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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2)
출 19:1-12 / 조재진 목사
약속은 중요합니다. 약속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구성되고, 약속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만약 약속이 없다면 세상의 질서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약속에 의해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사회는 기본적인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약속은 지켜지기도 하고 또 어떤 약속은 깨지기도 합니다. 약속을 하쟎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대할 때 늘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처음부터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그 약속대로 그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이삭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가나안에 머무렀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셨고 주위의 사람들이 이삭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을 때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 사건을 보면 놀랍게도 모두가 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했는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시대의 구원사건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설계한 방주지요. 그리고 그 방주에 들어오는 자는 살리라고 약속했습니다. 방주안에 들어온 노아의 여덟식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방주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애굽에 노예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죄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내가 애굽을 칠때에 그 피가 너희 거하는 집에 있어 너희를 위하는 표적이 되리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과연 그날 애굽 온 땅에는 죽음의 재앙이 임하였지만 이 언약을 믿고 피 바른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볼까요? 광야를 지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불뱀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자는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이 고통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 백성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뱀을 쳐다보는 것이 어떻게 병을 낫게 하냐?고 질문할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했고 그날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았습니다. 물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전 오래전부터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인간이 범죄한 창3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심판을 선언하기 전에 구원의 약속을 먼저 주셨습니다. 인간을 유혹한 뱀, 사단을 저주하는 가운데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3:15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여자의 후손이란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고 뱀은 사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더 놀라운 것은 마태는 마태복음1:23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3:16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구원얻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적이 없습니다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민수기23:19에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또 이사야 선지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5:18에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해와 달과 별들이 없어지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의 약속은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도 내가 죽으면 내가 한 약속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있는 약속이 되는 것은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야 합니다.
언약을 알고 붙잡은 자와 언약 없는 자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한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언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언약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에 생을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언약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언약이 가슴속에 있습니까?
시내산 언약
오늘 본문에 보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드디어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너희들을 내 소유로 삼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이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삼개월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십일 쯤 되었다고 말하고 이 언약의 사건이 오순절의 근거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장소가 시내산입니다. 이 산의 다른 이름은 호렙산입니다. 제가 성지 순례를 가서 보니까 지금은 ‘제벨무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이 맺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백성들은 산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모세가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백성들이 응답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언약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언약의 근거
첫 번째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시내산 언약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는 히브리인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성서학자들은 히브리인이란 종족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고 일종의 사회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살았던 노예나 천민을 지칭하는 말이 “합비루”라는 말인데 이 말이 ‘히브리인’의 어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습니다.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애굽에 노예로 있었던 많은 다른 종족들도 섞여서 함께 도망쳐 나왔다고 봅니다. 광야에서의 불순종과 원망의 사건도 바로 이들 섞여나온 무리들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히브리인들이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번 본문 4절을 보십시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했는지를 짤막하게 설명합니다. “나의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우리는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시내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도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너희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였고 그리고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었다고 성경의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다른 새들은 새끼를 옮길 때 부리로 잡아서 옮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태우고 옮긴다고 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독수리는 새끼를 옮길 때 그냥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옮기면서 떨어뜨리기도 하고, 다시 날개로 받아서 올라 가기도 하고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만히 얌전하게 여기 시내산 까지 옮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동안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애굽같은 기질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업기도 하고, 가끔씩 떨어뜨리기도 하듯이 그렇게 시내산까지 옮겨왔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기도 했고, 물이 없는 사막에서 샘이 솟아나게도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도 내렸고, 르비딤에서 전쟁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디어 언약의 자리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다른 민족보다 큰 민족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신7:7-8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히브리인들, 저 노예와 천민계급이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전적인 사랑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외우다가 저의 가슴을 적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바울은 엡2:8에서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언약의 목적
두 번째로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그들과 언약을 맺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5-6절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에게 고할지니라” 어떤 성서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중의 하나가 이 구절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이란 옛언약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을 내 백성 삼겠다는 옛 언약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세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세 번째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베드로전서2:9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이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중요한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출19:5-6은 벧전2:9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는지 모르겠습니다.
온 세계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내 소유’라는 말은 ‘내 보배’와 같은 의미입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만은 가장 보배롭게 여기겠다는 말입니다. “너는 내 보배야”라는 말입니다.
집에 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보배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귀중한 보배와 같은 것은 가장 안전하게 보관합니다. 불이 나도 이것만은 건져냅니다. 도둑맞으면 안되기 때문에 비밀한 곳에 숨깁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나에게 있어서 보배와 같이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향해 ‘너는 나에게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대상이요, 하나님에게 보배와 같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보배와 같은 존재로 만드십니까? 왜 우리들을 그렇게 보배와 같이 귀하게 여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로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남을 위해 존재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중보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과 문제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해결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해결사, 즉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여러 나라에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과 열국들 사이에 서서 그들의 중보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세상의 중보자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가슴에 안고 중보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존재목적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비뚤어진 삶을 살게된 것은 ‘내 소유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만 좋다고 생각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말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병들게 한 것은 선민사상입니다. 이 잘못된 선민사상, 하나님이 우리만 사랑한다는 이 이기적인 생각이 그들을 병들게 했습니다. 열방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병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외모는 커졌습니다. 대형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 민족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복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제사장입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 자신을 위해 살면 하나님이 내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을 빨리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을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자기의 문제를 해결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의 병이 낫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지역을 위해 존재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되는 길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 이스라엘은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앞에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내 인생이 쓸모가 있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무당들은 거룩하지 않아도 됩니다. 용하게 잘알아 맞추기만 하면 되지요. 절이나 스님은 싸워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본문 9-11절에 보면 몇 번 반복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성결이라는 단어입니다. ‘옷을 빨고’ ‘성결케 하고’ 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거룩하고 성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정결해야만 합니다
피의 언약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이 언약이 어떤 절차를 거쳐 성립되었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24장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식이 거행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 있습니다. 백성들의 대표가 되는 이스라엘 장로 70인과 아론과 나답, 아비후와 함께 모세가 산에 올라갑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만 가까이 오게 하고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그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데 준행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다 준행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드디어 언약식이 거행되는데 모세는 번제와 소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립니다. 짐승을 잡아 피를 단에 뿌리고 나머지 피는 양푼이에 담아 백성들을 향해 뿌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이 산 허리에 앉아 하나님앞에서 식사를 합니다.
이런 순서로 언약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피를 단과 백성들에게 뿌리는 일입니다. 출24: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 피를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때 뿌려진 피가 바로 언약의 피, 그 언약을 성립시켜주는 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원래 언약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리트’입니다. 이것은 영어의 ‘cut"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짜르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계약 당사자들이 짐승을 잡아 반으로 쪼개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사이로 지나가는 의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림으로 언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흘린 피가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 “언약의 피”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자리에게 포도주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들어올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언약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CCC 한국총재이신 김준곤 목사님은 피묻은 복음, 피묻는 십자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피묻은 복음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최상림 간사가 액자 하나를 저에게 선물했는데 그 액자에 새겨진 말이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액자를 보는 순간 피묻은 그리스도이라는 말이 저의 가슴에 그냥 와 닿게 되었습니다. 피묻은 그리스도! 이 말이 점점 저에게는 은혜로 와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입니다. 피 묻은 십자가, 피묻은 그리스도가 가정을 살리고 부산과 민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 대신 피흘려 죽은 짐승이 필요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피의 언약이 이루어졌듯이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짐승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은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대자로 턱도없이 모자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통로삼아 세상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지금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말하는 것, 세상을 중보하는 일, 이제 우리가 해야 할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는 교회
출 19:1-6 / 손상률 목사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세상 나라의 역사는 언제나 그의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게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조 아담이 범죄하므로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얽매이는 것을 보면서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길입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모든 역사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 있고,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속사(救贖史)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이 바로 교회운동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며 원시복음(原始福音)을 선포하였습니다(창 3:15).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신 다음 본격적으로 이루어 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가나안 입국을 주도하게 하면서부터 구체화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들이 지켜야 될 율법을 선포하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곧 그들을 열국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4월 첫 주일은 우리 교회의 설립기념주일입니다. 1946년 4월 3일 첫 예배 모임을 가진 후 어언 57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세기가 넘는 동안 민족의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오늘의 이 모습으로 성장하게 축복 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제사장 나라」로 표현되는 주님 교회의 진정한 면모를 찾아보면서 우리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을 교훈 받고자 합니다.
Ⅰ. 선택받은 무리입니다.
본래 「교회」라는 말은 「부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의 자녀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였다가 때가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엡 1:4-5). 로마서 8:30에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습니다.
창세기 12:1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부르심은 매우 의미 있고 복된 부름입니다.
창세기 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명시하였듯이 하나님의 선택적 부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2절).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들을 중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게 한다는 것입니다(3절). 이렇게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으며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창 12:7, 13:18, 15:20). 이를 족장시대의 교회라고 하는데 사실상 원시 교회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2)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내었습니다.
출애굽기 12:37-38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지도자로 삼아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게 한 출애굽 운동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며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 교회 운동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은 죄악 세상을 상징하며 바로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케 하는 마귀의 화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기 백성을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불러내십니다. 또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출 8:1). 애굽에서는 그들이 비록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였으나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광야 여행 사십 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은 성막 중심의 예배 생활이었습니다(출 40:34-38).
(3) 죄와 죽음 아래서 그리스도인을 불러내었습니다.
에베소서 2:1-2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자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서 1:3-5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 된 백성 등의 표현은 주님 교회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Ⅱ. 신령한 집단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기관이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님께 속한 기관이며 신령한 단체입니다. 베드로전서 2:4-5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집단인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 1:1).
구약의 이사야는 교회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여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하신 작용이 있었음을 밝혀주었습니다. 이사야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입니다.
여기 ‘창조하신 자’, 또는 ‘조성하신 자’라고 한 말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세력이 위해를 가하더라도 거기서 풀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바로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실 때도 하나님의 강한 손이 작용하였습니다(출 3:19).
본문 말씀 4절에도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기간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들이 행하여졌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불러내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에 주권자로서 초자연적인 그의 능력을 발동하십니다.
(2) 성자 예수님의 구속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 죄를 속량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1:7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흘려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습니다(출 12:7). 애굽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초 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밤에, 애굽 전역을 다니는 천사들이 피가 묻은 집은 넘어가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한 유월절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출 12:13). 훗날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8-19).
(3) 성령께서 보증으로 인치셨습니다.
이사야 43:1에는 성부께서 선택하신 자를 성자 예수님께서 피흘려 구속하셨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것으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13-14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 운동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 성령의 작용이 있으므로 그 효과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라야 이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13에는 성령으로 인(印)을 친다고 하였는데 이는 완성된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을 성령께서 확실하게 인정하며 이를 변개 시킬 수 없는 것으로 도장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과 시험에 허덕여야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마다 연약한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께서 보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Ⅲ.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사야 61:6에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의 열방 가운데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의 소임을 맡았습니다.
이는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도 있지만(레 11:44),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종교적 특수한 임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이 하는 역할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제사장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그것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성소를 중심으로 하고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의 제물 드리는 일을 전담합니다. 하나님과 백성사이에서 중보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언제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종교적 소임을 다 하므로서 결과적으로 백성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행사되게 하는 자입니다.
여기 「제사장 나라」로 표현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인 개념으로서 오늘날 그리스도안에 구속받은 성도의 집단인 교회의 의미와 상통합니다. 계시록 1:6에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1)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사 43:21). 세상에서 구별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사람들입니다(롬 12:1). 이는 성도의 예배적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많은 노래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찬송입니다(시 146:1-6).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엡 5:18). 구약의 성도들이 성소에서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며 예배한 것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은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을 모아 예배드리는 공동체입니다(요 4:24).
(2)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로마서 15:16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하면서 이를 가리켜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고 세계 만방에 다니며 전도하여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을 제사장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죄인이 복음을 믿어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적 신앙을 가진 교회가 복음 전도의 본분을 성실히 이행하며 곧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선교하는 공동체로써 그 소임을 다하게 될 때, 세상에서 멸망 받을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소망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되므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제사장 나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왕적 권세를 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가 수행하는 제사장적 직무를 말하면서 이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9).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교회에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사실 교회가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할 때 어떤 의미에서 막강한 하나님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되는 성도들에게 왕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계시록 5:10에 보면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제사장 나라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권세를 행사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제사장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올바로 수행하게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에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만이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게 될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출 19:1-6 / 박덕기 목사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200만-30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백만의 사람들이 함께 살 때에 인간 세상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모든 소송 사건을 재판할 사람은 모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송 사건을 재판하느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지켜 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백성 가운데 재덕이 겸전한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가리켜 ‘광야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세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은 바로 오늘날 교회의 일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 교회의 일꾼은 1)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야 하고, 2)진실 무망한 자라야 하며, 3)불의한 利를 미워하는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우리 교회 축구부가 ‘기독 타임스’사 주최 축구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여 우리 교회의 저력을 널리 떨치게 되었는데, 그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우리 송정 중앙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 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일꾼들로 가득 차서, 이것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실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날로부터 3개월이 되었을 때 시내광야에 이르렀고,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시내 산 언약’이란 것을 체결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응답하기를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고 하는 언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주어지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말씀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3-4절에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상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을 여러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셨습니다. 마침내는 장자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치시고 또 애굽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손에서 완전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되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심 같이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신 32:11절에 보면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키울 때에는 새끼가 안일하게 지내지 못하도록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합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새끼가 새들의 왕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강훈련을 시킵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업고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서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날개를 퍼덕거립니다. 그러나 새끼는 아직 날개에 힘이 없어서 자꾸만 아래로 떨어져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닿기 직전에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와서 다시 등에 업고 높은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땅바닥에 떨어질 때쯤이면 잽싸게 날아와서 구출해냅니다. 이와 같이 거듭되는 강훈련을 통해 새끼는 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나 새들의 왕이 됩니다. 이것이 어미 독수리의 새끼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애굽을 탈출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즉 바로의 마음을 강퍅한 대로 버려둠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죄악의 낙을 즐기며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역사를 이루는 거룩한 사명의 백성들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험한 광야로 끌어내시고 강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얄팍한 사랑이 아니라, 숭고하고 거룩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갖고 계신 크신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5-6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과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과 뜻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내 소유’라는 말은 ‘개인 재산’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 ‘소중하게 간직된 사유 재산’ ‘외부로부터 어떠한 상해도 받지 않도록 보존된 보물’이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이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냄에 있어서 ‘특별한 보물’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여기 ‘내 소유’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 세상 그 어떤 민족, 그 어느 나라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며 소중히 간직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러한 자신의 언약 의지를 밝히면서 3절에 보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을 각기 다른 이름으로 반복해서 부르신 것은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대비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그 이름의 뜻처럼 형을 속인 자요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존귀한 이름을 가진 자가 되었던 것처럼, 애굽인의 노예요 미천한 존재에 불과했던 야곱의 족속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자손 곧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무가치한 자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존귀한 자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제사장 지파가 되었던 레위 족속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 앞에서 특별히 존귀한 자들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레위 지파는 야곱에 의하여 저주를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처럼 존귀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 역시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양치기요,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아들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니,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귀하고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적으로 본다면 그 어떤 자랑거리도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선택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결코 세상적 가치 판단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서 교만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왕처럼 존귀한 자들이지만, 그것은 결코 나의 공로와 의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겸손하되 결코 비굴하지 않은 자로서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2.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출 28:30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2)레 10:11절에 기록된 대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3)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제사장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라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만백성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목자의 나라요, 성경선생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계 만민의 목자의 나라요, 성경선생의 나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실로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영광이요,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바로 왕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절망과 한숨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귀한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복된 사명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인 동시에, 이스라엘이 열방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국 중에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하여 하나님에 대한 온 인류의 신앙의 근거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한 민족이 됨으로써,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제사장적 삶은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한 십자가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써 마감되었습니다. 이제 그 제사장적 사명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제사장적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모든 인류를 화목케 하는 사역 즉 복음 전파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아가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거룩한 백성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세상 모든 백성들과 특별히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거룩이란 도덕적인 순결을 의미하며, 무엇보다도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순결하지 못했고 성결하고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소망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소망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요, 또 이들을 통해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현재는 천박한 노예 백성이지만 장차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목적과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일이 무엇이었습니까? 5절 상반 절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됩니다. 신 28:1-6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어 탁월하고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강대한 나라가 되어 큰 명예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가 복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이 들어가 하나님을 잘 공경한 나라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에 비해 뛰어난 복을 누렸습니다. 19세기에 영국에 복음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영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재국주의의 확산이라는 부정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영국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들고 들어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특징짓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교도 정신의 기반 위에 건설된 미국은 건국된 지 불과 2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참으로 울밑에 선 봉선화처럼 처량한 나라였습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의 약소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온 이후 1세기를 지나면서 유구한 세월 동안 민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졌던 가난을 벗어나, 온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적 축복을 받았고,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5천년 우리 민족사에서 지금처럼 우리가 어깨를 펴고 살던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정녕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나라의 국력과 명성을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출애굽한 지 3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중대한 언약을 맺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고 하면서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벧전 2:9에 보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무엇으로 충족되었기에 이 미래형 약속들이 완료형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있었고, 십자가의 구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까?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수많은 중. 고등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Rise Up Korea’ 대회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이여 일어나라! 한국이어 깨어라! 한국이여 빛을 발하라!는 주제 아래 모인 수많은 청소년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의 밝은 앞날을 기대할 수 있어서 실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우리 민족을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되게 하려고 하는 뜨거운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더욱 열심히 선교하여 온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선교 헌금에 모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여러분 자신들은 하나님의 보물 같은 귀한 성도들이 되어서 영. 육간에 더 큰 축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1-6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우리를 출애굽기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서게 합니다. 그 시점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의 연결점에 위치합니다. 그 두 사건이란,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온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의 백성 됨을 확인 받은 시내산 언약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본문 1-3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과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애굽에서 행하신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셨습니다. 4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부족함 없이 돌보셨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해석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생 마음 속에 기억하고 있던 모세가 그의 말년에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읽은 노래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32:9-14를 읽어보면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출발해서 시내산 기슭까지 이른 것은 그야말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한 것과 다름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땅에 내린 여러 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완강하게 버텼습니까? 그는 애굽의 온 땅에서 자기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모든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놓아주었습니다. 출애굽 후에도 이스라엘이 간 길은 험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는 마음이 바뀐 바로의 군대가 맹렬히 추격해왔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말렉 군대의 습격을 받아 힘든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으로부터 시내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온갖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요약한 것이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때까지 행하신 바를 상기시키시는 것은 그저 상기시키시는 것으로 그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바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원하시는 바가 5절 상반절에 나타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와의 언약을 지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해내시고 그 후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는 그 다음에는 그들 자신이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구원과 그 구원의 은혜를 더 크게 계속하여 누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와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나라가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위해 사용하시는 나라가 되며,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과 6절은 그것을 말합니다: "...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 한 것은 언약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께 특별히 보배로운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며 다른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 한 것은 위의 그런 일들을 감당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어 따로 불러 세우심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백성이 어떠해야 하며 또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를 만방에 알리기 위한 표본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이 언약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벧전2:9-10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해방을 맞았지만 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6.25라는 비극적 전쟁을 겪고 가난과 굶주림과 독재하에서 신음했던 우리이지만 오늘 세계가 놀라고 부러워하는 나라로 성장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은 바로 우리 나라에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은 민족이라면 마땅히 그 은혜에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땅한 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와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해방을 얻고,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원을 받고, 가난과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경제적 성장을 이루며, 월드컵 축구 4강이 되는 것 이상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전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역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백성이 흥왕하고 복 받는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온 세상에 증거할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북쪽 땅의 우리 동족들이 그것을 다 알게 되도록 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세기 새 시대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하나님의 소유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게 하고자 하심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본문 5절의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하신 말씀은 참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6.25를 생각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보다 확고한 국방과 안보의 의지를 다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위태롭고 불안한 자리에 처해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실 소유가 되면 아무 문제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민족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하신 5절의 말씀은 또 이어지는 말씀, 즉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신 말씀과 더불어 우리 나라가 오늘날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사명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이 민족을 크게 들어 쓰려 하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6.25전쟁은 참으로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참화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8.15 해방의 감격과 기쁨을 선물로 주셨던 하나님께서 왜 동시에 상반된 이념을 가진 남북간의 분단을 주셨고, 5년도 안 지나 동족간의 그런 참화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우리는 보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깨달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동족간의 전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온갖 테러를 자행하며 동족을 굶어죽게 만들며 그들 스스로의 이념과도 정반대되는 계급사회, 돈밖에 모르는 사회로 변질되었고 세계의 최빈국으로 전락함으로써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이 망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분단의 고통과 북쪽 땅에서의 공산주의체제의 설립이라는 비극과 6.25전쟁이라는 재앙은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확실히 체험하게 해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 없애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멸절에 이르도록 철저히 박해한 북쪽의 오늘의 형편과 기독교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교회가 부흥한 남쪽의 오늘의 이 놀라운 모습을 비교할 때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교회들이 되며, 이런 교회들이 더 많아지며, 그리하여 이 나라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나라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벧전2:9-10의 말씀이 진정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정말 우리는 한 때 암흑 속에 살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긍휼을 얻지 못한 백성 같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이 땅에 믿는 백성을 무수히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온 천하에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부르셨음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꼭 붙잡고 사는, 이 세상과 구별된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의 말씀으로 들려질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오늘 우리의 응답이요 다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사장 나라 –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는 교회
출 19:1-6 / 손샹률 목사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세상 나라의 역사는 언제나 그의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게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조 아담이 범죄하므로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얽매이는 것을 보면서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길입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모든 역사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 있고,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속사(救贖史)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이 바로 교회운동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며 원시복음(原始福音)을 선포하였습니다(창 3:15).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신 다음 본격적으로 이루어 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가나안 입국을 주도하게 하면서부터 구체화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들이 지켜야 될 율법을 선포하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곧 그들을 열국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4월 첫 주일은 우리 교회의 설립기념주일입니다. 1946년 4월 3일 첫 예배 모임을 가진 후 어언 57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세기가 넘는 동안 민족의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오늘의 이 모습으로 성장하게 축복 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제사장 나라」로 표현되는 주님 교회의 진정한 면모를 찾아보면서 우리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을 교훈 받고자 합니다.
Ⅰ. 선택받은 무리입니다.
본래 「교회」라는 말(ἐκκλησία)은 「부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의 자녀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였다가 때가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엡 1:4-5). 로마서 8:30에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습니다.
창세기 12:1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부르심은 매우 의미 있고 복된 부름입니다.
창세기 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명시하였듯이 하나님의 선택적 부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2절).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들을 중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게 한다는 것입니다(3절). 이렇게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으며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창 12:7, 13:18, 15:20). 이를 족장시대의 교회라고 하는데 사실상 원시 교회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2)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내었습니다.
출애굽기 12:37-38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지도자로 삼아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게 한 출애굽 운동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며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 교회 운동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은 죄악 세상을 상징하며 바로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케 하는 마귀의 화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기 백성을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불러내십니다. 또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출 8:1). 애굽에서는 그들이 비록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였으나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광야 여행 사십 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은 성막 중심의 예배 생활이었습니다(출 40:34-38).
(3) 죄와 죽음 아래서 그리스도인을 불러내었습니다.
에베소서 2:1-2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자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서 1:3-5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 된 백성 등의 표현은 주님 교회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Ⅱ. 신령한 집단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기관이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님께 속한 기관이며 신령한 단체입니다. 베드로전서 2:4-5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집단인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 1:1).
구약의 이사야는 교회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여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하신 작용이 있었음을 밝혀주었습니다. 이사야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입니다.
여기 ‘창조하신 자’, 또는 ‘조성하신 자’라고 한 말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세력이 위해를 가하더라도 거기서 풀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바로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실 때도 하나님의 강한 손이 작용하였습니다(출 3:19).
본문 말씀 4절에도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기간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들이 행하여졌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불러내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에 주권자로서 초자연적인 그의 능력을 발동하십니다.
(2) 성자 예수님의 구속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 죄를 속량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1:7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흘려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습니다(출 12:7). 애굽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초 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밤에, 애굽 전역을 다니는 천사들이 피가 묻은 집은 넘어가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한 유월절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출 12:13). 훗날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8-19).
(3) 성령께서 보증으로 인치셨습니다.
이사야 43:1에는 성부께서 선택하신 자를 성자 예수님께서 피흘려 구속하셨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것으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13-14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 운동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 성령의 작용이 있으므로 그 효과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라야 이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13에는 성령으로 인(印)을 친다고 하였는데 이는 완성된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을 성령께서 확실하게 인정하며 이를 변개 시킬 수 없는 것으로 도장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과 시험에 허덕여야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마다 연약한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께서 보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Ⅲ.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사야 61:6에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의 열방 가운데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의 소임을 맡았습니다.
이는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도 있지만(레 11:44),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종교적 특수한 임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이 하는 역할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제사장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그것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성소를 중심으로 하고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의 제물 드리는 일을 전담합니다. 하나님과 백성사이에서 중보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언제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종교적 소임을 다 하므로서 결과적으로 백성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행사되게 하는 자입니다.
여기 「제사장 나라」로 표현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인 개념으로서 오늘날 그리스도안에 구속받은 성도의 집단인 교회의 의미와 상통합니다. 계시록 1:6에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1)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사 43:21). 세상에서 구별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사람들입니다(롬 12:1). 이는 성도의 예배적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많은 노래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찬송입니다(시 146:1-6).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엡 5:18). 구약의 성도들이 성소에서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며 예배한 것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은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을 모아 예배드리는 공동체입니다(요 4:24).
(2)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로마서 15:16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하면서 이를 가리켜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고 세계 만방에 다니며 전도하여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을 제사장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죄인이 복음을 믿어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적 신앙을 가진 교회가 복음 전도의 본분을 성실히 이행하며 곧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선교하는 공동체로써 그 소임을 다하게 될 때, 세상에서 멸망 받을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소망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되므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제사장 나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왕적 권세를 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가 수행하는 제사장적 직무를 말하면서 이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9).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교회에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사실 교회가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할 때 어떤 의미에서 막강한 하나님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되는 성도들에게 왕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계시록 5:10에 보면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제사장 나라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권세를 행사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제사장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올바로 수행하게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에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만이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게 될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 19:1-6 / 곽선희 목사
불확실한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절대 필요요건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심리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Three Needs' 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첫째가 Need of Significance 입니다. 중요성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문제요, 삶의 뜻의 문제요, 존재의식의 문제요, 보람의 문제요,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보다 확실히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옛날만큼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행복지수는 바닥으로 헤맵니다. 모두가 죽고싶다고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내가 정말 살아야 하나?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또 주위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의미가 있나?' 얘들이 크면서, 조금 크기 시작하면 어거지를 쓰고 울 때가 있지요. 일부러 사고도 내고. 왜요? '이 가정에 내가 얼만한 존재인가?'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걸 알고 싶은 거예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니고 보람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보람이 없으면, 못사는 겁니다.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고 숨을 쉰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올시다. 그러면, 나의 존재의 의미. 그것을 알고 깨닫고 그것을 확대 확장하고 그것을 높일 수 있을 때,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의미가 커지고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럴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또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있는 것이올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왜 비참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가 없는 것 같거든요.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난 귀찮은 존재 같아요. 벌써 정신적으로 그는 갔어요.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여러 사람에게 불편만 끼치고 있다. 자, 이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산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면,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조건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란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 속에 내게 향한 사랑이 있고 나의 삶의 의미가 있고 내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유명한 윤리학적 명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나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웃이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가치가. 거기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는 뜻이올시다.
또 하나는 Need of Security입니다. 안정성의 필요입니다. 불안을 싫어합니다. 위험을 싫어합니다. 위기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평안을 촉구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정신적 안정입니다. 이것을 찾지 못해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오락을 하고, 몸부림을 칩니다. 밤마다 댄스홀에서 발광하는……. 왜들 이러는 겁니까?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어요. 근심과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 자유의식을 찾아서 저렇게 발광을 합니다만은 점점 더 무서운 함정으로 빠질 뿐이고 마음의 평안은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 술을 마신들, 술을 깰 때 가서는 더 비참합니다. 더욱더 비참합니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찾아 마음의 평안을 찾아 안정을 찾아 헤매는 이 모든 노력이 바로 이것과 같은 거예요. 다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참 안정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발견할 때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내 존재를 발견할 때까지는 절대로 Security 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만이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셋째는 Need of Belong입니다. 소속의 필요입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고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독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고독의 엄습되어 헤어날 길이 없어요. 소속을 잃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그래서 가정이다, 친구다, 공동체다, 그룹이다…… 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에 걸리는 겁니다. 소속감을 찾기 위해서. 소속의 확인을 위해서. 그런데 '내가 속한 그곳이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부질없는 짓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되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큰 가정에 한 식구가 되었다고 하는 것, 그것 외에 참된 소속은 없습니다. 애당초 세상에 날 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은혜 가운데 살았고, 그의 은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사역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 소속을, 본질적 소속을 분명히 하는 순간, 삶의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올시다.
본문에 보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완전히 노예화 되어버린 그 백성을, 그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십니다. 그래서 큰 이적으로 구원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에서 훈련을 시킵니다. 교육을 시킵니다. 가나안 족속, 가나안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New Orientation을 시키는 그런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계시하고, 말씀하시고, 교육하시고, 훈련하시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도하십니다. 그에게 뭘 묻는 것이 아니에요. 주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인도하고,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설득을 하고 깨달을 때까지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머리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밖에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고, 많은 사건에 부딪히게 하시고 '언젠가 알 것이다' 그런대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때로는 아이들을 설득을 시켜서 '이것이 좋으냐, 싫으냐? 어떡하면 이것이 좋은 것이다, 저것이 좋은 것이다' 가르쳐 주지만은 그게 통합니까?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따라와." 그리고 저만큼 가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내 나이 되면 알 것이다. 네가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면 내가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거 아닙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창조적으로 훈련하십니다. 이래서 창조적 훈련, 창조적 교육, 창조적 사랑을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신명기 32장 10절로 12절에 보면 모세의 마지막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광야에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주 절실한 함축성 있는 깊은 말씀을 듣게됩니다. 이제 그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그렇게 이 백성을 인도했느니라." 아주 귀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독수리라는 것은 새 중에 왕입니다. 힘세지요 위엄있지요 자유롭지요 그리고 용맹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해할 자가 없습니다. 그가 날개를 쭉 펴고, 푸덕거리는 것도 아니고, 쭉 펴고 기류를 타고 하루종일 이렇게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 정말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이 지구상에 48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둥지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벼랑, 높은 바위산 벼랑에다가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는 그 둥지의 직경이 무려 2.7m나 됩니다. 둥지를 들어보면 무게가 2톤이랍니다. 그런 엄청난 큰 둥지를 만들어놓고 거기서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이제 그가 먹이를 향해서 아주 급강하 할 때는 시속 180km로 달린대요. 여러분 보셨습니까? 전 시골서 자라면서 많이 봤어요. 봄에 병아리를 키우게 되면 마당에 닭들을 많이 키우는데 아 이 독수리가 와가지고 좌우간, 우리가 농담으로 그랬습니다. 저놈들이 십일조 가져간다고 그랬어요. 그저 얼마나 많이 잡아가는지, 빙빙 돌다가 그대로 그냥 내려 꽂아가지고, 딱 부르 쥐고 하늘로 올라가면 도리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요. 그저 먹이로 얼마를 줄 수밖에 없어요. 이게 독수리입니다. 자, 그런데 그는 90Km 반경 넓은 곳을 자기 영역으로 하고 그 안에서 왕같이, 왕노릇 하며 사는 거예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이 독수리, 오늘 본문에는 새끼를 훈련하는 이야기 나옵니다.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유롭게 나는 법. 기류를 타고 하루종일이라도 날 수 있는 그 법을 가르치고, 또 강한 날개를 줍니다. 강한 날개가 거저 생깁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많은 시련 속에 얻어지는 거예요.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단련을 통하여 강한 날개를 줍니다. 또한 독수리로서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독수리로 독수리답게 사는 법, 사냥하는 법, 높은 곳에 집을 짓는 법, 모든 것을 일일이 전수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고요? 오늘 본문에 뚜렷이 나타납니다. 어지럽히며 새끼가 얼만큼 컸을 때 떨어뜨립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떨어뜨리면 이 새끼가 풀렁풀렁풀렁풀렁 날면서 푸덕거리면서 '아이고∼나 죽는다' 그러죠. 독수리는 멀리서 지켜봅니다. 거리를 재고 시간을 재면서 지켜보다가 땅에 딱 닿기 직전에 급강하 해가지고 탁 받아서 날개 위에 올려놓고 다시 올라갑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떨어뜨립니다. 또 이렇게 합니다. 수 없이 반복해서 강한 날개를 만들어 줍니다. 잘 날 수 있는 독수리로 키워 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는 위기일 뿐입니다. 독수리에게는 그 위기를 통하여 훈련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새끼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가혹할 정도로 고통을 가합니다. 그 새끼를 막 밀어서 땅으로 떨어뜨려요. 그때 그 새끼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어미는 날 왜 이렇게 괴롭히나? 날 죽일 작정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손을 안 쓰면 손이 약해집니다. 발을 안 쓰면 발이 약해집니다. 눈을 안 쓰면 눈도 약해집니다. 머리를 안 쓰면 멍청해집니다. 결국은 힘이라는 것은 이렇게 강하게, 고통을 가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에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요새 우리 가정에 아이들을 너무 과잉보호 해가지고 이게 바로 문제예요. 참 어느 때, 내가 책을 보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신혼여행 간 아들이 신부한테 얻어맞고 엄마한테 전화 걸면서 "엄마……" 하고 운답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전부 그대로 보호하고, 대신해주고, 대신해주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모양이 되었거든요. 강하다는 것은 뭡니까? 홀로 서야되는 거고요 사건에 부딪혀야 되는 거고요 도전적으로 부딪히면서 배우는 거 아닙니까? 제가 늘 생각합니다만은 여러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요. 자전거 뒤에서 붙들고 있으면 자전거 배웁니까? 넘어지든 쓰러지든 무릎이 깨지든 간에 손을 놓아야지. 손을 놓고 밀어버려, 그냥. 그래야 자전거를 배우지. "야 너 무릎 깨진다, 목 부러지면 죽는다" 그러면 못배웠지요. 그러면 끝났지……. 안그렇습니까? 세상에 위험이 없는 게 어디있어요? 강하게 힘을 준다는 말은 내버린다는 말이에요. 제발 좀 버려두세요. 제발 좀 간섭하지 마세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요새 아버지 어머니들이 도대체 너무 간섭이 많고, 심지어는 나까지 괴롭혀요 전화 걸어가지고. "목사님,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어떻게……." 내가 간단히 그래요. "전화 끊습니다. 그만두세요" 끝, 이래버리고 말아요. 하도 기가 막혀가지고. 아 왜 그렇게 자꾸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 거예요? 얘들이 뭐, 결혼생활이 어떻고. 저들끼리 좀 싸우라고 그러세요. 원래 1년 동안은 전쟁이거든요. 싸워가면서 정이 드는 거지, 맞아가면서 사는 거고. 뭘 그렇게 야단합니까? 안그래요? 맞으면서 정드는 거고 다 그런 거예요. 뭘 그렇게 야단하고 벌벌 떨고… 안 죽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들 쓸데없는 간섭을 합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데 독수리가 새끼를 가르치는 것처럼 고통을 가합니다. 가혹하게, 그리고 지켜봅니다. 멀리서 지켜봅니다. 시간을 재고, 거리를 재가면서 빙빙 돌면서 지켜보다가, 그런가 하면 절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급강하 해 가지고 날개에 얹어가지고 올라갑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는 시골서 자란 덕에 이걸 많이 보았거든요. 실감이 납니다만은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는 주도적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 새끼가 무엇을 원하는 가를 원치 않아요. 다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의 길이 아니고, 어미의 길로 his way, his initiative, 이것이 그를 주도하는 것이에요. 그의 길로 가르칩니다. 절대 안일하게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평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훈련을 통해서 역경과 부딪히면서 견뎌나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소망을 이룬다. 그런고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확실히 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확실히 지혜가 있습니다. 그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며칠 전에도 이스라엘 대사하고 점심을 같이 하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강하고 참 지혜로운데 어디서 왔느냐?" 그러니까 "Expectation and hope" 소망, 소망이다. 그럼 소망은 어디서 왔느냐? 많은 고통에서, 많은 시련에서, 남보다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강해진다는 거에요. 그도 걱정을 하더만요.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이 멍청해요." 그거 좀 가르치는 방법 없냐고. 우리도 고민이라고 제가 그랬어요. 왜요? 겪은 바가 없거든요. 어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제가 옛날에 혼자 나와서 고학을 하고 지낼 때, 배고플 때가 많았어요. 어쩌다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든가 하게 되면 그 밥을 이렇게 퍼주는데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나요. 여러 그릇 중에 제일 큰 그릇, 조금이라도 밥을 더 넣은 것, 그것이 내게로 왔으면 좋겠는데 그 달라고는 못하고, 기다리다가 그것이 내 차례로 오면 '오늘은 좋은 날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홀로 서고 사건에 부딪혀서 이것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나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지혜요 나로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남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그 지혜를 얻은 것이에요. 여러분, 한국, 우리 인구가 얼마입니까? 이 좁은 땅에……. 우리가 강합니다. 각 나라에 가서도 제법 다 잘 살아요. 어디서 왔느냐고요? 간단합니다. 6·25를 겪었거든요. 6·25를 겪었어요. 그 전쟁이 우리로 하여금 이만큼 강인하고, 이만큼 지혜롭고, 오늘 같은 IMF같은 큰 사건도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체질이 된 것이죠. 하나님은 이민족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잘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제사장은 바로 영적 대표자요 지도자요 치유자요 구속하는 자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든 민족을 대표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그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누에고치를 들여다보니까 누에고치의 구멍이 직경 한 2mm 정도밖에 안되는 구멍이 빠끔 뚫립니다. 구멍이 뚫린다고요. 그래 보면은 거기서 그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서 나오려고 합니다. 몸부림을 칩니다. 흔들흔들 합니다. 그거 애쓰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천신만고를 하는 거예요. 애쓰고,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그래서 카프만 부인이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지'하면서 가위로 잘라서 구멍을 넓혀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렇게 편안하게 나온 나비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더랍니다. 그는 가위로 자르면서 그랬대요. "내가 하나님보다 자비가 더 많다" 그랬대요. 그랬더니 그건 죽었어요.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동안에 비로소 그 영양이 온 날개로 뻗치는 거예요. 온 몸에 근육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강한 마찰과 함께 전체 체력이 강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남는 건데 제가 뭘 안다고 구멍을 넓히고 편하게 나오게 했더니 '그만 내가 나비 하나를 죽여버렸다' 하고 뉘우쳤다는 거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까? 왜 이러해야 되나? 믿으세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내게 향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건마다 이 사건들을 통하여 더 높은 길로, 더 바른 길로 더 강한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르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시련을 우리는 시험으로 받고 때로는 저주처럼 생각하고 괴로워 한 때도 많았습니다만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선하신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께서 베푸신 긍휼과 사랑, 그리고 그 창조적 능력을 깊이 생각하며 믿고 신뢰하고,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해서 주의 약속하신 바 대로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고, 이 어려운 세대에 큰 역사를 감당하는 이 민족 이 나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
출 19:1-6 / 임덕순 목사
완연한 가을입니다. 가을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미게 되는데, 결혼식을 하기 전에 상당한 기간 서로 교제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제기간이 9년 10년 걸린 사람도 있지만 결혼하기 전에 교제하는 사이를 부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 공적으로 서로 혼인서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증인 앞에서 혼인서약을 하고 부부가 된 것을 선언한 뒤에야 정식으로 부부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부부가 되면 서로에게 매이고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관계가 됩니다. 결혼은 인간 사이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계약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런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갑자기 너희는 내 백성이 되라. 나와 언약을 세우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친히 조성하고 불러내고 보호하고 훈련하고 인도하신 사람들에게, 내가 영원히 너를 사랑하고 보호 할 테니 너희는 내 백성이 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단 6일 만에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한 백성을 창조하시는 데는 수 백년의 기간을 들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이 있었고 놀라운 구원이 있었습니다. 사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과정은 눈물겨운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대단한 민족이기에 찾아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 아브라함을 불러 먼저 약속을 주셨고 약속대로 아들을 주셨으며, 그의 자손을 애굽으로 보내어 번성케 하셨고, 번성하기는 했지만 노예나 다름없는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어 갖은 훈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하여 훈련시킨 뒤에, 약속을 주어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노예생활에 익숙할 뿐 아무 규범도 없고 불평밖에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온갖 것을 다 챙겨주시고, 끝없이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능력의 하나님인 것을 충분하게 보여주신 다음에, 그들에게 언약을 주어 당신의 것을 삼으신 것입니다.
어떤 굉장한 부자 청년이 길거리에 거지 처녀를 불쌍하게 보고 그 생활비를 도와주었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착한 일이고, 그 일을 하다가 중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거지처녀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 거지처녀에게 매이는 일이고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법적으로 매이시겠다는 것이고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실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어 스스로 매이셨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파트를 사고판다면 당연히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습니다. 그것도 모라자면 공증을 하기도 합니다. 이 당시에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언약이 있었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서로 언약을 맺을 때는,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갈라 양쪽으로 나눠 놓은 뒤에 두 당사자가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약속을 파기하는 사람은 이 쪼개진 짐승처럼 죽어도 좋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이 깨닫도록 그런 의식을 치르셨습니다.
출19장부터 24장까지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19장에는 먼저 이 약속을 맺는 시간과 장소 및 역사적인 배경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3개월이 되는 때, 시내 광야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4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고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 인도하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세계를 다 소유하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나팔소리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과 달리 살아계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심을 아주 인상 깊게 보여주셨습니다.
8절을 보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과 위엄에 놀라고 음성에 압도되어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흘 동안 옷을 빨아 입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기다리라고 하셨고, 사흘 뒤에 다시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심히 큰 나팔소리 같은 음성으로 모세를 불러올리신 뒤에 산꼭대기에서 모세를 만나 그들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법을 주셨는데, 그 내용이 20장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을 섬기는 규례가 있고, 사회생활을 할 때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사회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단순히 도덕적인 표준이나 권면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생명을 건 계약서입니다. 만약 이들이 이 법을 지킬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철저히 책임지실 것이며, 그들은 세계 만국 중에 제사장 나라로서 역할을 감당하며 축복과 존경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언약을 지키지 않아서 이 계약이 파기될 경우, 그들은 저주받는 위치로 떨어지게 되는 매우 엄중한 계약이었습니다.
24장에 가면 모세가 이 계약서를 다 낭독하고, 백성들은 지키겠다고 서약을 했으며, 모세가 그들의 머리위에 피를 뿌려 이 언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장로들이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식사를 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언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5장부터는 성막을 만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이며, 그때부터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받고 성막을 지은 뒤부터는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성막을 중심에 두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동쪽에 세 지파, 서쪽에 세 지파, 남쪽에 세 지파, 북쪽에 세 지파가 배치되었고, 그 대형을 유지한 채로 여행을 했으며, 그들이 어디에 머물게 되면, 역시 그 대형대로 머물러서 그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백성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이런 엄청난 언약을 맺을 당사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습니다.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율법의 핵심을 친히 돌 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 돌판을 들고 내려와 보니, 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그새 변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섬기며 방탕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사십일도 못되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것을 보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그 돌 판을 내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라가서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그렇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제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빼달라고 생명 걸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모세를 불러올려 율법을 돌 판에 새겨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언약을 세운 다음날이라도 당장 배반하여 스스로 저주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알게 되었고, 예수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받아서 이제는 죽음도 귀신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는데도, 한 주간 사이에도 몇 번씩 하나님의 뜻을 잊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죄를 지으면서 위태위태한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처분 하셨다면 우리는 벌써 하나님의 저주꺼리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성도라 불리고 있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억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열심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부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일 즉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스스로 저주의 자리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지은 죄와, 오늘 또 지은 죄로 인해서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버림받아야 할 나를 위해서 오늘도 중보의 간구를 하고 계시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보시고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기에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보호와 사랑 안에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을 직접 맺지 않으시고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가지고 내려와서 낭독하자 백성은 모세 앞에 맹세했으며, 모세가 짐승의 피를 그들에게 뿌려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중보자는 모세입니다. 갈3:19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맺은 언약의 중보자는 인생인 모세였습니다. 그가 사십일 동안 하나님 앞에서 지내면서 직접 율법을 받았다할지라도 그는 인생일 뿐이었고 그가 뿌린 피는 죽은 짐승의 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체결하신 복음이라는 언약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피를 믿는 자는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언약을 하나님이 세우셨는데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이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시대 우리나 똑같이 형편없는 죄인이요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은 똑같은데, 그들을 구원하고 선한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중보자를 세워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끈질긴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들과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같이 못나고 죄악 덩어리인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백성을 삼으셨습니까?
5-6절에 그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 세상의 땅과 하늘과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온 세상 나라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옛날 큰 나라의 황제는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땅은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다른 군왕들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모든 나라들은 여러 군왕들에게 위임하여 그들로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만은 특별히 구별하셔서 당신이 직접 통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끌려고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에 빠져서 온갖 절망과 고난가운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해서 못 보시는 분입니다. 그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용서하시고, 본래 주셨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냥 오라고 하면 부패한 인생이 돌아옵니까?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셨는데, 당신의 백성을 하나 만들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 만들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너무나 바르고 풍성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세계만민이 그것을 보고 부러워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을 택하여 계명을 주셨는데 그게 이스라엘이었고, 그 역할을 일컬어 제사장 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복을 받는 경험을 이미 했습니다. 광야에서도 최고급 양식을 날마다 먹었고,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도 매일 생수를 마셨습니다. 길이 없는 홍해가 길이 되어 그들은 건넜습니다. 태양이 사람을 태워죽일 것 같은 사막에서 구름기둥의 보호아래서 사십년을 여행했지만 열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기한 축복입니다. 그 놀라운 일들 때문에 벌써 세상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시내 산에서 받은 계명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돌만 가득하고 메마르기 짝이 없는 가나안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곡식을 심으면 쭉정이도 없이 모두 영글고, 양을 치면 얼마나 건강하게 자라고 불어나는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면서, 도대체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복을 받느냐고 물어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만 대답하면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어.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내가 네 손이 하는 모든 것에 복을 준다면서 명령을 주셨고,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했더니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은 거야.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셔.” 라고 말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이 부러워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신 제사장나라의 역할입니다.
그런 목적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대우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 사명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을 받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사용하려고 언약을 주어 당신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복음이라는 언약을 주어 우리 이웃들을 구원할 제사장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거나 공로를 세웠거나 자격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배은망덕하고 은혜도 감당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복음을 믿게 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이유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말을 듣지 않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여행을 가도 일본 사람들은 깃발 든 가이드의 뒤만 졸랑졸랑 따라다니며 구경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다 제멋대로 흩어져 버려서 인솔하려면 애를 먹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믿는 사람이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고 바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남들이 실패한 자리에서도 성공하고, 남들이 죽은 병인데도 치료받고 살아나야 합니다. 형편없이 살았고 망나니 같았던 사람이 예수님 믿고 훌륭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사람들이 보기에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니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사람들이 궁금증을 갖게 하고, 그 기회에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십니다.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무명인사도 유명 인사를 만드시고, 병든 사람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만하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씀대로 바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은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에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성하고 사랑하고 인도하신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사람에게 밟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말로도 전도해야 하지만, 우리의 복 받은 삶을 보여주어서 그 매력으로 세상을 복 받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이 목적으로 너희를 구원했으니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실천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내세울 것이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이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홍해를 가를 힘이나 재주가 있었습니까? 그들에게 만나 제조법이 있었습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인도를 따라갔더니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그들은 이방 모든 나라의 관심거리와 부러움이 되었습니다. 요 15장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과 희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안에 머물러 사십시오. 말씀 안에 사십시오. 순종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벗어나면, 자기 생각대로 살려고 하면, 도리어 세상에 혐오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세상의 지탄이요 버림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서 세상 사람들의 축복이요 세상의 매력거리인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성취인 구원
출애굽기 19:3-6, 로마서 4:20-22 / 이성희 목사
서 론
‘빈발효과’(Frequency Effec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빈발하게 발생되는 정보는 앞의 정보를 지운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불신감을 주었다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빈번하게 제공하여 안 좋았던 앞의 정보를 지워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의든 아니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파서 약속을 못 지킬 때도 있고, 교통체증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을 수도 있고, 긴급 상황이 발생하여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약속을 안 하고 살 수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약속이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약속들을 굉장히 많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한국유리’ 창업자이신 최태섭장로님의 어록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약속을 할 때는 신중하지만 일단 한 약속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지키려고 한다. 왜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가, 그것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의 말에도 장로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창세기 17:5에는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은 잊혀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오랜 후, 430년 만에 출애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으시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성취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에 가능합니다. 신실하신 본성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조건적이지만 그 약속을 받는 것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믿는 자에게만 성취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민수기 23:19에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라고 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하나님은 식언(食言)하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을 씹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를 모세가 보러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타지 않은 것을 본 모세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신 후 그에게 주셨던 예언이 비로소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 모세가 출애굽한 후에 백성들과 함께 시내산에 도착한 즉시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계시를 받기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디도서 1:2에는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생을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영원 전부터 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기로 하신 약속은 영원 전에 이미 하신 약속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개인이나 우리나라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습니다.
첫째,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출애급기 19:6 상반절에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아직 나라도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요셉이 애급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가 BC 1898년이라고 추정합니다. 총리가 되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애급으로 이주할 때가 BC 1876년입니다. 출애급할 때가 BC 1446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말살할 정책을 세웠습니다. 그 후에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지 60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흔히 말하는 ‘재언약’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겠고,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이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왕 같은 제사장직”,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위하여 선택된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열국 사이에 중재하는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그들이 열방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600년 만에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또 다른 600년 후에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 이 세 가지 직분을 맡을 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에 왕으로 오셔서 왕권을 가지셨고, 사죄의 기능을 가지셨고, 제사의 기능을 가지셨고, 축복의 기능을 가지셨습니다.
창세기 12:2에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합니다. 12:3에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제사장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로 하여금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신약성경시대의 소아시아는 제사장의 나라였습니다. 그 후에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유럽, 특히 영국이 제사장의 나라였습니다. 근대까지는 미국이 제사장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복음으로 살 때 제사장의 나라가 됩니다. 이런 나라가 세계를 이끌고, 세계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8에는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시는 것입니다. 즉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하시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인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25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꼬박 백년이 걸렸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 600년 만에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빛의 속도로 오지 않고 빙하처럼 느리고 완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다고 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지난 연말에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기독교는 국내 최대 종교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기독교인의 수는 967만6천명이었습니다. 2005년 인구조사 이후 10년만에 123만 명이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전체 국민의 19.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최대 종교라고 하던 불교는 761만9천 명, 천주교는 389만 명, 원불교는 84만 명, 유교는 76만 명, 천도교는 66만 명, 대종교는 3만 명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한국교회에는 자랑스러운 자료이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정부나 사회가 기독교에 대하여 신중할 것이고 함부로 기독교를 폄훼하는 말을 하거나 기독교에 불이익을 주는 법을 입안하기 힘들 것입니다. 동시에 한국교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도 이전보다 더 무거워졌다고 봅니다.
교회는 백성들의 죄를 사하게 하는 사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축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나라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전에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사죄의 기능을 교회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모세에 와서 이루어졌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은 지금 우리에게 와서도 성취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출애급기 19:6 하반절에는 “너희가 내게 대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약속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구별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별한 백성인 성민(聖民)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것은 다른 열방 민족들과는 구별되는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택함을 받은 백성이므로 택해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이 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은 세상 사람과 삶의 모습, 가치관,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삶의 기준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의 기초가 되어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9:5에서는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소유’란 히브리어 ‘세굴라’라는 단어인데 아주 귀중한 소유물, 매우 값진 소유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면, 약속을 소중히 여기면 귀중하게 여기는 보물 같은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루터의 개혁에 중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 구절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의 성경적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엄청난 선택의 은혜을 입고 있습니다. 완전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결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거룩한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거룩한 삶의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성화(聖化)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출애급은 잠깐이었지만 광야생활은 40년이 걸렸습니다. 가장 긴 시간이 거룩하게 다듬어지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없으면 요단강도 건너지 못하고, 가나안의 기업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인식이 확실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비난도 하고, 기독교를 폄훼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소유라는 자존감이 확실해야 합니다.
이사야 43:4에는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합니다. 이 성경구절에서 만든 복음성가 가사에도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내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 찬양을 할 때마다 힘이 납니다.
거룩함이란 마음이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깨끗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26에서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십니다. 안이 깨끗하고 눈이 깨끗하면 세상을 깨끗하게 보고, 깨끗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내가 먼저 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신실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동료직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불평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 세금을 정직하게 내야 합니다. 삶을 최선을 다하여 살고 즐겨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보다 행동을 봅니다. 입을 보지 않고 삶을 지켜봅니다.
존 웨슬리는 “사회의 거룩함 외에 거룩함이란 없다. 기독교를 개인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곧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라고 하는 말에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강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나라입니다. 혼자 거룩을 외치지 말고 나라가, 공동체가 거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거룩한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아모스 5:24에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과 같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제사장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주기도문은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의 기도문입니다.
“잠자는 중에 저절로 거룩해지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의 훈련을 요구합니다. 이런 경건의 훈련이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의화(義化)와 영화(榮化)는 순간적이지만 성화(聖化) 즉 성결해지는 노력은 가장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마지막 훈련은 성결입니다. 거룩함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 35:8에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라고 합니다.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리는 말씀에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길을 걷는 자는 깨끗한 자라고 합니다. 거룩하여 깨끗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거룩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가 구별된 백성,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세계 주위를 둘러봐도 기독교가 전래되어 우리나라만큼 번성하고 성장한 나라가 없습니다. 주일마다 교회가 가득 차고, 새벽에도 교인들의 기도소리가 들리고, 평일에도 성도들의 모임이 있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한국교회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모습을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결 론
의미 있는 묵상으로 인도하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인도하셨나를 생각하며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 자비하심, 선하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묵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신명기 7:9에는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약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2017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제사장나라가 되고,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힘쓰고 꼭 그 약속이 성취되는 은혜의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출 19:4 / 김우영 목사
스위스의 어느날 밤, 알프스 산을 오르려고 하는 등산객들이 한 산장호텔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등반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번 등산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날씨가 좋아지면 오릅시다.” “저 정도의 산은 문제 없어요. 나는 내일 아침 혼자서라도 올라가려고 합니다.” “안됩니다. 혼자서는 위험해요 안내자가 있어야 합니다.” “안내자는 필요없소. 저 산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깨어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등산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 이미 산으로 가고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일기가 나쁘니 되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다렸으나 하루가 지나도록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해서 수색대가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수색대가 산 중턱에 이르러 실력있는 산악인들이 자기 이름표를 매달아 두는 말뚝을 보니 “안내자가 없이도”라는 글이 걸려 있었습니다. 수색대는 그가 그 곳까지 왔었음을 확인하고 좀더 올라가자 낭떠러지에 한 남자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내자 없이도 등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당도했으며, 하나님께선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의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강력한 능력과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건져 내셨음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바를 지시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임을 고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능력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우리에게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역사하시므로 감출 수가 없으며, 예나 지금이나 절대적이고, 포괄적이며, 동일합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고통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신속하게, 강력하게, 안전하게 구원하셨음이 내포 되어있는 말씀입니다.
첫째 : 신속하게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간구함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음에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신속하게 임한다”라고 하면 “그렇치 않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사40:3)”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임하신다 함은 내가 고통중에서 부르짖으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즉각 이루어 주신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건져 주어야 할 적기라고 생각되시는 때, 곧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도와 주셔야 할 가장 알맞은 시간이 되시면, 주저하지 않으시고 놀랄 만큼 빠르게 역사 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후에’가 아닌, ‘지금’이십니다. 나의 기도가 내게서 이루어짐이 나로서는 ‘지금’이 아닌, ‘후에’인것 같으나 하나님께로서는 ‘지금’이십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시103:5)” 다윗이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을 노래함입니다.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5절)”, 이에서의 ‘소유’란 갖고 있는 단순한 재물을 말함이 아니라 주인이 특별히 관리하는 귀중품, 외부로부터 어떠한 상해도 받지 않도록 보관되어 있는 “보물”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보았느니라(4절)”, ‘보았느니라’의 히브리어‘라아’는 시각을 통하여 보는 정도가 아닌, 실지 체험을 통하여 인지한 앎을 말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내’가 되면 ‘나’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보배’가 되고, 보배된 ‘내’가 되면 하나님께선 ‘나’를 위해 신속히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물을 잃기전에, 상실하기전에 옮겨 놓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날개는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환란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어느때나 펼쳐있고, 업히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 : 강력하게
어미 독수리의 날개에 업힌 새끼는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까닭은 어미의 날개는 강력한 힘을 지닌 보호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은 노아의 방주, 40주40야 비가 쏟아져 내렸고, 그 물이 땅 위에 150일 동안 창일 했음에도 어느 한 곳 허술함 없이 안전했습니다. 지금 내가 고통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잠잠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내’가 약한 인간임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도록 살아야만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무엇’을 주시려고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를 구원하심에 있어 시시한 임시 미봉책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따를 수 없는 강력하고 완벽한 방법을 쓰십니다. 어떤 어머니가 다섯 살 된 딸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진리를 심어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헌데 딸은 무서움으로 인하여 울기만 했습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내가 거짓말한 것, 친구와 싸운 것 나의 나쁜 마음을 다 보고 계셔”라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달래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는 두손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던 아이가 기쁜 얼굴로 엄마한테 뛰어 오며 말했습니다. “엄마,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보고계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대. 내가 잘못한 것 다 용서해 주셨대”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전에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이 내 삶을 급습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강력하게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힘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셋째 : 안전하게
‘안전’이란 온전한 것, 탈이 없는것, 위험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인생은 광야와 같고, 인간에게는 안전이 없습니다. 어느순간에 어떠한 일이 내게 닥칠지 모릅니다. 질병 건물의 붕괴, 화재, 비행기, 기차, 자동차, 배, 가스사고... 혹서로 죽고 혹한으로 죽고... 우리모두는 안전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허나 인간의 힘으로는 내 생각대로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사실상, 이땅의 삶에 ‘안전’이란 말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안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선 ‘안전’의 복을 주시지 아니하면 그 무엇에서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안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만이 확실합니다. 공사현장에서 ‘안전’표시가 된 헬멧을 씀은 위험으로부터 안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안전’표시는 안전을 바라는 것이요, 불완전함을 드러냄입니다. 인생은 어디로간들, 어디에 있든,무엇을 하든 안전하지 못하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과 능력만이 온전한 안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날음에 있어 땅의 장애물은 무용지물입니다. 까닭은 장애물 위로 높이 높이 날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방어선이요, 하나님의 능력은 무너뜨릴 수 없는 방어벽이다” 매튜 헨리(M.Henry)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신속함이 필요할 때는 신속하게, 강력함이 요구될 때는 강력하게, 안전을 요할 때는 안전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업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불가능도 없고, 실수도 오류도 없으며, 제한도 없습니다. 이 땅의 생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은총을 입지 못함은 내 믿음에 문제가 있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나래에 업히기만 하면 소경도, 걷지 못하는 자도, 무식한 사람도, 가난한 자도, 병든 사람도 안전히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대답하고, 주실 때 받고, 명하실 때 순종하고, 업혀라 할 때 업히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영광돌리며 살아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업힘은 인생의 정로요 가장 확실하고 빠르고, 쉬운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피성이십니다.
어떤 곳에 희귀한 것만 갖고, 먹고 싶어하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임금님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요리를 먹은 후 감탄에 감격을 하고, 요리사를 불렀습니다. “아주 맛있는 요리를 했다. 일등 요리로다. 무엇이 갖고 싶으냐?” “임금님, 음식 맛이 좋은 것은 제 기술만이 아닙니다. 좋은 야채를 판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었겠나이까? 상급은 채소장수에게 주소서” “그래? 그럼 채소장수를 불러 오너라” 불려온 채소장수가 임금님의 말을 듣고 깜짝놀라 말했습니다. “임금님, 그것은 아니될 말씀이시옵니다. 저는 그저 야채만 팔았을 뿐입니다.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농사를 지은 농부이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농부를 데려 오도록 하라” 농부가 불려 왔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임금께 나아간 농부는 임금님의 이야기를 듣고 펄쩍뛰며 말했습니다. “임금님, 황송하오나 아니옵니다. 저는 그저 씨만 뿌리고 가꾸었을 뿐입죠, 제가 밭을 갈고 씨를 뿌려도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안계시면 저는 싹도 틔울 수 없습지요, 훌륭한 야채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요. 감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받으셔얍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