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3】(월) [난설헌·교산 얼사랑터] 성소부부고 살피기 002#
https://youtu.be/i6QRJ_QktnQ
✦살피기 머리에
한글 소설, 홍길동을 지은 허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작업으로 님이 남긴 문집, 《성소부부고》를 가져와 다시 읽으며 새롭게 이해하고, 그 뜻을 새길 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민족문화주진회에서 2006년에 7월에 펴낸 ‘신편 국역 성소부부고’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전체 7권으로 한글로 풀어낸 것이지만 쓴 글투가 한자투로 되어 있어 어떤 경우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그 책을 따라 가며 가능하면 쉬운 우리말인 한글로 다시 풀어 내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시간이 들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대로 교산 허균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으로 차분하게 살펴 보도록 하겠읍니다.
✦문집 머리에
(Ⅰ)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교산 허균(1569~1618)이 엮은 시문집입니다.
교산(蛟山)은 님의 호로 이 외에도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가 있읍니다.
이런 교산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許曄)과 후처인 어머니 김씨(김광철의 딸, 사천 애일당) 사이에서 막내(둘째 형인 하곡 허봉, 막내 누나인 난설헌 허초희)로 태어 났읍니다. 교산에게는 또 한 명의 형인 첫째 형, 악록 허성과 큰 누나 둘을 두고 있읍니다. 악록은 전처인 한씨를 어머니로 태어 났는데 이 한씨는 두 딸에 이어 이 악록을 낳은 것입니다.맏딸은 박순원의 아내요, 둘째달은 우성전의 아내입니다.
과거 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한 것은 초시로 님의 나이 17살 때인 1585년(선조 18년) 봄입니다. 이때 초시는 예조에서 주관하는 시험으로 문과·생원·진사시가 있으며 병조·훈련원에서 주관하는 무과·잡과의 제1차 시험입니다. 하지만 이 국역본에서 밝힌 합격하여 첫 벼슬을 내 얻은 것은 9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26살 때입니다.
그후 이이첨의 꼼수에 걸려 들어 반역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때가 1618년(광해군 10년), 님의 나이 50살 때였읍니다.
님이 실제로 반역을 꿈꾸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혐의를 덮어 씌운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긴 하지만 님이 남긴 많은 자료에서 나타나듯이 뚜렷한 개혁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만큼 드러내 놓고 새 나라를 꿈꾼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꿈을 간직한 채 조금씩 준비하는 삶을 사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님의 삶을 따라가 보면 낙천적이고 때로 괴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기 주장이 뚜렷하여 서로 뜻을 함께 할 수 없었던 권력을 누리는 데에만 정신을 팔았던 상층 양반 계층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것으로 또한 대체로 비아냥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님의 후반기 삶은 지금까지 살아 온 것과는 매우 달리 님의 글 재주가 필요했던 만큼 당시의 권력층은 그 필요에 의해서 오히려 님을 가까이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예로 이이첨과 가까원던 점에서도 읽을 수 있읍니다. 또한 당시 광해군의 며느리이자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임신을 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여 허균의 딸이 왕세자인 이지의 후궁으로 뽑혔는데 이때부터 이이첨은 긴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편이 아닌 다른 편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아 허균을 밉게 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기회만 되면 어떻게든 몰아 내려는 미움이 점점 커져 결국, 반역의 죄를 씌우는데에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 집니다. 그러니까 권력욕에 집착이 컸던 이이첨과의 친분은 교산의 운명을 반역으로 몰고 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혁 성향이 강했던 교산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명타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첫댓글 '성소부부고 살피기' 그 두번째시간입니다.
'난설헌·교산 얼 사랑터'라는 이름으로 살피는 것입니다.
교산허균연구소에서 '난설헌·교산 얼 사랑터'로 바뀐 것입니다.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의 얼'을 사랑하는 터에서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