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방서예[2006]王維(왕유)7절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送元二使安西
(안서로 가는 원이를 보내다) 라는 이별시
渭城曲 (위성곡)
----王維(왕유)----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땅의 아침비 살짝 내려 가벼운 흙먼지를 적시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
여관집 버드나무 푸르름을 더하는구나
勸君更進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권하노니 그대여 한잔 술을 더 들게나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양관땅 벗어나면 아는 사람도 없으리니.
註.
元二( 원이) : 元은 성(姓), 二는 같은 성의 동족 중에서 같은 항렬(行列)의
형제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연령(年齡) 순으로 一, 二, 三을 붙인 것이다.
安西( 안서) :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고거현(庫車縣)으로 당나라때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국경을 지켰다.
渭城( 위성) :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한대(漢代)에는 渭城이라 일컬었는데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의 북쪽에 있어 서역(西域)으로 여행하는 사람을 여기서 전별(餞別)했다.
浥(읍) : 적시다, 축축해지다.
輕塵(경진) : 가볍게 날리는 흙 먼지나 티끌.
客舍(객사) : 손님이 머무는 여관(旅館).
柳色新(류색신) : 버들잎이 비에 젖어 더욱 싱싱해진 것.
예로부터 중국에는 멀리 가는 사람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전송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위성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
陽關(양관) : 감숙성(甘肅省) 돈황현(燉煌縣) 서남방에 있는 관소(關所)로 서역으로 가는
또 하나의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의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위성에서 양관까지는 약 1,400㎞이고, 양관에서 안서까지는 약 500㎞로 사막이 펼쳐져 있다.
故人(고인) :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 우인(友人).여기에서는 친구의 뜻.
*勸君更進一杯酒에서 "進"이 *勸君更盡一杯酒처럼 "盡"으로 되어 있기도 함
중국의 수없이 많은 송별시 중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詩)는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즉 원이(친구)를 안서 땅에 보내며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唐)나라 때부터 석별의 노래로 널리 애창 되었는데,
첫 구절의 ‘위성(渭城)’이란 단어를 따서 ‘위성곡(渭城曲)’,
또는 마지막 구절의 ‘양관(陽關)’이란 단어를 따서 ‘양관곡(陽關曲)’으로도 불리며,
또한 세인(世人)들이 예로부터 이 시(詩)를 노래할 때면 그냥 한번 부르기엔 너무 아쉬운 나머지,
‘양관(陽關)’이 들어가는 마지막 구절을 세 번씩 불렀다 해서 ‘양관삼첩(陽關三疊)’으로도 불린다.
시인은 친구와 석별하기 위해 위성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나니
살포시 내린 아침 비에 흙 먼지가 촉촉히 젖고 여관 주변의 길게 뻗어 있는
버드나무의 잎사귀들이 아침비에 흙 먼지를 씻어 싱싱함으로 푸르름이 더 하다는,
여관주변의 풍광을 부각 시키며 친구와의 이별의 슬픔을 억누르고
헤어짐의 슬픔을 굳이 눈물로 표현하지 않고 그대에 권하노니 다시 한 잔의 술을 들라며
한 잔의 술과 서쪽으로 양관 땅을 나가면 벗이 없을 것이라며 멀리 변방으로 떠나야 하는
벗의 외로움을 걱정하며 진정한 우정을 시에 담고있다.
왕유의 위성곡은 비록 석별의 아픔이 깊고 크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한다는
惜別意悠長不露 : (석별의유장불로)란 중국인들의 정서(情緖)를 잘 드러내고 있는 詩이다.
그런데, 이 시(詩)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버드나무 류(柳)’라는 상징성을 하나
더 이해하여야 한다. 마치 정지상이 지은 送人의 남포를 이별의 상징으로 이해하듯...
이별 할때 버드나무가 이별의 상징물로 등장한것은 옛 문헌인
시경(詩經)의 소아(小雅)편에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의 심정을 노래한,
昔我往矣 楊柳依依 (석아왕의 양류의의: 그 옛날 떠나갈 땐 버들가지 한들 한들)
今我來思 雨雪霏霏 (금아래사우설비비 : 이제야 돌아오니 눈보라만 흩뿌리네)
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한나라 어느 때부터 길 떠나는 사람에게 버드나무를
꺽어주는 풍습이 생겨났다 한다, 버드나무가 이별의 상징이 된 이유는 버드나무는 꺾어다가
아무데나 심어도 잘 자라므로 길 떠나는 사람이 새로운 곳에 잘 정착하길 바란다는 의미와,
자라나는 버드나무를 볼 때마다 자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와,
또한 버들 柳자의 발음이 ‘머무를 류(留)’와 비슷하여 떠나가지 말고
머물러 달라는 ‘만류(挽留)’의 심정을 모두 상징한다 하여 사람들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주기 시작하였다 한다.
安西 땅으로 사신 가는 벗 元二를 송별하며 지은 시이다. 渭城은 당나라 때 수도인 長安의 서쪽,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편 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이른바 실크로드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당나라 때 長安에는 동쪽에는 파교灞橋가 있고 서쪽에는 渭橋가 있어, 동쪽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는 灞橋에서, 서쪽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는 渭橋에서 전별의 자리를 가졌다. 陽關은 지금의 甘肅省 敦煌縣에 있다. 당시에는 西域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황량한 사막 길을 오가는 발걸음이 끊일 새 없었다. 시인들은 이 길을 오가며 悲愴한 塞下의 노래를 불러 오늘까지 전하는 名篇이 적지 않다.
그러면 이제 작품을 감상해 보자. 역시 여기서도 새봄을 재촉하는 비속에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아침부터 내린 보슬비로 사람이 지날 때마다 길 위로 풀풀 날리던 먼지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실제로 촉촉히 젖은 것은, 흙먼지이기보다 사랑하는 벗을 멀리 떠나보내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비에 씻기어진 버들잎은 아연 푸르다. 버들을 보면서 시인은 이별을 예감하고, 다시금 한 잔 술을 권하고 있다. ‘다시금(更進)’이라 했으니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거나해질 만큼의 대작이 오갔을 것은 揚言이 부질없다.
척박한 땅, 인적도 없는 사막을 지나 아득한 安西 땅까지 가야 할 벗이 이제 말에 오르려 한다. 이별이 아쉬운 시인은 “내 잔 한잔 더 받고 가게.” 하면서 소매를 잡아끈다. 陽關 땅을 나서고 보면 이제 다시는 한 잔 술을 권해 줄 벗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붙잡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우리 옛 시조에,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란 것이 있다. 바로 이 정황에 꼭 맞을 듯하다.
2구에서 파릇파릇한 버들빛을 헤아리며 이별을 예감했다 하였는데, 당나라 때 벗과 헤어질 때는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折柳’, 즉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南浦’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므로,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 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주었던 것이고, 또 꺾이어 가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홍랑의 시조에,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계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당나라 때 시인 儲嗣宗은 「贈別」에서, “東城엔 봄 풀이 푸르다지만, 南浦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東城草雖綠, 南浦柳無枝”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南浦’와 ‘버들’이 모두 이별을 상징하는 어휘로 동시에 쓰이고 있다. 봄이 와서 풀은 푸른데, 떠나는 님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려 해도 이미 하많은 사람들이 죄다 꺾어 버려 남은 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출처] 객사청청류색신 (客舍靑靑柳色新)|작성자 moonkok711
이후로 ‘버드나무(柳)’ 또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음(折柳 : 절류)’이
등장하는 이별을 주제로 한 수많은 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는 왕지환(王之渙)이란 시인이 지은 <송별(送別)>이란 詩이다.
楊柳東風樹(양류동풀수) : 봄바람(東風)에 살랑거리는 버드나무
靑靑夾御河(청청협어하) : 푸릇푸릇 어하를 끼고 있네 (御河: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운하)
近來攀折苦(근래반절고) : 요즘 잡아 꺾이는 고통을 당하고 있음은
應爲別離多(응위별이다) : 응당 이별이 많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기생 홍랑이 님과 이별하며 지은 묏버들 이라는 시조에
버드나무가 이별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연은 아닌것 같다.
그리고 세번째 구절인 勸君更進一杯酒
(권군경진일배주 : 그대에게 다시 술 한 잔 권하노니)는
우리 고전소설인 춘향전에 서울로 떠나는 이도령에게 춘향이가
술 한잔을 올리며 이 구절을 읊고 있기도 하며 양관삼첩이란 위성곡을 노래할때
이 詩의 마지막 구절인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을 무고인,
무고인, 무고인, 양관무고인, 양관무고인, 양관무고인,
서출양관무고인, 서출양관무고인, 서출양관무고인이라고 후렴구를
세번씩 노래하는 방식을 뜻한다 한다.
*안서(安西)
당(唐)나라는 제국이 크다보니, 사방에서 다른 이민족들과 충돌을 겪게 된다.
예컨대, 서쪽으로는 토번(吐藩: 지금의 티베트)과,
북쪽으로는 돌궐(突厥: 지금의 몽고)등과 끊임없는 분쟁을 겪게 된다.
이들 분쟁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각지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게 되는데,
서쪽 지역에 설치한 도호부(都護府)가 있는 곳이 ‘안서(安西)’였으며
오늘날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챠현이다.
당시 여기로 가려면 ‘양관(陽關: 오늘날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 서남쪽)’이란 곳을
거쳐 가야 했는데, 이곳은 서역(西域)으로 통하는 제일 마지막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의 남쪽(陽)에 위치해 있다 하여 ‘양관(陽關)’으로 불렸다.
당(唐)나라 때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에서는 이처럼 서쪽으로 길을 떠나는 이들을
송별하기 위해 서쪽에 위치한 ‘위성(渭城)’까지 와서 송별을 하곤 했다. ‘
위성(渭城)’이란, 위수(渭水)에 위치한 도시,
즉 옛날 진시황이 도읍한 함양(咸陽)을 한(漢)나라 때부터 바꿔 부른
이름으로 장안(長安)의 외곽도시 정도에 해당한다. 장안(長安)은 오늘날 서안(西安)이다.
장안이었던 서안시 당나라 거리에 조성되어 있는 왕유의 상
왕유(王維, 699~761)
하동(河東) 포주 사람으로, 자는 마힐(摩詰), 호는 마힐거사.
어려서 모친의 영향으로 불학(佛學)에 정통하였으며,
마힐이라는 자는 불교의 경전인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가져온 것이다.
시·음악·그림으로 표현되는 인문 교육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세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은 그의 화론서에서 왕유를 남종화의 시조로 규정했다.
남종화는 문인 취향의 그림으로서, 피상적인 묘사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기록상 그의 작품에서 발묵(수묵화의 용묵법으로 비단바탕에 먹물을 뿌려 흐르는 상황에 근거하여 그리는 방법) 기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것을 함께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세에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명시 선집에 그의 작품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이백· 두보(杜甫 : 712~770) 등의 유명한 당대 시인들과 함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시인으로 손꼽힌다.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후에 왕유가 <응벽시>를 지었는데, 숙종이 시를 보고 왕유를 사면하고 태자중윤을 제수했다.
이후 집현전 학사를 거쳐 중서사인, 급사중, 상서우승(尚書右丞)이 되었다.
이때부터 세상에서 그를 왕우승(王右丞)이라 일컬었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만년(晩年)에 남전(藍田)의 망천장(輞川莊)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연을 소재(素材)로 한 오언(五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육조(六朝) 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自然詩)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대에 대표적인 산수전원파 시인으로서 맹호연과 더불어 ‘왕맹(王孟)’으로도 불린다.
왕유는 당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던 시기에 고위 관직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로서 다방면에 모두 이름을 떨쳤다. 시인으로서 그는 시선(詩仙)이라고 불리는 이백(李白, 701~762),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있어 '시불(詩佛)’이라고도 불린다.
송(宋, 960∼1279) 때의 소식(蘇軾, 1036~1101)은 그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현재 400여 수의 시가 전하며,
대표작으로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 <상사(相思)>,
<산거추명(山居秋暝)> 등이 있다. 저서로는 《왕마힐문집(王摩詰文集)》이 있다.
安西 땅으로 사신 가는 벗 元二를 송별하며 지은 시이다.
渭城은 당나라 때 수도인 長安의 서쪽,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편 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이른바 실크로드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당나라 때 長安에는 동쪽에는 파교灞橋가 있고 서쪽에는 渭橋가 있어,
동쪽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는 灞橋에서, 서쪽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는 渭橋에서 전별의 자리를 가졌다. 陽關은 지금의 甘肅省 敦煌縣에 있다.
당시에는 西域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황량한 사막 길을 오가는 발걸음이
끊일 새 없었다. 시인들은 이 길을 오가며 悲愴한 塞下의 노래를 불러
오늘까지 전하는 名篇이 적지 않다.
그러면 이제 작품을 감상해 보자. 역시 여기서도 새봄을 재촉하는 비속에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아침부터 내린 보슬비로 사람이 지날 때마다 길 위로 풀풀 날리던 먼지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실제로 촉촉히 젖은 것은, 흙먼지이기보다 사랑하는 벗을 멀리 떠나보내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비에 씻기어진 버들잎은 아연 푸르다. 버들을 보면서 시인은 이별을 예감하고, 다시금 한 잔 술을 권하고 있다. ‘다시금(更進)’이라 했으니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거나해질 만큼의 대작이 오갔을 것은 揚言이 부질없다.
척박한 땅, 인적도 없는 사막을 지나 아득한 安西 땅까지 가야 할 벗이 이제 말에 오르려 한다. 이별이 아쉬운 시인은 “내 잔 한잔 더 받고 가게.” 하면서 소매를 잡아끈다. 陽關 땅을 나서고 보면 이제 다시는 한 잔 술을 권해 줄 벗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붙잡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우리 옛 시조에,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란 것이 있다. 바로 이 정황에 꼭 맞을 듯하다.
2구에서 파릇파릇한 버들빛을 헤아리며 이별을 예감했다 하였는데, 당나라 때 벗과 헤어질 때는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折柳’, 즉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南浦’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므로,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 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주었던 것이고, 또 꺾이어 가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홍랑의 시조에,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계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당나라 때 시인 儲嗣宗은 「贈別」에서, “東城엔 봄 풀이 푸르다지만, 南浦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東城草雖綠, 南浦柳無枝”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南浦’와 ‘버들’이 모두 이별을 상징하는 어휘로 동시에 쓰이고 있다. 봄이 와서 풀은 푸른데, 떠나는 님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려 해도 이미 하많은 사람들이 죄다 꺾어 버려 남은 가지가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