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에선 ‘커피 언니’ 같은 이름으로 커피나 각종 수제 음료,
감식초 등을 1000원 안팎의 가격에 파는 상인이 있다.
반대로 남탕 안에는 이발소도 있고 구두도 닦아주며
헤어드라이어도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하면 여성 이용객들도 놀란다.
연말연시나 명절이 되면 동네 목욕탕은 대목을 맞았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던 시절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목욕탕의 높은 굴뚝은 방향을 찾는 이정표 역할도 했다.
목욕과 위생문화에도 변화가 나타나면서 대중목욕탕을 찾는 발길도 예전만 못해졌다.
그러나 뜨끈한 탕에서 몸을 데운 뒤 불린 때를 박박 밀며 씻어내야
제대로 목욕한 것 같다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지기도 하지만
대중목욕탕이 국내에 정착한 지 100년을 넘어서면서
한국만의 독특한 목욕 역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셈이다.
‘탕 안에서 때 밀지 마시오.’ 아직도 오래된 목욕탕 안에선 종종 찾을 수 있는 안내문이다.
실제로 탕 안에서 때를 미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에 와서는
뜬금없어 보이는 저 문구도 나름 오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만 하던 전신욕
국립민속박물관의 이인혜 학예연구사가 쓴
<목욕탕: 목욕으로 보는 한국의 생활문화> 보고서를 보면
삼국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대중목욕탕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시대까지는 일부 양반들만,
그것도 명절에나 겨우 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전신욕을 할 수 있었다.
가까운 냇가에서 몸을 씻던 문화에 익숙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공동으로 사용하는 욕탕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 목욕탕에 간 조선인들은 온탕 안에 들어가
불린 때를 그 자리에서 바로 미는 행동이 ‘매너 없는’ 행동임을 알지 못했다.
당시 신문기사에 “일본 여자들이 같이하게 되면 몹시 싫어하고
일본 사람의 목욕집에는 심지어 더럽다고 들이지 않기까지” 할 정도로
목욕탕을 찾았던 조선 여성들은 차별까지 받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탕 안에서 때를 미는 행동은 공공예절이 아닌 것으로
확실히 인식됐지만 또 다른 사항도 속속 추가됐다.
각종 재료를 이용해 피부 마사지를 하는 경우가 많은 여탕 이용객 사이에서도
특히 날계란은 가장 금기시되는 마사지 재료 중 하나다.
우유와 오이 같은 식재료가 자주 사용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계란은 배수구에 들러붙어 악취를 유발하기 때문에
업주 입장에서는 가장 큰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다.
서울 마포구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는 신모씨(54)는
“청소하는 입장에서 보면 계란이 제일 처치하기 곤란한데
손님 입장에서는 다른 손님 요거트나 우유팩할 때
냄새가 더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여탕에 가면 얼굴과 피부에 다양한 재료의 수제 마사지 팩을 붙인 채
큰 통 가득 얼음과 함께 담긴 커피를 마시며
공용 부항기를 사용한다고 하면 남성 이용객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업장에 따라 다르지만 여탕에선 ‘커피 언니’ 같은 이름으로
커피나 각종 수제 음료, 감식초 등을 1000원 안팎의 가격에 파는 상인이 있다.
반대로 남탕 안에는 이발소도 있고 구두도 닦아주며
헤어드라이어도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하면 여성 이용객들도 놀란다.
게다가 남탕의 수건이 무료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비누거품을 내서 몸을 닦는 샤워수건 역시 무료로 제공된다는 점은 여성들이 잘 모른다.
여성 이용객 중 단골들은 아예 샴푸와 클렌저, 샤워타월은 물론
목욕용 방수 방석, 오이를 갈 때 필요한 강판까지
목욕바구니에 넣어 목욕탕 사물함 주변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남녀에 따라 다른 문화의 차이는 지역에 따라서도 나타난다.
국내에서 ‘사우나’라는 표현이 한때 고급 목욕탕의 대명사로 쓰인 것은
1980년대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온탕과 냉탕 그리고 몸에 끼얹을 물을 담아둔 작은 ‘바가지탕’ 정도만 있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핀란드식 한증막인 사우나를 갖춘 목욕탕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그보다는 조금 앞서지만 속칭 ‘때밀이’라 불리던 목욕관리사가 등장한 것도
1970년대를 전후해 남탕, 특히 수요가 많은 고급 목욕탕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됐다.
대중목욕탕, 일본 ‘센토’에서 전파
목욕탕이 지역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제주도다.
현재는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지붕이 없는 노천탕에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도 목욕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다.
화산섬이라 지표면에 물이 고이지 않고 땅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던 지하수가
암석의 틈에서 솟아 나오는데, 이 용천수는 상수도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1980년대 이전까지 노천 목욕탕을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그 밖에 부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남아 있는
자동 때밀이 기계 역시 지역 특성이 잘 나타나는 경우다.
1981년 부산의 한 공업사에서 처음 개발한 기계가
당시 목욕관리사에게 돈을 내고 때를 밀기엔
형편이 어려웠던 이용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으면 몇 분 동안 모터가
‘이태리타월’을 덮은 둥근 헤드를 돌리며 때를 밀어줬다.
이 기계는 서울과 대구 등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긴 했지만
목욕관리사의 수입을 감소시킬 소지가 있어 점차 사라졌고,
현재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대부분 부산·경남지역에 국한돼 있다.
대중목욕탕이 ‘때를 미는’ 공간이라는 인식은
지난 100여 년 간 사실 크게 바뀌지 않았다.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대중목욕탕의 모델은 일본의 ‘센토(錢湯)’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국내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지만
초기에는 비싼 가격 때문에 보편화되지 못하다가
1920~1930년대를 거치며 일제 당국의 위생 강화 정책과 맞물려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인혜 학예연구사는
“목욕관리사를 통한 때밀이 문화가 시작된 연유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면서도
“한국의 독특한 문화, 일명 ‘이태리타월’로 불리는 때수건은
1968년 초에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인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때밀기 전용 수건이 나올 정도로 이전부터 때를 미는 풍습은
자리 잡았지만 더욱 본격화된 것은 이 시기 이후로 볼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목욕탕 문화, 특히 때밀이 문화가 외국인 관광객들의 체험코스로 자리 잡을 정도로
한국만의 특색을 보이고 있음에도 전국의 목욕업소 사정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 연구사는 “2018년 기준 목욕업 등록 업소는 대중목욕탕은 물론
특급호텔 사우나와 24시간 찜질방을 포함해 6911곳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년 사이에 3000곳 이상이 문을 닫았다”며 “올해 조사를 나갔을 때 이미 문을 닫고
사라진 목욕탕이 상당수였음을 고려하면 앞으로 하락세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