분하에 의회를 해산시켜버리고 조선에 들어왔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과 농민군은 전주성(全州城)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정부에서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협상을 제의해왔다.
"일본과 청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 오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협상을 맺고 물러나면 두 나라 군대는 더 이상 핑계거리가 없으므로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외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농민군은 관군과 협상을 맺었다.
이것이 '전주 화약(全州和約)'이다.
농민군은 정부에게 27개 조항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한 후 전주성을 점령한 지 10일 만인 5월7일,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농민군은 왜 스스로 전주성(全州城)을 비워 준것일까?
단순히 외세의 개입때문이었을까?
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원래 계획을 바꾸어 전주에서 관군과 협상을 맺은 그 속내를 알아보자!
첫째,
농민군은 전주성(全州城)에 갇혀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리해져 갔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외부와 연락이 닿지 않아 다른 지역의 농민군을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둘째,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의 도움이 없었다.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충청도 일대의 동학 교도들이 농민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룬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를 낸다는데...ㅠㅠ)
셋째,
5월이면 모내기와 보리 수확을 해야 할 농번기였다.
세금으로 빼앗기더라도 농사를 짓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농민들은 농사철을 놓칠 수 없었다.
♡ 민초(民草)가 만든 집강소(執綱所) ♡
전주에서 물러난 전봉준(全琫準)은 전라도 곳곳을 돌면서 농민군들에게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다.
'집강'이라는 말은 '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집강소(執綱所)는 농민들이 스스로 고을을 다스리는 자치기구였다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된 고을의 관리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수령을 잡아다가 집강소 활동에 협조할 것을 지시했고, 농민들을 괴롭혔던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에게 벌을 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라도 감사 김학진은 전봉준(全琫準)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각 고을 수령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동학 교도들과의 마찰을 최대한 줄이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집강소에 알려 처리하게 하라."
이로써 집강소(執綱所)는 수령이 있는 관아를 대신해서 고을을 다스리는 기관이 되었다
집강소(執綱所)에서는 불필요한 세금을 없애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렸고, 그동안 농민들이 나라와 부자들에게 진 빚을 없앴다.
집강소(執綱所) 시기를 거치면서 농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이 집강소는 지방자치의 첫 신호탄을 쏘아올린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자치기구였다.
동학의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통해 실시한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신분제 폐지와 토지 균분 등이 들어있어 농민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인간적인 요소들도 있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내용이 지식인들의 주장이라면,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상이 1차 동학농민 운동의 흐름이다.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