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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 사두가이가 아니라 베드로여야 하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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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10 03:20
- 사두가이가 아니라 베드로여야 하는 우리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이것은 사두가이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한 질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두가이는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지요.
다시 말해 죽은 다음에 되살아남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믿고,
살아있는 동안 인간을 살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도 믿지만
죽은 다음에 되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되살리셨고,
그 예수의 이름과 힘으로 불구자를 다시 건강하게 한 것이라고 오늘
시비조의 사두가이들 질문에 답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지만
실은 베드로의 믿음 고백이요 자기 체험의 간증입니다.
베드로에게 하느님과 예수님은 ‘Revival God’이십니다.
되살리시는 하느님이시고, 되살아나신 하느님이십니다.
되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 성자도 되살리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도 되살리신 분이셨음을
베드로는 체험한 것이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자기 믿음을 고백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먼저 하느님의 힘으로 되살아났고,
이제 예수님의 힘으로 불구자를 되살린 것이며,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두가이가 아니라 베드로라면
하느님께서 되살리실 때 베드로처럼 되살아나고,
주님의 힘과 이름으로 되살리는 사람들이 될 차례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가 헛꿈이 깨지고,
갈릴래아로 돌아와 고기잡이한 것이 다시 헛짓이 되어
힘이 다 빠지고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 살리시는 주님,
다시 힘주시고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을 체험한 것처럼
이제 우리가 되살아나고 일어나 다른 사람을 되살리고 일으킬 차례입니다.
사두가이가 아니라 베드로여야 함을 깨닫고,
베드로처럼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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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부활로 새롭게 된 존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악에 맞서는 거룩한 반역의 행위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부활 이야기
부활로 새롭게 된 존재
2026년 4월 9일 목요일
신학자 폴라 구더는 예수님의 부활이 정의와 자비, 사랑의 종말 시대(완성의 시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 - 새로운 창조와 회복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표징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살던 많은 유다인들에게,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정의와 자비, 사랑의 종말 시대(완성의 시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 - 새로운 창조와 회복의 시)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셨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죽음 가운데 있었고, 세상은 이전과 다름없이 보였습니다. 로마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억눌려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저자들은 이를 단순히 죽은 이가 살아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지금 여기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급진적이고 변혁적인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을 넘어, 새로운 존재 방식의 시작을 알리는 표징이었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부활의 희미한 흔적들을 발견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슬픔, 가난과 억압으로 가득하지만… 그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때때로 화해와 자비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해당한 아들의 부모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순간, 폭력에 맞서 공동체가 일어나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는 순간, 인간 관계를 망치는 사소한 다툼을 넘어서는 순간들… 이러한 모든 순간은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종말의 조각이며, 부활의 은총의 표징입니다. 어떤 것은 세계를 뒤흔드는 극적인 사건이지만, 어떤 것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들입니다. 어떤 것은 온 나라와 대륙을 변화시키지만, 어떤 것은 단지 한두 사람의 삶을 바꿉니다. 그 순간들은 잠깐 스쳐 지나가고 우리는 곧 다시 일상의 거친 현실로 돌아가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아 새 창조가 가능하다는 희망과 변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줍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쉽게 삼켜버릴 수 있는 악과 부패, 억압에 맞서는 거룩한 반역의 행위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결코 변할 수 없다는 체념을 거부하고,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부활 신앙은 과거의 부활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동시에 미래의 종말을 내다보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부활과 종말의 흔적을 인식하게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새 생명을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생명을 억누르는 모든 현실 속에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초기 제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일의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 아침 묵상(The meditation)에서 이런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 자체가 기쁨 한가운데서도 애통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올해 마르세유에서 열린 부활 성야 전례에서, 많은 성인(成人)들이 세례를 받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Resucitó”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모두가 참된 기쁨으로 춤추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얽혀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제 결혼식 때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고, 4년 전 제 아들의 장례식 때도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충만하게 살아내라는 초대를 받은 듯했습니다. 때로는 놀랍게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감정들까지도 말입니다.
—Mary V.
References
[1] Paula Gooder, The Risen Existence: The Spirit of Easter (Fortress Press, 2015), 5.
[2] Gooder, The Risen Existence, 6, 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vid Becker,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봄꽃이 황금빛 햇살 속으로 피어오르듯,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 세상 속에서 계속 펼쳐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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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주도하시는 역사에 참여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고기잡이 일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마태 4,19).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그리고, 적어도 요한 복음에 의하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도(요한 20장) 다시 예수님의 부활을 애써 믿으려 하지 않고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베드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는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면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시 말해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중심'의 삶이 아닌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베드로는 아직 주님이 주도하시는 삶에 들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어둠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 그는 벌거벗은 채 있었는데(요한 21,7), 이는 성령의 능력(루카 24,49), 의로움(에페 6,14),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에페 4,24)으로 입혀지지 못한 상태를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자기-중심'의 삶 안에서 주님의 빛과 희망과 은총의 옷으로 입혀지기를 택하지 않고, 밤과 허무, 그리고 벌거벗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베드로를 다시 세 번 용서하시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요한 21,15-17).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나를 따라라"(요한 21,19) 하고 명하십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베드로는 오순절에 삼천 명을 세례로 이끌며(사도 2,41), 교회의 첫 번째 수장이자 두려움 없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사도 4,8 이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허비하지 않았는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저버리고 '내' 삶의 어둠에 빠져 헤매기도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거나,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삶에서 그분의 은총을 의식하지 못한 채 헤매는 때가 자주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이런 허무와 실망과 어둠의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이런 상황에 빠져 있을 때 그분께서는 더 친밀하게 우리 삶의 자리 한가운데로 찾아와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의 서광을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대개 "이런 '나'에게 주님께서 찾아와 주실까?"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구심이라도 가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적어도 이런 의구심 속에서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이 과연 '나'와 함께 하는지에 대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의 친밀함으로 더 강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당신과의 친교에서 예외로 두지 않으십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처럼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으로 다시 초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의심에 빠질 때 본능적으로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고는 처음에 출발했던 자리, 즉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요한 21,3).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가장 슬픈 구절 중 하나일 것입니다. 과거조차 그들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고, 그들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과거마저 사라진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과 실패가 그들을 현재의 순간으로 몰아넣었고, 거기에서 자기들을 찾아와 주시는 참된 사랑의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격변의 지금" 안에서 그들은 주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은 언제나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주도하시는 역사에 참여하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자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에 의해) 부활되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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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절망에 빠져, 과거의 생업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자들이 되기 전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에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신 주님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었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식사를 준비하고 부르십니다. 어디서 났는지, 숯불 위에는 이미 ‘물고기’도 있고 ‘빵’도 있었습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곧 이는 모두 당신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요한 21,10)고 하시며,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시중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곧 ‘와서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부활하신 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곧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이요,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숯불에 구운 물고기’가 되고, ‘찢어지고 바수어진 빵’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곧 말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섬김으로 생선을 마련하고,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국을 끓여,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었으니,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말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섬김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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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 있으면서 ‘서명자(signer)’란 말을 들었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달라스 성당에서도 재정과 관련된 서명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발행하는 수표는 모두 제가 사인해야 합니다. 지출하는 용도를 꼼꼼하게 챙겨 보는 편입니다. 대부분은 사무장님이 차질 없이 준비해 주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사인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발행하는 공문과 서류도 제가 사인해야 합니다. 세례 증명서, 견진 증명서, 혼배 서류도 제가 사인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의 이름으로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서명한다는 것은 그 일에 관해서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와 국가도 협정을 맺으면 양국의 국가수반이 서명한 협정서를 교환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웅’이란 영화에서도 독립군이 새끼손가락을 잘라 피로 큰 태극기에 서명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결의와 각오를, 서명을 통해서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법정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정은 그분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을 하느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이 복음의 진리를 세상 이야기로 보여 줍니다. 억울하게 테러범으로 몰린 아들과, 끝까지 아들의 무죄를 믿었던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결백하다는 것을 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세상은 아들을 죄인으로 규정했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믿었습니다. 세상은 침묵했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신앙의 신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고,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침묵 속에서 당신 아들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안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억울한 순간을 경험합니다. 오해를 받고, 평가받고, 때로는 죄인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사목을 하면서도 저 자신을 돌아보면, 사람들의 판단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잘하려고 했는데 오해를 받기도 하고, 침묵 속에서 홀로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나는 너를 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이름,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그 이름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름입니다.
영화 속 아버지는 진실이 드러나는 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아들에게 남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하느님의 구원은 그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이 고백은 배타적인 선언이 아니라, 사랑의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판결보다 깊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오해보다 넓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듯이, 억울함과 상처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 안에서 넘어졌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고, 상처 입은 영혼이 온전하게 되며, 두려움에 갇힌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의 삶 안에도 억울함과 오해가 있습니까? 혹시 사람들의 판단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는 않습니까? 그때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나는 너를 믿는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이름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우리의 정의가 있으며,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것이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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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의 선물, 은사에 대한 감사!
젊은 시절, 너무나 삶이 버겁고 힘겨울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길이 도무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4박 5일 성령쇄신 세미나였습니다.
정말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안수를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두 가지를 청했습니다. 길고 지긋지긋한 병고에서 치유되는 것, 그리고 지도자 선생님처럼 천상의 멜로디로 노래하는 듯한 방언의 은사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둘 중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몸은 어제와 똑같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방언은? 한번 해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습니다.
크게 실망하고 좌절하며 떠나려는 제게 지도하셨던 선생님께서 그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십시오. 분명, 하느님께서는 각자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사를 선물로 주십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계속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게 선물로 주어진 은사는 과연 무엇인가? 한 달을 머리 싸매고 그렇게 고민하던 끝에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게도 성령의 은사가 확실히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는 치유받는 것이라든지, 신기한 언어로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은사는 고통을 끝까지 참아내는 은사였습니다. 고통을 많이 당해봤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측은지심의 은사였습니다.
저는 그 뒤로 더 이상 병고의 치유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제게 주어진 은사, 고통을 잘 견디고,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로하는 은사를 더 성장시키고 극대화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이지 신기한 결과물이 생겼습니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생겨 왠만한 고통 앞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 만나게 되면, 남의 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그와 함께 하고,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사도행전의 키워드는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었기에,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풍성한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사도들의 감동적인 설교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는데, 그 수가 오천 명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비결은 결국 성령입니다. 사도들에게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수시로 협박받고 투옥당하면서도, 그 태도가 그전같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용감합니다, 비결은 성령이십니다.
알다가도 모를 참으로 알쏭달쏭한 존재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간략하게나마 정리를 해봤습니다.
① 성령은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견진성사나 성령 세미나는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성령의 활동을 더욱 활기차고 생동감 있게 고무하고 진작시키십니다.
②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은사는 각 사람마다 철저하게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을 해석하는 은사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봉사하고 헌신하는 은사를, 끝까지 견뎌내고 수용하는 은사를...
③ 따라서 우리는 내게 없는 은사에 대해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남들이 방언의 은사를 술술 풀어 놓는다 할지 라도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내게는 그와 다르지만 또 다른 하느님의 선물, 은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 은사를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합니다.
④ 내가 받은 은사를 하느님의 영광과 공동선을 위해 잘 씌여지도록 은총을 극대화시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어찌 그리 사람 관리를 잘하는지? 그리고 관리된 분들을 영적으로 잘 교육시켜 후원자로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탈렌트입니다. 후원자 관리! 사실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즉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지는 지상 과제는 무엇인가? 오늘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을 무엇인가? 오늘 내가 동료 인간에게 베풀수 있는 나눔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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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21,1–14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날이 밝을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들이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힙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말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과거의 실패’로 몰아붙이지 않으시고
식탁으로 다시 부르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합니다.
제자들의 빈 그물은
그들의 무능을 조롱하는 표지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진짜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물가에서
불을 피우고, 빵과 생선을 준비해 두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설교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먹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눈으로 보면
이 식탁은 단순한 아침 식사가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살리는 자비의 성사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두려움과 공허를
‘명령’이 아니라
‘돌봄’으로 치유하십니다.
오늘 1주(성실/온유/절제)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성실: 빈 그물의 밤을 숨기지 않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기
• 온유: 실패한 자신과 이웃을 비난하지 않고 주님의 자비를 기다리기
• 절제: 성급한 자책과 과잉 통제를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기
부활의 주님은
지친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묻습니다.
“먹어라.”
오늘 우리도 이 초대를 듣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채우기 위해
먼저 식탁을 차려 두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제가 빈 그물의 밤을 지나올 때에도
당신의 식탁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믿게 하소서.
성실하게 다시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온유로 자신과 이웃을 대하며
절제로 조급함을 내려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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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불교의 '생전예수재' 성경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의 생전예수재라는 말 속에 예수라는 말이 들어 있긴 하지만 이건 한자의 의미입니다. 미리 재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재를 지냅니다. 흔히 말하는 49재가 있습니다. 조금 쉽게 이해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것의 목적은 고인의 영혼을 이 지상에 머물지 말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제사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가령 천주교 형식으로 말하면 위령미사 아니면 연미사 이렇게 보면 될 것입니다. 이건 죽고 난 후에 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원칙이 그렇습니다. 사실 의미상 보면 이것보다도 더 뛰어나고 훌륭한 재가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재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리 당겨 지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조금은 이상한 느낌입니다. 마치 미리 장례미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이건 우리 천주교에서 하는 의식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도 볼 수 있지만 이걸 성경적인 의미로 한번 보면 전혀 차원이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보시 중에 최고의 보시가 무주상보시입니다. 뭔가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최상급의 보시입니다. 생전예수재는 최고의 재라는 그런 공식적인 말은 없긴 합니다만 의미로 보면 이걸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면 최고의 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미리 재를 지낸다는 것의 의미는 이게 죽은 후에 하는 그 재를 그 형식으로 한다는 게 아닙니다. 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살아서 하는 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그 재물을 세상에 베푸는 것입니다. 재물이 가령 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재물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나 아니면 배고픈 사람에게 식량을 사주는 것처럼 그렇게 베푸는 그 자체를 불교에서는 재라고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후에 하는 천도재처럼 그렇게 재를 지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만약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가장 살아 있는 제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전에 언급을 한 건 단순히 재물을 나누는 걸 말했습니다. 이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자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건 단순히 재물만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영적인 자선도 있습니다. 바로 그건 기도를 해 주거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위로를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현대적인 기독교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때 천국마일리지를 적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행을 적립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불교의 생전예수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봐도 많은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럼 천주교식 생전예수재라고 한다면 그 예가 많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게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웃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레벨이 다른 사랑이 아닙니다. 첫째가 하느님 사랑 둘째가 이웃사랑인 것처럼 순서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건 한국어로 번역했을 땐 그런데 실제 원어의 의미는 중요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같은 레벨입니다. 그럼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순서의 개념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수학적으로는 똑같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 사랑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이웃을 그만큼 사랑한다면 그게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하는 게 가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잘 묵상해보면 그렇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그 내용이 이걸 사실 증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속에 있는 그 작은이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떤 억지 논리가 아닙니다. 바로 정확한 성경을 기초로 한 해석입니다. 논리적으로도 전혀 하자가 없는 논리입니다. 그럼 최종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 살 때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게 그게 가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최종 모든 핵심을 하나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만이 내 영혼이 가장 안전하게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천상 마일리지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불교의 의식을 통해 기독교 관점에서 한번 해석을 해 보고 싶은 묵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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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소인, 매화 당신의 마지막 궁녀로 남고 싶사옵니다.
비운의 왕 단종의 마지막 궁녀로 남고 싶었던 매화가 있었습니다. 다음생엔 누이로 어미로 품어주고 싶다는 절절한 마음은 몇 백년의 세월이 흘러간 역사이지만 눈물로 다가오는 슬픈 역사입니다. 궁녀였지만 그녀는 궁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낳아준 엄마가 아니지만 단종의 유모 역할을 한 궁녀였기에 어린 왕을 향한 마음은 그 어떤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사남의 OST를 듣고 그 궁녀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그냥 눈물이 나오고 가슴 아파 더 이상 듣지 못할 정도입니다. 매화 역으로 나온 배우의 얼굴 표정을 보면 정말 연기였지만 그 얼굴에 어미의 마음으로 어린 왕을 가슴으로 품어줬다는 게 느껴지니 그 마음은 궁녀의 마음이 아니라 가슴 찢어지는 어미와 같았을 겁니다. 왕의 궁녀로 남고 싶다는 매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달은 성모의 달입니다. 성모님은 여왕이시고 그것도 하늘의 여왕이십니다. 여왕이자 어머니이십니다. 정말 이런 마음이 듭니다. 어머니의 아들이자 여왕을 모시는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다 어머니 품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늘의 여왕이신 어머니를 제 가슴속에 영원한 어머니로 간직하고 싶네요. 아직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그 영화의 이미지를 이용해 성모님을 애절하게 그리워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 수 있다니 정말 왕사남을 만든 제작진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성모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소인 매화이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매화의 자리에 제가 들어가면 영원히 성모님을 하늘의 여왕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을 품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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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09:30 추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한 21,9-14).>
1) 이 이야기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2ㄴ-14).”
<이 말씀은,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하던 일은 이제부터 너희가 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더 멀리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 말씀은, “너희는 나와 일치를 이루어야만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라는 뜻인데,
“너희는 나에게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고,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일의 결과가 꼭 놀라운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의 이야기처럼 놀라운 결과를 얻을 때도 있고, 보잘것없는 결과로 끝날 때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 그의 선교활동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실패로 끝난 때도 많습니다.>
2)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하셨던 말씀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2-14).”
복음을 전해 주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니, 복음을 전해 준 이의 책임은 아닙니다.
신앙인의 사명은 복음을 전해 주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까지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과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일의 결과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성실하게 수행하면 됩니다.
<어떤 일에서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일은 주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조력자’일 뿐입니다.
반대로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더라도 실망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때가 아니었든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주님의 뜻’이 따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3) 사도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의 일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성령의 은사’를 받기도 전에 무엇인가를 하려고 성급하게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14절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나타나셨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났었던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해서,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간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의 일은 주님의 힘으로, 주님과 함께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힘을 받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기도’입니다.
11절의 ‘153’은 복음의 충만함과 보편성을
상징하는 숫자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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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21:45 추가.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뒤 세번째로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구조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셨을 때와 비슷하지요. 그 두 제자가 처음에는 자기들과 함께 걸으시는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그분께서 풀이해주신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나서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도 ‘말씀’이라는 매개를 통해, 보다 정확히는 주님 말씀에 대한 ‘순명’을 통해 자기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던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기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루고 싶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자기 뜻을 내려놓고 비워내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당신 말을 들으라고 억지로 강요하실 수도 없습니다. 주님 말씀은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비로소 우리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스스로 자기 뜻과 고집을 내려놓아야만 했는데,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실패’와 ‘낙담’의 체험이 그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뜻대로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겸손해져서, 자기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이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겁니다.
밤새도록 허탕을 치고 난 뒤 축 늘어져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여기서 ‘왼쪽’이나 ‘오른쪽’은 그저 지리적 방향을 가리키는게 아닙니다. 내 마음과 지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의미하지요. 배의 ‘왼쪽’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거기엔 돈, 성공, 인기, 권력이라는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물을 아무리 던져도 건질 게 없습니다. 괜히 그물이 탐욕이나 집착같은 돌부리에 걸리면 그물이 찢어지거나 인생이라는 배가 좌초되기도 하지요. 반면 배의 ‘오른쪽’은 신앙인들이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거기엔 용서와 자비, 이해와 포용, 나눔과 사랑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 그물을 던지기 망설여지지만, 막상 그물을 끌어올려보면 내 삶에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쁨과 보람이라는 물고기들이 가득하지요.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은 주님 말씀대로 그물을 배의 오른쪽에 던지고 난 뒤에, 행복과 보람이라는 물고기들을 잔뜩 건져 올렸습니다. 그들이 만약 ‘어부’라는 자존심과 고집에 빠져 주님 말씀을 무시했다면 계속해서 호수 위에서 헛손질이나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명’을 한 덕분에 주님께서 이끄시는 더 깊은 행복 속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제자들을 이끄셨듯이 지금 우리를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뜻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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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0.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3:55 추가.
<변덕이 부활 신앙의 증거라고?>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 겉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요한 21,7) 부활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의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으로 기묘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갑자기 겉옷을 입습니다. 상식적으로 수영을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일을 마쳤는데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말에 그물을 치고, 갑자기 물에 뛰어드는데, 심지어 겉옷을 입고 뛰어듭니다. 도대체 예측을 할 수 없는 행위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복음은 어쩌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축제에 올라가시지 않겠다고 형제들에게 말씀하셨지만, 나중엔 올라가신 것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올라가실 것이었는데 올라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변덕을 부리신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사람이셨고, 영으로 태어난 사람은 바람이 부는 대로 갑니다.
먼저 베드로가 겉옷을 입은 행위의 영적 의미를 구약의 야곱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형 에사우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지만,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며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줄 자신의 모든 열매, 곧 아내와 자녀들, 재산을 먼저 보낸 뒤 혼자 남아 밤새 천사와 씨름합니다. 이 씨름은 자신의 자아를 꺾는 '기도'의 상징입니다. 날이 밝자 야곱은 형 앞에 서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하며 나아갑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복을 가로챘는데, 그 방법은 에사우의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습니다. 아담이 가죽옷을 입어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옷의 능력이 발휘되려면 본래의 자아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수영도 이와 결을 같이 합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입은 것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발을 씻겨주시며 나누어 주신 그분의 정체성, 즉 '의로움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수영법은 오늘날처럼 물 위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땅에 엎드려 기어가는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바다 위에서 야곱처럼 '엎드려 절하며'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밤새 잡은 153마리의 물고기, 곧 자신이 구한 하느님의 자녀들을 선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처럼 부활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엎드리는 유연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변덕’이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들은 ‘자유’라고 말할 것입니다. 영으로 난 사람들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언제든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 명령할 것을 알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계획을 세우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믿는 것이고 이는 하느님 눈에는 그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국에서 일어난 '참새 소탕 작전'입니다.
1958년 중국의 마오쩌둥은 농촌을 시찰하다 참새가 곡식을 까먹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지도자의 한 마디는 즉각 '원대한 계획'이 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동원되어 냄비를 두드리고 깃발을 휘둘러 참새가 땅에 내려앉지 못하게 했고, 지쳐서 떨어지는 참새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1년 만에 2억 마리가 넘는 참새가 사라졌습니다.
중국 정부는 곡식 수확량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며 자축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만드신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얄팍한 계획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참새가 사라지자 참새의 주식이었던 해충과 메뚜기 떼가 천적 없이 창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 전역에는 전무후무한 대기근이 닥쳤고, 무려 3,000만 명에서 4,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인간의 '완벽해 보이던 계획'이 하느님의 '거대한 생명 시스템'을 무시했을 때,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처럼 고정된 인간의 내비게이션을 비웃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올라가지 않겠다" 하시고는 몰래 올라가시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자"는 베드로의 계획을 헛수고로 만드신 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 거룩한 변덕에 즉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유연성의 정점을 우리는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에게서 봅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1928년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하여 20년 동안 안정적인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지리학 교사로서, 나중에는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직까지 맡으며 그녀의 앞날은 보장된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6년 9월 10일, 다질링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속으로 가라"는 '두 번째 부르심'을 듣습니다.
당시 수녀회의 반대는 처절할 정도였습니다. 장상들은 20년이나 헌신한 유능한 수녀를 잃고 싶지 않았고, 고독한 거리로 나가는 것은 수녀회의 규칙과 맞지 않는 미친 짓이라며 가로막았습니다. 그녀는 장장 2년 동안이나 교회의 엄격한 심사와 의구심 섞인 눈초리, 그리고 동료들의 비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계획은 하느님의 것일 뿐"이라며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교회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마침내 1948년 4월, 비오 12세 교황의 특별 허락을 받고 수녀원 담장을 넘었을 때, 그녀는 어제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말씀하시는데 어제의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령의 바람은 이처럼 20년의 안락함을 한순간에 뒤엎는 거룩한 변덕을 요구합니다.(출처: 캐서린 스핑크, 『마더 테레사 전기』)
우리 삶에는 '깃발'과 '돛'이라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자기 계획을 믿는 사람은 바람 앞에 선 '깃발'과 같습니다. 깃발은 한쪽 끝이 고정되어 있어 바람이 불면 요란하게 펄럭이지만, 바람이 조금만 강해지면 찢어져 버립니다. 내 고집과 계획에 묶여 있는 사람은 시련이 닥치면 금방 절망하고 원망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은 '돛'과 같습니다. 돛은 돛대에 연결되어 있지만 바람의 방향에 따라 언제든 자신을 조절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은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나아갑니다. 교부 성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영혼은 흐르는 물과 같다. 돌을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뛰어내리며, 태양을 만나면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간다. 고여있는 물은 썩지만, 변덕스럽게 흐르는 물은 생명을 낳는다. 그리스도를 입은 이들이여, 그대들의 변덕을 두려워 마라. 그것은 살아계신 주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다."(성 베르나르두스, 『하느님을 사랑함에 관하여』 12, 1).
세상의 계획이라는 배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며 앉아 있지 마십시오.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돛을 올리고, 계획을 수정하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헤엄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항상 여러분 주위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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