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21~26)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승천으로 마감된다.
가리웃 사람 유다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사도의 후보로 오른 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천거된 요셉과 마티아의 이름이 복음서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놀랍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마치 일지를 적는 것과 같이 있는 그대로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자신의 공동체에 꼭 필요한 내용을 취사 선택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이나 마티아는 그 동안에는 특별하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을 이야기 한다.
두 가지 조건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21~22).
바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단 일회적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가리옷 사람
유다를 대신할 사도에 선출되기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기존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사도로 선출하기 위하여 최대한 기존
사도들과 경험을 공유하며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자를 사도로 뽑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기 보다는 충분 조건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조건 밖에 충족시키기 못했음에도(1코린15,8)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에페1,1).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치유를 포함한 여러가지 활동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고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제자들을 직접 현장 학습시키신 것이다.
본절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일상 생활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신명28,6; 1사무29,6).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을 아는 정도가 아니고,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여 그분과 인격적 고통을 나누었던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거나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했다던가 아니면 교회안에 어떤 직책이나 감투를 쓰고 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과 개인적 묵상(기도)을 통해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일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가리웃 사람 유다를 대신하여 새롭게 사도의 일원이 된 사람의 사명이 명시되고 있다. 즉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난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신실한 선포자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바르사빠스'를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Bar)와 '안식일'이라는 뜻의 '사빠스'(Sabbath)의
합성어로 보면, 이것은 '안식일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가 태어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유스투스'는 '의로운 자'란 뜻을 지닌 라틴식
이름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필요에 따라 히브리식 이름에 그리스식이나 라틴식 이름을
더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마티아'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니세포루스에 의하면, 그는 이디오피아
에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마티아나
요셉은 모두 루카 복음 10장 1절에 나오는 70인의 예수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행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었다.
'기도하였다'로 번역된 '프로슉사메노이'
(prosuksamenoi)동사의 주어가 3인칭 복수란 사실은 그들이 이 한가지 문제를 놓고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도를 충원하는 제비뽑기에 있어 단순히 사람의 뜻을 배제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쉬 키리에 카르디오그노스타 판톤; sy kyrie, kardiognosta panton)
직역하면 '당신은, 주여,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이다.
여기서 2인칭 단수 대명사 '쉬'(sy)와 호격 '퀴리에'(kyrie; 주여), 그리고 '마음을 아시는'에
해당하는 남성 단수 호격 '카르디오그노스타'(kardiognosta)는 모두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중복적 호칭을 사용한 사실을 통하여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에 있어서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물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본문은 하느님께서 요셉과 마티아의 마음 속을 아시므로, 두 사람 중에 어떤 이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도로 더 적합한 사람인가를 아신다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서 시편 139장 13,14절에 나오는 대로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가 어떤 자인 줄을 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주님께서 뽑으신'에 해당하는 '엑셀렉소'(ekselekso)의 원형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12제자들을 택하신 경우를 묘사한 2절의 '그의 택하신'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의 원형과 동일한 '에클레고마이'(eklegomai)이다.
이 단어의 변형들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마르코 복음13장 20절에서는 세말에 구원받을 '택하신'
백성에 대해, 루카복음 6장 13절에서는 산에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을 때에, 루카복음 9장
35절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택을 받은'자인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즉 '에클레고마이'는 구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이다.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할 사도가 될 사람을 뽑으면서도 자신들의 판단에 의지하기보다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존하였음이 이 단어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리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사도행전 저자는 죄를 짓고 죽음을 택한 유다의 운명(제 갈 '곳')과 이제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도로 선출된 자의 '직무'를 동일한 단어인 '톤 토폰'(ton topon)을 사용해 공간적 이미지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비교의 효과를 높였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직무'라는 단어 대신에 '자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한편 후일에는 봉사와 사도의 직무 중에 봉사의 직무는 새로 만들어진 부제들에게 위임되었다
(사도6,3.4).
그래서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사도직을,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아스'(diakonias)라는 용어 자체가 부제직을 가리키게 되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예수님을 은 삽심에 팔아 넘기고 자살했던 유다의 최후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매우 문학적이다.
'제 갈 곳'은 유다의 최후의 운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대상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지옥이다. 둘째, 그가 죽은 장소이다. 셋째, 그가 예수를 버리고 배반한 행위 자체이다.
위의 견해들이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첫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왜냐하면 위의
세 가지 중에 어떤 경우를 택한다고 할지라도, 사탄의 사주를 받아(요한13,27~30) 예수님을
판 자의 최종 도착지는 지옥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비를 뽑게 하니'(에도칸 클레루스 아우토이스; edokan klerus autois;they gave forth their
lots; they cast lots)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였다. 제비뽑기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방법이다(레위16,7~10; 1사무10,20).
23절을 보면, 당시 모인 120명의 사람이 요셉과 마티아를 추천했지만, 이렇게 추천하는 일은
그들의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1절과 22절의 조건에 부합된 사람을 고르는
객관적인 작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천한 두 사람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에 제비뽑기를 통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았으므로, 이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해진 것이다.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을 증거하는 일을 할 사람을 성자 하느님께서
친히 뽑으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뽑다'로 번역된 '에도칸'(edokan)의 원래 의미는 '주었다'(gave)이고, 좀더 문맥에 맞게
번역하자면 '던졌다'(drew)이다.
'그들에게'라는 뜻의 '아우토이스'는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의미들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제비를 던졌다'이다.
본문의 의미가 120명 가량되는 무리가 두 사람을 위하여 제비를 던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스스로 제비를 던지게 하였다는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제비뽑기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표식을 그릇에 집어넣고 세게 흔들어서 튀어나온 것에 적힌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무조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교회가 천거하는 사람들이라면, 제비를 뽑아 어떤 사람이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제비뽑기가 행해지지 않았고,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에도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신약시대의 제비뽑기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 사이의
공백기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임시적으로 사용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의 제비뽑기의 방법을 오늘날의 모든 의사 결정에 항상 사용하여야 하는 절대적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출처: 피앗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