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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8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눈먼 인도자: 규칙만을 강조하는 자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법체계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법인지, 무엇이 덜 중요한 법인지를 헛갈리게 만들어
사람들이 작은 계명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며 정작 더 중요한 사랑과 정의, 자비와 의로움 같은 법은 잊게 만듭니다.
그들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충실하지도 못하며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며,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전의 황금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성전에 거하시는 하느님이신데도 말입니다.
또 제단 위의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하지만,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보다 황금을 더 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이러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보다 황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성당을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은 조립식으로 지어도 20~30년은 거뜬합니다.
사실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건물이 아닌 사람들 안에 사십니다.
제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자리가 거룩해져서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보다 더 큰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한다고 할 때 우리가 보속을 하지 않으면 마치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가 씻기는 것은 우리가 하는 보속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값 때문입니다.
소 신부와 호랑이 신랑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신부는 호랑이 신랑에게 샐러드만을 주었습니다.
샐러드는 몸에 좋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신랑은 샐러드만 먹으며 점점 인내력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고기를 물어옵니다.
하지만 소 신부는 자꾸 고기만 물어오는 호랑이 신랑이 밉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서로 상대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법에 매몰되어 정작 상대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을 알아주면 모든 법은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법만을 강조하면 마음을 잃습니다.
영화 ‘위플래시’(2014)에서 플레처는 자신의 음악적 위대함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가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믿는 매우 존경받고 동시에 두려운 음악 강사입니다.
앤드류는 음악, 특히 재즈에 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 드러머입니다.
그는 최고가 되고자 열망하며 플래처 밑에서 학생이 됩니다.
플래처의 극도의 규율과 완벽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앤드류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복과 개인적인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듭니다.
플래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앤드류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고로 몸이 아픈데도 연주에 참여합니다.
결국 앤드류도 학교에서 퇴학당합니다.
플래처는 법과 같습니다.
그 법을 지키면 분명 위대한 드러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드러머가 되려는 이유는 행복 때문입니다.
플래처는 그 사랑과 행복을 포기하게 하면서 길을 잃게 만드는 못된 선생입니다.
언제나 목적을 위해 법만을 강요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사들은 율법의 디테일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운다고 합시다.
운전을 잘하기 위해 차의 조작법과 스킬을 열심히 배웁니다.
그래서 운전을 잘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잘해서 사고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운전의 정신은 안전입니다.
세세한 규정이나 규칙에 집중하다 보면 그 정신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가게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때 그 사람들이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돈을 주면 술을 사 마시기 때문에 돈을 갚으라고 하며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한 것인지 걱정을 합니다.
이런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모든 법은 그 만든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통해 당사자의 마음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잘못된 인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치중하게 하여 그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게 되어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율법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하느님은 지금 나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를 자주 자신 안에 계신 성체께 여쭈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오 23,13-22
때로 말씀은 나를 위로하고 일으킵니다. 나를 살게 하고 웃게 합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회심자(回心者)의 대표 인물인 성 아우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반전을 거듭했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다 보면 마치 한 편의 흥미진진한 대하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생애는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지?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인지?
그에 비해 한 인간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생애는 그토록 나약한 대죄인도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에서 성덕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 아우구스티노의 지혜와 재능은 출중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탁월한 달란트는 오랜 세월 동안 올바르게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꿈꾸며 살다 보니 오로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 대학과 로마, 밀라노에서 수사학과 역사학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쳤지만, 안타깝게도 마니교 이단에 푹 빠져 하느님을 등지고 짙은 어둠 속에 젊은 시절을 낭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회심의 은총을 불러일으키는데 계기가 된 한 은혜로운 만남이 있었으니, 당시 밀라노 교구 암브로시오 주교님이었습니다.
조금씩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비참함과 한심함을 자각하게 된 그는 어느 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들이냐?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노력하고 있는데, 나름 배웠다는 우리가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을 거듭하던 아우구스티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것입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들고서 읽어 보라! 들고서 읽어 보라!”
방으로 들어온 아우구스티노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성경을 들어 펼쳐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이 확 들어왔고, 그 구절은 마치 벼락처럼 그의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때로 성경 말씀 한마디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 성경 말씀 한 구절은 성경 바깥으로 걸어 나옵니다.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옵니다.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심연의 장소에 머뭅니다.
나를 꾸짖고 내 삶을 휘젓습니다.
나를 위로하고 일으킵니다.
나를 살게 하고 웃게 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로 아우구스티노의 삶을 180도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지난 삶을 처절하게 가슴치고 뉘우칩니다.
보속하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삶을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죄와 과거를 아무런 가감 없이 적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해 베푸신 하느님의 큰 자비도 덧붙여 그 유명한 고백록을 저술합니다.
고백록으로 인해 삶을 바꾼 사람들의 숫자는 하늘의 별들보다 더 많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강론>
(2023. 8. 28. 월)(마태 23,13-22)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3.15).”
여기서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행’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또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확정된 일을 예언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위선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몰라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얻지 못해서’ 못 들어갑니다.
‘위선’은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도 속인다는 점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누가 비판하면 자기는 위선자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진실하게 잘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위선자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탐욕대로 옳고 그름을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위선이 위험한 것이고,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스스로 나팔을 부는 자들입니다(마태 6,2).
위선자들은 진심으로 기도하지는 않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기도하는 척 하는 자들입니다(마태 6,5).
위선자들은 단식과 같은 신심 행위들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자들입니다(마태 6,16).
위선자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자들입니다(마태 23,3).
위선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자들입니다(마태 23,12).
위선자들은 겉은 깨끗하게 보이는데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마태 23,25-28).
<하느님 나라는 진짜로 좋은 나라이고, 지옥은 겉으로만 좋은 나라일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사는 동안에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겉으로만 좋은 나라로, 즉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위선자들은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을 하느님 나라로 착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위선자들은 자격을 얻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사실 그것은 그 자신들이 ‘안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또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의 문과 길을 거부하면서 그쪽으로 안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엄하게 꾸짖으셨는데, 그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예수님의 경고는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넓게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들이 해당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빛과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자기들만의 잘못된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내세우면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자기 혼자서 죄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 즉 대단히 큰 죄가 됩니다(마태 18,6-7).
<위선자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몰라서 따라가는 것이니,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 이들이 있겠지만, ‘모른다는 것’(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죄가 됩니다.
만일에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로로 주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이 전해져서, 주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을 들었고,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위선자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칭찬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주님을 위한 일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일도 아니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선교활동으로 개종하게 된 사람들을, 자신들보다 더 나쁜(더 지독한) 위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