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는 일은 두렵다, 고 적고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정환의 '근대의 책 읽기'를 폈더니 역시나 같은 표현이 있다. 이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사두었던 책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적는다. '서점에서 수많은 책들 사이에 서 있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이다. 서점에 가지 않은 얼마 동안 책들이 쏟아져나와 있다. 그 책들을 들추고 있노라면 내 게으름과 무식함이 발가벗는 것 같다.'
정말이지, 서점에 가는 일은 두렵다. 주말에 교보문고에 놀러가 시간을 보내자는 식의 제안은 내게 고역에 가깝다. 내게는 차라리 서늘한 도서관의 공기가 더 편하다. 도서관의 책들은 낡았으며 신간도 한 템포 늦게 등장한다. 등장 후에도 요란하게 자신의 싱싱함을 뽐내는 일이 드물다. 분류법에 맞게 낡은 책 사이에 자리를 잡을 뿐이다. 휘황찬란한 판촉이나 엉터리 기획에 질릴 일도 없다.
박주영의 장편 '백수생활백서'를 선뜻 집어들지 못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인용구가 많은 책은 반가우면서도 괴롭다. 특히 그 작가가 젊다면, 그의 독서편력 앞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은 더욱 커진다. 그래도 요즘 속속 등장하는 '자발적 백수' 소설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이왕 독서목록과 맞닥뜨린 김에 등장하는 책(혹은 단편)의 제목들을 모두 옮겨 적어보기로 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자학적인 방법인 셈이다. 워낙 등장하는 작품이 많아서 본격적으로 작가명과 제목 및 인용구가 등장한 것만 옮겼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연인><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북중국의 연인>,
파트리크 모디아노<서커스가 지나간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잃어버린 거리>,
존란 체스터<아주 특별한 요리이야기>, 앨빈 토플러<제3의 물결>,
마르쿠스 베르너<아버지의 연인>, 알베르 카뮈<이방인>,
와타야 리사<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쓰지 히토나리<사랑을 주세요>,
파스칼 키냐르<떠도는 그림자>, 카롤린 봉그랑<밑줄 긋는 남자>,
구효서<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마갈리 가르시아 라미스<일주일은 칠일>,
강석경<숲속의 방>, 보르헤스<기억의 천재 푸네스>
폴 오스터<달의 궁전><브루클린 풍자극>,
김대우<정사>, 에르노<단순한 열정>, 아멜리 노통브<적의 화장법>,
Thomas Arthur Spragens Jr., 르 클레지오<황금 물고기>,
레몽 장<오페라 택시>, 다카하시 겐이치로<우아하고 감성적인 일본야구>,
르 나르<박물지>,
일디콘 폰 퀴르티<여자, 전화>, 김영하<포스트 잇>,
움베르트 에코<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하루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렉싱턴의 유령>, 쉼보르스카<여인의 초상>, 에쿠니 가오리<울 준비는 되어있다>
<낙하하는 저녁>, 루이스 세풀베다<감상적 킬러의 고백>, 이선 호크<웬즈데이>,
리처드 브라우티건<미국의 송어낚시>, 와타야 리사<인스톨>,
리처드 브라우티건<워터멜론 슈가에서>, 레몽 장<책 읽어주는 여자><카페 여주인>,
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 배수아<나는 네가 지겨워>,
한스 에리히 노삭<늦어도 11월에는>,
더글러스 커플런드<신을 찾아가는 아이들>, 시모<릴라는 말한다>,
가네시로 가즈키<레벌루션 No3>, 주느비에브 브리작<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소동파<마음속의 대나무>, 타일러 코웬<상업문화 예찬>,
알베르토 모라비아<우리는 투스카니의 별장에서 이십일을 보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완전한 은둔자>, 브라이언 로그우드<양을 세며 잠드는 책>,
아고타 크리스토프<50년간의 고독>, 김훈<현의 노래>,
가타야마 교이치<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밀란 쿤데라<이별>,
요시모토 바나나<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J.D. 샐린저<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들어라>,
브레히트<살아남은 자의 슬픔>, 잉게보르크 바흐만<죽음의 방식>,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 코니팔멘<자명한 이치>
주인공의 독서목록을 옮겨 적으며 책을 읽으니 괜히 마음이 편했다. 작가의 독서편력을 차근차근 훔쳐내는 기분이 들면서 한편으로 미지의 책들에 대한 '두려움'도 덜었다. 비뚤어져도 한참 비뚤어진 독서법이란 생각이 들려던 차에, 책을 팔기 위해 재미있게 지은 제목이겠지만 주인공 서연의 자발적 백수로서의 '백서'가 뭘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소설 속 서연만의 별다른 노하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연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참거나 기다려야' 할 필요가 적은 백수다. 일이 바빠 얼굴보기도 힘든 아버지의 식당은 번창하고 있으며 그 외 가족이 없기 때문에 집은 고스란히 서연만의 공간이 된다. 아버지는 '빌어먹는' 서연을 한심해하지만 백수생활을 벗어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서연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생활비와 책값 정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서연의 생활은 평화롭다. 비굴함이 섞인 백수 생존 노하우에 대한 기대는 접는 게 좋다. 아둥바둥하지 않아도 되는 서연은 자신의 꿈이 생산자로서의 꿈이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꿈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이를 테면 직업 같은 것은 자신 인격의 어떤 부분도 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에 목숨을 거는 일은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소비자로서의 꿈을 가진 서연으로서 틀린 생각은 아니다.
서연에게 얻을 수 있는 삶의 백서가 있다면 '소설을 읽을 것' 정도다. 서연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기 좋아하는데, 정말 현명해지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세술에 관한 책은 결론을 가르쳐 주지만 소설은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생각하는 법을 몸에 배게 해준다. 스스로 생각하여 얻은 결론만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분명하진 않다.
얼마 전 내가 대학로에서 어떤 남자에게 봉변아닌 봉변을 당했을 때, 한 친구는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소설에서 얻은 교훈과 현실감각의 상관관계는 '다이렉트'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서연 역시 착오를 겪는다. 한 남자를 기다리던 서연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가 책 속의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내가 예상한 이야기는 80퍼센트는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세상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일에 난 늘 서툴고 자주 실패하고 만다.' 친구 채린의 신파 같은 연애를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현실감각 부족을 실토한다. '내가 세상의 반밖에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은 더욱 잘 알게 되어 그 무엇도 신기하거나 새롭지 않고, 다른 한쪽은 막막할 정도로 낯설고 기이하다.' 그러나 독서광으로서 현재 자기존재에 만족하는 서연은 뒤이어 이렇게 변명한다. '내가 가진 평화를 깨부술 만큼의 용기를 부릴 일이 나에게는 없다.'
따라서 서연의 책 읽기는 삶을 통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체가 목적이며 삶 그 자체이다. 서연은 소설을 읽음으로써 현명해질 수 있다며 자신의 독서를 옹호하지만 현실의 현명한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서연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유희와 끊임없이 연애에 집착하는 채린을 바라보며 내리는 결론에 분명히 드러난다. '채린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인생을 살 듯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을 할 뿐이다. 유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을 위해 소설을 쓰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시만을 위해 인생을 살 듯 자기 자신을 위해 소설을 쓸 뿐이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을 뿐이다.' 태어난 후 한 번도 땅에 내려앉지 않고 바람 속을 날아다닌다는 영화 '아비정전'의 '발 없는 새'처럼, 서연은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책을 읽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첫댓글 요즘엔 책도 않읽혀요.책을 손에 들어도 글자하나하나 읽는게 엄청난 정신노동이죠..다음페이지를 넘길때마다 그 전페이지를 않읽은게 생각이나서.다시 그 전페이지로 넘기고.또 다음페이지.또 그전페이지..ㅎ이러다가 이런말을 들었어요.어차피 책한권을 다 이해할순 없다고..그중에 몇가지 내가 마음에 와닿는 부분만 ..한책을 다 이해한다는건.그 작가의 정신세게를 다 이해한다는건데..그러긴 힘들죠...그래도 책이 있어서 위로가 되긴해요..가장 좋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