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연가
내가 교직에 들어선 초기였다. 대학 동기생 가운데 한 친구 첫 부임지가 내 고향 벽촌이었다. 나는 초중고를 고향에서 다녔기에 시골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 그런데 친구는 성장기를 도시에서 보낸지라 시골 생활에 익숙하질 않아 고생을 좀 했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면 비포장 길을 덜커덩거리며 한 시간 넘게 들어간 산골이었다. 불편하나마 학교 근처서 하숙은 까까스로 가능했다.
친구는 문화 혜택이라곤 누릴 수 없는 산골 생활 적응이 어려워 무척 힘들어했다. 하숙집 밥맛이 입에 맞을 리 없었다. 그래서 주말을 기다려 읍내로 나가 목욕도 하고 경양식집에 들려 돈가스도 먹고는 막차로 산골로 들어갔다고 했다. 어떨 땐 주중에 학예행사로 아이들을 인솔해 읍내로 나가기도 했단다. 그럴 때면 병영에 갇혀 지내던 군인이 나가는 휴가만큼 마음이 설레더란다.
어느새 삼십 년이 훌쭉 더 지난 아득한 옛적이다. 나는 밀양에서 근무했고 친구는 몇 해 후 울산으로 옮겨갔다. 당시 친구가 울산으로 떠나면서 첫 부임지에 대한 소회를 나눈 얘기 가운데 지금도 생생한 장면이 하나 있다. 산골 아이들이 얼마나 순수한지 단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친구는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보얀 먼지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더란다.
친구는 버스가 비포장도로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면 아이들은 당연히 먼지를 피해 멀리감치 달아날 줄 알았단다. 그런데 피하지도 않고, 손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고 생면부지 사람들이 타고 가는 버스를 향해 반가움의 표시로 손을 흔들어주었으니 얼마나 감동 받았겠는가. 우리 집은 읍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어릴 적 등하교하던 모습이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가을이면 비포장도로 갓길에 코스모스가 피니 장관이더란다. 친구가 근무했던 학교는 종점이라 산골로 들어가는 도중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고사리 손이지만 초등학생들은 일과 중 틈을 내어 자기네 학교 근처 찻길에 꽃길도 조성했다. 초여름이면 호미로 코스모스 모종을 비포장도로 갓길에 옮겨 심었다. 여름 내내 잎줄기를 키운 코스모스는 가을이면 꽃을 피워 바람에 한들거렸다.
가을날 하굣길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아이들이 제 키보다 높이 자란 코스모스 덤불에서 들락날락하며 손을 흔들어주더란다. 화사하게 핀 코스모스가 더 흔들거렸을 테고, 그 사이 해맑은 아이들과 겹쳐진 모습은 얘기로만 들어도 나는 눈앞에 선했다. 읍내에서 멀수록 아이들이 더 반겨주더란다. 이제는 보려 해도 다시 볼 수 없는 시골 아이들과 가을이 빚어낸 동화 같은 장면이렷다.
요즘 농촌 고령화 문제는 과히 국가적 재앙에 가깝다. 어디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끊어진지 오래다. 웬만한 면 지역에선 서너 개씩 되던 초등학교가 이제 한 개조차 유지가 어려워졌다. 학생 수는 예전에 비해 엄청 줄어들었다. 비포장도로는 어디나 아스팔트로 포장으로 바뀌었다. 운치 있던 코스모스 꽃길도 사라졌다. 코스모스를 심을 아이도 없고 그 꽃을 보아줄 사람도 없어졌다.
바야흐로 가을은 문턱을 지나 한복판으로 가는 즈음이다. 텃밭 부추가 꽃대가 올아 하얀 꽃을 피우면 초가을이다. 자투리 공원 코스모스가 알록달록 피어 하늘거리면 가을은 절정에 이른다. 임도 길섶 산국이 노랗게 피면 늦가을이다. 요즘은 지방자치단체서 꽃을 가꾸어 외지인을 불러 모은다. 하동 북천이 그렇고, 밀양 반월이 그렇다. 사상 삼락 생태공원에서도 코스모스가 손짓한다.
이즈음 내가 근무하는 학교 교정 꽃을 하나 소개하련다. 늦게까지 핀 봉숭아는 이제 끝물이다. 일주일 전 쓰레기 분리수거장 부근에는 선홍색 꽃무릇이 피었다. 이제 뒤뜰 산언덕 아래 자연석 경계에 코스모스가 꽃을 피우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꽃이 피어 그 자리 씨앗을 떨구어 이듬해 봄 절로 싹이 돋아 여름까지 잎줄기를 키웠다. 꽃길이 아닐지라도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17.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