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옥계 큰댁에 제사 보러 가면, 서걱이는 대밭의 바람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다.
지금 큰댁은 사라지고 대밭도 없어졌다.
큰아버지가 장대로 홍시를 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온 친척이 모여 죽통밥을 같이 먹고 즐거워 하던 시절도 있었다.
대밭에는 푸른 댓잎들이 대나무에 꼭 붙어살고,
마른 댓잎들은 바닥에 저희끼리 사각사각 두런거리며 살고,
아침이면 꽁지 짧은 참새 떼가 울음소리 왁자하게 흩뿌리며 살고,
대낮에는 심심할 때마다 한량처럼 구성진 노래 부르며 산비둘기가 살고,
새들이 일하러 떠난 고요한 대밭에는 새똥들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모여 살고,
저녁에는 하루 종일 들쥐 한 마리 잡아먹지 못한 족제비가 그 긴 꼬리로 등허리를 툭툭 치며 기어들어와 살고,
족제비 발소리를 들은 뱀이 더 축축하고 그늘진 곳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대밭에는 모기가 마을에서 집단 이주해와 대규모로 부락을 형성해 살고,
돈 떼이고 집 잃고 처자식 잃은 바람이 옷 한 벌도 없이 살고,
헛기침만 하다가 날을 새우는 푸른 달빛이 사글세도 내지 않고 들어와 살고,
여름내 꺼내 먹어도 잇속까지 서늘한 김칫독이 땅을 파고 살고,
대나무 빈 마디 속으로 도망가 방을 얻고 싶은 청춘의 애타는 마음들이 살고,
첫 키스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살고,
사금파리와 유리조각과 삭은 고무신이 살고,
굴뚝에서 피어올라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다가 갈 데 없는 연기가 몰래 스며들어와 살고,
전쟁 통에 다급하게 몸을 숨기던 쫓고 쫓기던 발소리들이 살고,
숨죽인 침묵이 눈치 보며 살고,
북쪽으로 더 이상 북진할 수 없는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 살고,
백년에 한 번 피어 봉황의 먹이가 된다는 대꽃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꽃을 피우려고 기를 쓰고 대나무 속에 웅크리고 산다.
대밭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