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동"입니다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이 동네의 유래는 어느정도 짐작하던 바 있었으므로"이태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싫었지만 친구들은 역사를 상기하는 맘으로 음미했으면 좋겠네요
원래 이곳은 조선초기부터 지방에 파견하는 관인들의 국영 숙소인 ‘李泰院(이태원)이 있었다
꼭,어느 인물의 이름같지요?
그렇지만 관원들의 숙소와 공무용으로 말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지금의 역삼동(驛三洞), 역촌동(驛村洞)과 이태원(梨泰院), 퇴계원(退溪院)등이 그런 시설이 있던 곳이다. 왜란 당시에 황학동에는 운종사라는 여승들이 수도하던 절이 있었다고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한양을 점령한 왜장(倭將) 가등청정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운종사(雲鐘寺)에 들어가서 그 절의 여승들을 겁탈하며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러 지내다가 그들이 떠나갈 때는 그 절을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겁탈당한 여승들은 그 후 갈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府君堂)밑에 토막(土幕)을 짓고 살았는데, 임신하여 아이까지 낳게 되자 이웃 동네 사람들이 이를 알고 "이방인의 아기를 임신했다"하여
그 집을‘이태원(異胎院)’이라 하였다고~
한편 한양에 돌아온 선조왕과 조정은 피해 여인들을 벌하지 않고 전국 각지의 임신한 강간 피해자들을 위해 이곳에 주택들을 지어줬다.
이 주택은 "임신한 여자의 주택 (잉태원)"으로도 불려지게 됐다. 또한,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우리 나라에 귀화한 뒤 여기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였으므로 이곳 주민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잉태원과 이태원(異胎院)’은 원래의 李泰院(이태원)의 음을 따서 부르는 것이지만 의미는 멸시하는 뜻으로 불려진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잉태원(孕胎院)과
이태원(異胎院)’이라는 이름은 그 불행한 유래를 숨기기 위해서 조금 바뀌었다.
효종때부터는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배가 잘 되므로 동네이름을‘이태원(梨泰院)’이라 하였다고 하며 그 지명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태원은 조선조 중기부터 외국인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에
조선 때부터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가 1882∼1984년 주둔했고, 1910∼1945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광복 이후엔 미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에는 류관순열사의 무덤이 있던곳이다.
3.1만세운동 와중에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어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서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으로 증형되었으며 이후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체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
이화학당의 교장 룰루 프라이와 선교사들이 국제사회에 만행을 알리겠다는 항의를 받고서야
1920년10월에 돌려받고 10월14일에 장례를 치뤄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일제는 군용기지로 전용한다면서
예고없이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이후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이태원 부군당역사공원!
지난 2015년 세워진 이곳은 묘조차 지켜주지 못한 유관순 열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용산 주민들이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남산을 등지고 앞에는 한강수가 그림같다. 멀리는 관악, 청계산, 남한산이 한 눈에 들어와 서울에서도 조망이 빼어 나기로 이름난 곳이다.
6·25동란 전쟁을 거친 후 미군 부대의 재배치, 미8군사령부가 인근에 있어 미군들의 위락지대로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점차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과 관광의 명소로 발전하였다.외교관 시설과 이슬람 성전등 이국적인 모습도 코앞에 보인다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국제적인 쇼핑타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민족의 아픔을 ,지명을 바꾼다고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위대했던 역사보다는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 오히려 많은 것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