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967년 전(기원후 48년) 아유타국 허왕옥 인도공주가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삼국유사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가야왕국의 정전 |
| | |
김해 가야테마파크의 정원모습. 남방계 아유타국 공주가 사랑을 찾아 금관가야 김수로왕을 찾아왔다 |
| | |
신비하고 이상한 배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마중나가는 김수로왕 |
| | |
배에서 내린 허왕옥이 김수로왕에게 걸어가는 모습 |
| | |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이고 사랑의 춤을 추는 장면 |
| | |
신비의 파사석탑: 파도를 잠재운다는 믿음으로 인도에서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으로부터 1967년 전인 서기 48년
한국의 남단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김해지역에는
북방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김수로왕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수로왕은 큰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방민족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김수로왕은 나이 16세가 되도록 왕국을 튼튼하게 할 배필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왕이 하루 속히 훌륭한 배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김수로왕은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왕국을 세운 뒤 6년(서기 48년)만에
김해 바닷가에는 지금껏 보지 못하던 배가 나타나 사람이 가까이 가면 바다로 멀리 나가고,
사람이 뒤로 물러서면 바닷가로 가까이 접근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신하들은 김수로왕에게 그 사실을 전하자,
왕이 직접 바닷가로 나아가자 그 배는 멀리 바다로 나가지 않고 바닷가로 들어 왔다고 한다.
이상한 그 배에는 머나먼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왕옥과 그의 일행들이 있었고,
김수로왕은 하늘의 뜻이라 믿고 그와 혼인하여 금관가야 왕국을 이룩하였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관가야의 건국이야기이다.
이 기록은
그 이전부터 있던 옛기록을 바탕으로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었으나
그동안 사람들은 그 실현성이 없는 상상의 이야기라 하여,
그냥 신화같은 신비스러운 이야기로만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사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근세 한국의 고고학자로 김병모박사다.
김박사는 고고학자로서 또한 자신이 김해김씨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가무잡잡한 피부색에 대하여 어린시절 특별한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 예전부터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결혼할 수 없다는
어른들의 관습적인 말에도 의문을 크게 품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학시절부터 그 의문을 풀고자 부단히도 노력한 끝에
김수로왕릉의 삼문에 그려진 알수없는 2마리(雙魚) 물고기문양에서 부터 출발하여
그 의문을 풀기시작하였고,
수십년의 추적결과 허왕옥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이제 그가 입증한 김수로왕과 허왕옥의 사랑이야기는
허왕옥 왕비가 들어온지 2000년이 되어가는 오늘에 김해와 부산의 새로운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
올해는 그 2번째 행사로 지난 9월 5일과 6일에 걸쳐 김해와 부산에서 거행되었다.
행사에는 김해와 부산의 각계 인사들과 멀리 인도에서 온 전통무용수들이 이국적인 멋을 선보였고,
김해시립 가야금합주단과 가수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선보였다.
이제 김수로왕과 허왕옥의 만남은 뮤지컬로 재 탄생되어
김해 가야테마파크의 공연장에서 계속적으로 공연이 되고 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파도를 헤치고 사랑을 찾아온 아유타국의 허왕옥 공주를 따스하게 맞이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던 철의 왕국 금관가야는
북방계 한민족과 남방계 인도민족이 새로운 왕국으로 탄생함을 알리는 것이다.
가야는 한국의 동남방에 위치한 작은 왕국으로 여기지만,
가야는 현재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로 볼때,
가장 먼저 철기문화를 꽃피운 나라로 기록되고 있다.
한 학자의 의문과 그의 집념은 신화로만 여겨지던 이야기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과 인도는 국가교류와 민간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친밀해졌다.
2000년 전부터 한국과 인도는 해양으로 연결된 문화교류국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가 그만큼 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가 반도사관에 매몰되어
대륙도 잃고 해양도 잃고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어 열등감에 빠져있는 지금에 와서
다시금 옛날의 기록한줄이라도 우리가 다시금 철저히 검증하고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한민족은 본래 반도에서 생겨난 민족이 아니라 대륙에서 기상을 펼치던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록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록에서는 찾기가 어렵지만,
중국의 많은 기록들에는 많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 한국의 학자들은 이런 무수한 기록들을 다 무시하고 있다.
과연 그들이 믿는 금과옥조는 무엇이기에 무수한 중국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없는 것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해석하는 일은 학자의 본분이다.
잘못된 학문은 바로 잡는 것이 학자의 길이지,
잘못되었지만 선대 학자들이 했으니 바꿀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래가지고야 어떻게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개척할 수 있겠는가?
지금 만주지역에서는 홍산문화가 발굴되기 시작한지 수십년이 되어간다.
그 홍산문명은 이전 중국지역에서 발굴되었던 황하문명보다
수천년 앞선 문명이었다는 것도 다 밝혀진 바 있다.
과연 그 홍산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너무도 초미의 관심사이고,
그 홍산문명의 주인이 바로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것이 많은 유물에서 확인되고 있다.
중국이 왜 동북공정에 그렇게 매달리는지 너무도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인데..
한국의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2000년 전 가야공주가 와서 꽃피운 금관가야를 되돌아보면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의 자성과 분발을 촉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