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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라인댄스
마선숙
법당에서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춤을 추며 일직선으로 낙하했다. 라인댄스하듯 규칙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목덜미가 선뜩하다. 춥다. 목도리를 귀밑까지 올리고 경내를 내려갔다.
라인댄스 못 한 지 오래되었다.
“차라리 서예를 배워라. 몸도 뻣뻣한 애가 무슨 춤이야?.”
어머니는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배우고 싶어요”
나도 춤에 대해서만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남자랑 춤추는 건 위험해.”
“말만 춤이지 운동이에요. 여럿이 함께하지만 혼자 하는 운동이에요”
“춤추다 바람 난 사람 많이 봤다.”
“춤도 명상이에요.”
“남들이 비웃는다. 네가 무슨 춤 철학자라구.”
어머니와의 동거는 힘들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라인댄스 수강생 모집한다는 광고를 우연히 보았다. 주민센터에서 아파트 입구에 플래카드를 걸었다. 실비였다. 운동에 소양이 없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조건 등록했다.
예전에 <셀 위 댄스> 영화를 보았다. 사회적 압박과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루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이 춤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간다는 스토리였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아무 탈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속은 그게 아니었다. 춤을 통해 자신을 해방하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플래카드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나 보았다.
처음엔 몸치인 내가 따라가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래도 파트너 없이 추는 춤이라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은 없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혼자면서 함께 공존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몸이 강사의 리드에 따라 움직여지는 체험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만 걷는지 알고 살았는데 뒤로도 걷고 옆으로도 걷는 게 신기했다. 음악에 따라 내 몸 댄스 세포가 반응하는 게 신기했다.
댄스 플로어에서 더듬더듬 기초 스텝만 흉내 내도 교육이 끝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씻고 나면 몸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찌꺼기들이 빠져나간 듯 개운했다. 불면에 시달리던 나날임에도 춤추고 온 날은 잠이 잘 와 주어 고마웠다.
수강생 연령이 다양했다.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골고루였다. 직장 퇴직하고 노년을 즐겁게 살겠다고 나온 어르신들을 보고 고령화 시대임이 실감 났다.
춤이 명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억압과 예속과 결핍도 춤을 추다 보면 다 날아갔다.
이혼한 뒤 사람 만나는 걸 고의로 피했다. 버림받은 것 같았다. 세상과 교류하고 싶어 망사로 된 댄스복을 사고 라인댄스 운동화도 장만하였다. 초급반을 이수하고 난 후 찰랑거리는 댄스 옷을 입고 경쾌한 음악에 몸을 흔들며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나하고 같이 산책이나 하자. ”
어머니는 댄스 옷과 운동화를 감추기까지 했다.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엔 나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유증으로 몸에 약간의 마비를 겪은 뒤 이상해졌다. 예전 어머니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변했다.
당뇨와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있었지만, 관리를 잘해 안심했다. 가끔 뒷골이 깨질 듯 아프다고는 했지만 그게 뇌졸중 전조증상인 건 몰랐다. 내가 함께 있었기에 재빨리 119에 전화해서 손 쓸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뒤 건강염려증에 시달렸다. 한두 달에 한 번 가던 병원을 일주일이 멀다고 들락이며 혈압과 당뇨와 고지혈증 검사를 받았다. 그때마다 운전하며 모시고 다니다 보니 자연히 라인댄스 학원과 멀어졌다.
돌계단을 내려갔다. 요사채 앞 댓돌에 스님 털신이 없다. 모두 출타 중이신가 보다. 주지 스님을 뵈러 왔지만, 안 계신 게 다행이다. 어머니와의 갈등을 누군가와 의논한다는 게 갑자기 부질없게 느껴졌다.
뒤 뜰에 매 놓은 누렁이가 짖었다. 못 보던 개다. 승복 입은 사내아이가 공양간에서 나오다 개가 짖는 것을 보고 손을 입으로 가져가 쉿, 하니 개가 꼬리를 내리며 짖기를 멈추었다.
“공양하고 가세요.”
예닐곱쯤의 동자승 얼굴이 해맑다.
“주지 스님은 늦게 오시나요?”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에요.”
나이에 비해 말본새가 여물다. 옷소매로 콧물을 닦으며 씨익 웃음을 던졌다. 주머니서 손수건을 꺼내 주었더니 고개를 흔들며 위로 달음질쳐 올라갔다.
뱃속에서 죽어간 나의 아기가 떠올랐다. 저릿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올라왔다. 난임으로 고생하다 오 년 만에 들어선 아기가 유산되었다. 그와 갈라섰어도 내 몸속에 들어온 생명이기에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흘러가는 게 인생인가보다.
절 표지석을 뒤로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보이는 것들이 다 하얗다. 홀연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속세가 아닌 비현실적인 어떤 공간에 잠시 들른 것 같다. 잎을 떨군 겨울나무들 위로 눈들이 가지런히 앉아있다.
단독주택 동네를 지나니 저만치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국도변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눈발이 좀 잦아진 것 같다.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는데 버스가 왔다. 차에 올라 뒷좌석에 앉았다. 이모와의 약속 시각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의자에 느슨히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노곤하다. 어제 전자시계가 새벽 세 시를 알릴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버스는 번화가로 진입했다. 멀리 보이는 산은 희끗희끗했지만, 도로는 눈이 녹아 질퍽했다.
이모가 일러준 카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어 창가에 앉아있는 이모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이모 얼굴이 환하다. 육십 대 중반임에도 곱고 화사하다. 한 눈에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소주 대리점 하는 이모부와 여전히 사이가 좋은가보다.
“네 엄마가 무슨 말 안 하던?”
“무슨 말요?”
“내가 중매했어. 네가 없다길래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어.”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해 듣지 못했다. 아침에 이모가 전화해서 만나자고 할 때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너도 혼자 된 지 이 년이야. 혼자 살 거 아니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시작해야지.”
이모 음성이 은근해졌다.”
“기재부 고위 공무원이야. 애 하나 딸린 게 흠이지만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자리야. 살림이 넉넉해”
“……”
“근데 네 엄마 이상하다. 처음엔 속 끓이더니 이젠 네가 재혼할까 봐 전전긍긍하더라. 저번에 쓰러지더니 변했어. 얼마 전에도 착실한 남자 있다고 소개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해. 아직 한창나이인 널 곁에 붙잡아 둘 생각인가 봐.”
“……”
“네 엄마가 그러더라. 넌 절대 재혼 안 할 거라고. 자기와 사는 걸 더 좋아한다면서. 내 언니지만 맘에 안 든다. 초등학교 선생 퇴임해서 연금 나오니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면서 큰소리만 쳐.”
이모는 언성을 높였다.
“너도 늙어가는데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네 의사 오빠가 잘나가도 널 책임지지 못해.”
“기대 안 해요.”
“세상이 달라졌어. 내 잇속 내가 차려야 해. 백 세 시대엔 부모 자식이 같이 늙어.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이모. 차 식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끌어당겼다. 다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모도 찻잔을 두 손으로 뱅글뱅글 돌리더니 후루룩 소리 내 커피를 마셨다.
“놓치기 아까운 자리니 잘 생각해 봐라.”
“알았어요. 근데 점심은 드셨어요?”
“아점으로 먹었다. 넌?”
“절에서 먹었어요.”
내가 몸을 일으키니 이모도 따라 일어났다. 혼자 되고 싶었다. 이모에게서 놓여나고 싶어 안 먹은 점심도 먹었다고 했다. 어머니 얘길 이모에게서 듣는 게 불편했다.
밖으로 나갔다. 이모와 헤어져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떼 놓았다. 거리의 소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면서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그날을 어떻게 잊을까? 그가 만취해서 길에 쓰러졌다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두 번째였다. 처음에 그를 경찰서에서 데려왔을 때 다신 이런 추태 부리지 않겠다고 빌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제약회사 영업부장이란 자리가 그래. 접대성 술자리가 많아. 업무상 술을 마시다 보면 술이 술을 불러. 정말 면목 없어. 다신 안 그럴게.”
이번엔 나도 충격이 컸다. 임신 중이었다. 오 년 동안 난임으로 고생하다 들어선 아기였다. 입덧이 심해 밥 냄새를 못 맡았다. 먹기만 하면 토악질을 해서 기진맥진해 있었다.
친정으로 몸을 피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결심했다. 그가 친정으로 데리러 오면 단단히 혼을 내주고 집으로 갈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주일이 되도록 코빼기도 안 비추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사 무난했다. 술이 과했지만 모나진 않았다. 주정도 안 했고 폭력을 쓰거나 물건을 부수지도 않았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스스로 기억하진 못했지만, 날짜를 알려주면 꽃이나 케이크를 사 왔다. 유난스레 잘해 준 건 없었지만 못 하지도 않았다.
불임을 내 탓인 양 몰아세우지도 않았고 맞벌이 안 한다고 눈치 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술버릇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떡하든지 고쳐주고 싶었다.
일주일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 전화가 왔다.
“친정에 자빠져 뭐 하는 게냐? 돈 벌러 다니는 서방 밥도 안 해 주고 친정에서 뭐 하는 거야?”
시어머니는 다짜고짜 소릴 질렀다.
“남자가 일하다 보면 술을 마실 수도 있지? 해장국은 못 끓여줄망정 뭐 하는 행실이냐?”
시어머니는 상스러운 말투로 폭언을 퍼부었다.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 뱉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보더니 어머니가 전화기를 뺏었다.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입덧이 심해 밥도 못 먹는 애를 두고 이런 막말을 하다니!”
어머니도 시비조로 뾰족하게 맞대응했다.
“임신 유세 좀 고만 떨어요. 대한민국 여자 다 애 낳고 살아. 이제야 여자구실 하면서 무슨 유세를 그리 떨어? 내가 그동안 말 안 했지만 내 아들 등골 빼먹고 살았어. 애 없으면서 맞벌이도 안 하고 혼자만 잘 먹고 잘살았어. 내 아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말이면 다 말인지 아네. 우리 딸이 무슨 호강을 했다고 이러지?”
“보나 마나 서방 출근하면 동네 여자들이랑 카페나 놀러 다녔겠지. 맛있는 거나 처먹으러 다니고. 오늘 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 가문에서 지워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요.”
“그 집안에 안 보낼 테니 나중에 후회 마요, 상종 못 할 못된 놈의 집구석엘 왜 들어가?”
두 어머니의 욕지거릴 듣고 있자니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피돌기가 빨라지며 숨이 거칠어졌다. 서 있을 기운도 없어서 방으로 가 누워버렸다.
갑자기 하복부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징조에 덜컥 겁이 나 간신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달려갔다. 팬티에 피가 묻어 있었다. 역시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
일은 나쁜 쪽으로만 진행되었다. 산부인과에서 아기가 유산되었다기에 그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남의 일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고 있기만 했다. 화도 안 내고 위로도 안 하고 침묵했다. 내가 오 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산 사람이 그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간과했다. 그가 효자인 건 알고 있었다. 일찍 혼자 된 시어머니가 남대문서 양말 장사하며 그를 키웠다. 무녀독남이었다. 시어머니 말 거스른 적 없는 효자였지만 맹목적인지는 몰랐다. 시어머니는 성정이 괄괄했다. 키도 크고 몸도 비대하고 목청도 컸다. 결코, 따스한 분은 아니었지만, 아들만은 싸고돌았다. 그래도 그가 아내인 나보다 어머니에게 기울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시어머니가 그에게 무어라 했을지 짐작이 갔다. 일을 확대해 날 나쁘게만 몰아간 것 같았다. 맞벌이는 안 했지만, 시어머니에게 떳떳하다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을까?
그가 결혼 무렵 고백했다. 사람을 좋아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어울리다 보니 모아 둔 돈이 없다고. 그래서 결혼 날짜 잡아놓고 시어머니가 전세 아파트 보러 다닐 때 내가 이억을 내놓았다. 다른 자잘한 혼수품 안 하고 집 사는 데 보태겠다고.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친척이 중매를 섰을 때 어머니는 전문직 아니라고 시큰둥해했다. 하지만 내가 삼십 넘어가니 은근히 초조했든지 막판에 그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돈은 내놓지 말고 비상금으로 지니라 했지만 내가 직장생활 하며 모든 돈이기에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는 반색했다. 며느리 잘 얻었다고 동네방네 칭찬하고 다녔다. 그런데 집 사는 데 보탠 약효는 오 년 만에 사라지고 이렇게 당할 줄 몰랐다.
두 어머니가 나서서 이혼을 진행했다. 합의 이혼 법정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끝까지 무심하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모니터에 띄운 아기 사진을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자상한 데가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기가 유산되지 않았으면 화해했을까? 앞으로 오는 차는 피해도 뒤로 오는 운명은 못 피한다더니 이게 운명이구나 싶어졌다.
“아기야? 언제 발길질할 거야? 뱃속에서 잘 지내거라. 사랑하는 우리 아기야.”
만취해 들어왔어도 배 속의 아기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태교 잘해. 예쁘게 낳아 건강하게 기르자. 당신 덕분에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이 생겼어“
배에 귀를 대고 한 손으로는 내 목덜미를 쓰다듬기도 했다.
입덧할 땐 먹고 싶은 게 있다면 틀림없이 사다 주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아직도 왜 이렇게 일이 꼬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도 시어머니처럼 내가 맞벌이 안 해서 서운했을까? 겉으론 내색 안 했지만, 속으론 혼자 돈 벌기가 억울하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했을까?
은행에 십 년 다녔다. 그 시절은 괴로웠다. 돈 만지는 직업이 싫었다. 그래서 혼인하기 전 맞벌이 안 하겠다고 양해를 받았고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애를 두엇 낳아 키우면 시어머니도 트집 잡을 수가 없을 텐데 애가 없어서 서방 등골 빼먹는 뻔뻔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
농담처럼 남남이 된 후 짐을 친정으로 가져왔다. 변두리 스물다섯 평짜리 아파트는 팔아서 반씩 나누어 가졌다.
“그깟 놈은 잊어라. 살아봤자 뻔해. 제 엄마 치마폭에서 살다 죽을 놈이야.”
어머니는 처음엔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얼빠진 얼굴로 종일 앉아있으면 뜨거운 차를 갖다주며 위로하기도 했다.
“우리 둘이 보란 듯이 잘살아 보자. 연금 나오는데 무슨 걱정이야? 서로 의지하고 오붓하게 살자. 세상천지에 널 위할 사람은 이 에미 밖에 없어.”
어머니는 연금이란 단어를 유난히 강조했다.
“너는 내 핏줄이야. 금쪽같은 내 자식이다.”
처음엔 별 마찰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내가 밥하고 빨래하면 어머니는 청소하며 일도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변질되었다. 한번 쓰러진 후로는 칠십오 세가 팔십 대 중반 상노인처럼 행세했다. 일은 안 도와주고 혈압계와 당뇨 검사기만 끼고 살았다. 청소도 분리수거도 모른 척했다. 반찬 타령은 더 심해졌다.
“고기는 살코기만 사라. 푸성귀를 더 먹어야 해. 돼지감자 좀 사 와라. 양배추도 더 사고.”
“알았어요.”
“당뇨엔 무 생채가 좋아. 설탕 넣지 말고 해라. 식초도 조금만 넣고.”
어머니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오늘은 반찬에 나쁜 게 들어갔나 보다. 왜 혈당이 높게 나오지? 조미료 많이 넣었냐?”
“조미료 안 넣었어요.”
“거짓말 마라. 괜히 왜 혈당이 높게 나오겠니?”
“산책을 더 해요.”
“하여튼 이번 달은 적자다. 돈 아껴 써라.”
“……”
“기름에 튀긴 음식은 상에 올리지 마라. 달걀부침 할 때도 식용유 쓰지 말고 그냥 해. 생선도 그렇고. 나물 반찬 많이 해 먹자.”
어머니는 한 번 먹은 국이나 찌개는 거들떠보지 않아 자연히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밤에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면 몸이 노곤했다.
어느 날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밤늦게까지 베란다 의자에 앉아있었다.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이 야속했다. 근데 갑자기 불이 탁 꺼졌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난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곤 불을 꺼버렸다.
“전기세가 장난 아니다. 들어가 자라.“
어머니는 야단치듯 말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모멸감이 들었다. 아무리 부모와 자식 간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는 이러지 않았다. 내가 늦게까지 베란다에 앉아있으면 스웨터나 담요를 갖다주었다. 생전 반찬 투정이라곤 해 본 적 없는 그가 새삼 그리웠다.
어느 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손이 저절로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회했지만 내친김에 그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내 목소릴 듣더니 멈칫하는 게 전화선을 타고 느껴졌다.
“잘 지내?”
한참 만에 그가 침묵을 깼다.
“당신은요?”
“난 잘 지내다 못 지내다 그래.”
“왜 잘 지내지 않고요?”
“저번 당신 생일에 전화했었어.”
“……?”
“당신 핸드폰이 꺼져 있길래 집으로 했어. 당신 어머니가 받더군. 당신 바꿔 달랬더니 나갔다고 하면서 전화 끊으래. 다신 전화하지 말라면서.”
“……”
“무참했어.”
“……”
“미안해. 잘 살아. 밥 잘 먹고.”
“당신도 잘 지내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더 말을 나누다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매달릴 것 같아서였다.
자칫 눈물이라도 보일 것 같아 두려웠다.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다정다감하게 들렸다. 이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이 떠밀리듯 이혼 열차에 올랐다. 그도 그럴까? 그의 마음을 낱낱이 확인하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탐색하고 싶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인가? 기차 떠난 뒤 손 흔들기다.
근데 어머닌 생일날 집에 있었는데 왜 바꾸어 주지도 않고 전화 왔단 얘기도 안 해 주었을까?
“내 생일 날 그 사람 전화 왔어요?”
“그래.”
“왜 안 바꿔줬어요?” “남남인데 뭔 전화질이야? 지깟눔이 뭘 어찌해 보겠다고?”
“그래도 나한테 말을 했어야죠.”
“뭔 말을 해? 넌 나랑 같이 살면 돼. 그놈은 잊어.”
어머니는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단칼에 나의 말을 튕겨버렸다.
“그놈이랑 살이 섞였어? 피가 섞였어? 다시 전화하면 망신 줄 거다.”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든 쏘아주고 싶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 뿐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오빠 전화가 왔다. 오빠는 의사고 올케는 약사였다. 종합병원 의사로 근무했던 오빠가 강남에 병원 짓는다고 돈 좀 융통해 달란 전화였다.
“내가 무슨 돈이 있어요?” “어머니한테 들었다. 이억씩 나누어 가졌다고.”
“……”
“그 돈만 있으면 병원이 올라간다. 여기저기 끌어모았는데 딱 이억이 모자라.”
평소엔 살갑지 않던 올케도 거들었다.
“아가씨. 형제라곤 아가씨뿐이에요. 핏줄 좋다는 게 뭐겠어요? 나쁜 일도 아니고 병원 올리는 거니 좀 도와줘요. ”
“그 돈 썩히면 뭐 하냐? 보람 있게 써야지. 네 오빠 실력이면 새 병원에 환자가 구름같이 모일 거다. 금방 받을 수 있을 거야. 돈이 모자라 병원 개업 못 하면 큰일이다. 은행에 넣어두느니 도와주자.”
어머니까지 강력하게 설득에 나섰다.
“그거 주면 난 빈털터리예요.”
나는 상을 찌푸렸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 내가 더 잘 알아. 네 오빨 안 믿으면 누굴 믿냐? 너도 알다시피 네 오빠가 좀 착실하냐?”
“……”
“형제끼리 돕고 살아야지. 누가 있다고? 당장 급하게 쓸 데도 없는데. 지금은 내 연금으로 먹고살고 나중에 이 집 너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어머니와 오빠 내외에게 볶이다 돈을 내주었다. 눈독 들이고 있어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자 한 푼 받지 못했다. 병원이 자리 잡히지 못했다면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오죽하면 못 주겠니? 아직 소문이 안 났나 보다. 앞으로 환자가 구름같이 몰려올 거야. 남도 도와주는데 하나밖에 없는 오빠 아니니?”
어머니는 돈 얘기 꺼내면 화제를 돌렸다.
“딱딱 시간 맞춰 식사하자. 제시간에 밥을 먹어야 약을 먹지. 외출만 했다 하면 늦게 들어오니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어. ”
혈압과 당뇨 수치가 높게 나오면 나의 외출을 더 간섭했다.
“쓸데없이 싸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기다리다 눈 빠진다.”
수중에 돈이 없으니 허전했다. 오빠에게 돈을 내준 건 실수였다. 경솔했다. 어쩌자고 한 푼 안 남기고 돈을 주었는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랄 때 어머니는 오빠를 편애했다. 내가 전문대학 나와 사 년제 대학 편입한다고 했을 땐 취직이나 하라고 반대했지만, 의대 다니는 오빠 뒷바라지는 착실히 해 주었다.
오빠는 혜택을 많이 받았다. 빚까지 내 호텔에서 결혼시켜 주었고 비싼 승용차도 뽑아 주었지만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시집갔다. 당신 자신한테도 웬만해선 돈을 안 쓰는 사람이 오빠를 위해선 아까운지 모르고 허리띠를 풀었다.
어머니에게 서운한 게 쌓이면서 내가 녹내장 앓게 된 것도 말하지 않았다.
“젊은 애가 벌써 무슨 녹내장이냐?”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당신 시중드는 일에 방해되는 말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와 법적으로 남이 된 후 가끔 눈이 충혈되었다. 일시적이려니 하다가 시력이 감소한 것 같아 안과에 갔더니 녹내장이라 했다. 내 또래 곱슬머리 의사는 여러 가지 전문적 검사를 하더니 영상 사진을 보여주었다.
“녹내장입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재차 반문했다.
“시야 손실이 진행되고 있어요.”
“……”
한참 만에 말을 던졌다.
“심한가요?”
“초기입니다. 바깥 부위서부터 조금씩 진행되고 있네요.”
“양쪽 다 그런가요?”
“네.”
“고칠 수 있나요?”
“약물을 넣어 시력 손실을 억제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눈 검사를 받으셔야 해요. 안압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운전은 해도 되나요?” “금방 어떻게 되진 않아요. 약물요법과 레이저 요법도 있으니, 주기적으로 병원에 내원해 정밀검사를 받으시는 게 중요합니다.”
의사가 가리키는 그래프를 보며 숨을 훅 들이쉬었다. 어머니 모시고 고혈압과 당뇨약 타러 병원에 가야 해서 잠재의식 속에 걱정이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어느새 세뇌되어 어머니 노후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자신이 싫어졌다.
이모와 헤어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걷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랐다. 눈에 넣는 녹내장약이 떨어져 아파트 건물 일 층에 있는 안과 문을 열었다. 안으로 닫혀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다. 다시 걸음을 떼놓았다. 발바닥이 허공을 딛는 것 같다. 발이 헛놓여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걸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어머니가 죽치고 있는 집으로 가는 게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엄마라는 말은 무턱대고 좋은 단어인지 알았다. 오빠를 편애했어도 엄마기에 오빠와 연관된 일 아니면 내 편이 되어줄지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그 단어가 족쇄처럼 내 발목을 묶을지 몰랐다.
“열 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딨나? 나한텐 너나 네 오래비나 똑같애.”
어머니가 이런 소릴 하면 과장인지 알면서도 단박에 부정하진 않았다. 많은 어머니가 아들을 편애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난 너밖에 없다. 너도 날 믿어야 해.”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 들으면 적의가 끓어올랐다. 백 세 시대 노후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아버지 돌아가신 뒤 혼자 된 어머니에게 잘하고 싶었건만 이질감만 깊어져 고통스러웠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는데 어머니의 말이 꽂혀왔다.
“왜 이렇게 늦니? 약 먹어야 하는데. 빨리 저녁해라.”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있다.
“이모 만났어요.”
“너한테 전화했던? 쓸데없이 주책이다. 재혼 안 한다 했는데 무슨 전화질이야?”
“재혼할 수도 있어요.”
어깃장 놓듯 오금을 박았다.
“한번 살아봤으면 됐어. 그놈이 그놈이다.”
어머니가 말을 얼버무렸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또 중풍 걸린다. 자칫 얼굴 돌아가고 반신불수 될라. 그럼 네가 더 고생해.”
“……”
“내일은 어디 바람이라도 쏘이고 오자.”
대꾸하기 싫어 웃옷만 벗고 앞치마를 두른 후 저녁상을 차렸다. 밥과 국을 퍼 놓은 후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몸을 침대에 눕혔다. 천정의 무늬가 달려들었다.
하루하루 몸이 나빠지고 있었다. 소화도 안 되고 허리와 무릎도 무거웠다. 사십이 아니라 환갑 넘은 여인 같았다. 운동하면 좀 살 맛이 날 것 같았다. 춤을 통해 어딘가에 닿고 싶었다. 사람들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고 싶었다.
큰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간의 돈이라도 받아서 기분 전환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네 돈은 당분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갑자기 왜 그러냐? 어머니 연금으로 생활비 쓰면서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큰오빠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꿔주지 않은 돈을 달래기라도 하듯 오히려 나를 무안하게 했다. 비애감에 사로잡혔다. 이게 가족일까? 이런 착취가 형제간인가? 어머니는 왜 그런 소릴 했을까? 내 수중에 돈이 없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 계산했을까?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진통제를 한 알 삼키었다. 가족이 타인만도 못했다. 어머닐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마음으론 헤어졌다. 더 망설인다고 좋아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낼 방법이 없다. 어머니 입 안의 혀가 되어서 하라는 대로 길들여 살 수는 도저히 없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서랍을 열었다. 옷 속에 넣어 둔 패물 상자 뚜껑을 열었다. 혼수로 받은 것들은 시어머니가 다 회수해 갔다. 그래도 처녀 때부터 모아 놓은 금붙이들이 있었다. 목걸이와 열쇠와 반지 등이 수십 돈은 되어 보였다. 이걸 현금으로 바꾸면 얼마간의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은 힘들어도 수도권으로 나가 월세방 하나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자릴 알아보면 먹고 살 수 있으리. 아직 사십이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요양보호사나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딸 수도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 가서 험한 일 해도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괴로움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을 것 같다. 더 외롭고 고독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공동운명체 되어 어머니 등에 업혀 가선 안 된다.
다음날 일찍 보석상으로 가서 금을 현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지하철이 닿는 수도권을 기웃거리며 월세방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곳에 작은 원룸을 얻을 수 있었다. 네 평 될까 말까 한 작은 방이었지만 밝았다. 햇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 학생들 자취방 같았지만, 박하사탕처럼 환해서 맘에 들었다. 햇빛을 첨 만난 사람처럼 눈이 부시었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원룸을 나서면 바로 강둑이었다. 강을 따라 자전거 길이 쭈욱 뻗어 있다. 강 가까이 내려갔다. 메마른 풀밭 사이로 길이 나타났다. 찬 바람이 상쾌했다. 살얼음이 얕게 깔린 강물이 녹고 있었다. 물빛이 순했다.
어머니는 내게 흉터로 남았다. 흉터를 통해 나란 존재를 보았다. 흉터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다. 그동안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 게 새삼 부끄러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또 눈발이 날리고 있다. 고운 눈이 곧게 내려와 땅에 닿고 있다. 손바닥으로 눈송이를 받아보았다. 마음이 저절로 상쾌해졌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새해다. 새해엔 산뜻하게 나를 끌어 올리리.
눈을 맞으며 걸었다. 청량하다. 조금씩 빨리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강물이 뒤로 밀렸다. 풍경이 휙 휙 지나쳤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서 있다 달려보았다. 더 큰 세계에 닿고 싶다는 염원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몸으로 추는 춤이 아니라 마음으로 추는 춤일지라도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열망이 그득히 차올랐다.
“춤을 출 것이다. 나의 춤을.”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은 듯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