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의 기도, 우리의 기도
에즈 9,5-9; 루카 9,1-6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2023.9.27.; 이기우 신부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빈첸시오 드 폴 신부를 기억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였고 제자들에게도 강조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최후의 심판에서도 이 잣대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을 남기셨는데도,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 문화권에서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당시 교부들이 이원론적인 그리스 철학으로 복음을 해석하려다 보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신성과 인성을 갖추신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으로 해석된 교리나 신앙고백문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 증언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적에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한 성인 성녀들이 간헐적으로 교회의 역사에 등장해서 복음의 고유한 본질을 계승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이 쓰여지도록 이끄신 성령께서 사도신경이나 대신경 못지않게 성인 성녀들의 행적을 이끄심으로써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만드신 성령의 감도(感導)하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복음화의 신비야말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결정적 징표이었듯이, 성인 성녀들의 행적으로 전해진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야말로 교회가 메시아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임을 드러내는 결정적 징표입니다.
독서에서는 에즈라 사제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바빌론 유배와 귀환 사건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역사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그 해석에 의하면, 바빌론 유배는 남북으로 갈라져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했던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환과 성전 재건은 이제 조상들의 죗값을 치룬 유다인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즈라 시대에 시작된 이스라엘의 재건은 성전을 장악한 사두가이들의 전횡(專橫)과 율법 해석을 독점한 바리사이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가 예수님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모으신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혈통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재건되는 참이스라엘이 제자 공동체였습니다.
그 제자들이 여러 고을로 파견되면서 받은 명령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며 마귀를 쫓아내라는 것이었고, 이 세 가지 위임을 실천하되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않는, 다시 말해 철저한 가난의 생활양식으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파견윤리는 오늘날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선택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길에 들어서는 그 어떤 성소자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선택한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거나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서 또는 모종의 압력을 받아서 그 길에 들어서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파견윤리 역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자의 명예와 보람은 파견윤리에 대한 충실함에 달려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라는 명령은 위로와 치유의 사도직을 비롯하여 공동선에 헌신하는 모든 활동으로 귀결되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명령은 개별적이거나 구조적인 사회악에 맞서는 모든 활동으로 귀결됩니다. 공동선에 헌신하고 사회악에 맞섬으로써 이룩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은 참이스라엘로 선택된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평신도들과 함께 이룩해야 할 영적인 문명이며 역사와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배우자와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에서 면제됨으로써 얻게 된 자유는 바로 이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즈라의 기도는 민족 복음화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빈첸시오 드 폴의 헌신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통해 교회의 새 복음화를 바라는 우리의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빈첸시오 드 폴의 관점을 더하여 에즈라 사제의 기도를 우리 민족의 현실 속에서 바칩니다.
“저희 조상 때부터 이 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 죄값으로 초래된 벌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혹독하게 받아야 했는데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는가 싶더니 국토와 겨레가 갈라지고 서로 총부리까지 겨누더니 70년째 휴전 중입니다. 백 년 박해의 죄악이 백 년 고난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와 분단 그리고 독재와 가난으로 신음하던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남녘 땅의 대한민국이 전쟁 후의 폐허를 딛고 선진국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도록 해 주셨으며, 한국 가톨릭교회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배출하고 순교정신을 계승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갈라진 겨레의 화해와 통일은 물론 민족 복음화를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기를 바라며 이 땅은 물론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는 희생을 봉헌하나이다.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