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
글쓴이 산적A
대망
Episode 1. 대망
0.첫 임무
“직업선택을 잘못 한거 아닐까.”
죽을 상을 하고 있는 것은 김소월. 4년전 14세의 어린나이로 과거급제를 하였으며, 자질을 인정받아 특수임무를 맡는 어사의 증표인 백마패를 받기위해 4년 동안이나 궁궐의 비밀 수련장에서 썩고 나와서 받은 첫 임무는 그 동안의 노고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대망을 조사하되, 그것이 위험하다면 상황에 따라서 처리하라.’
“말도 안되 뭐 이런게 다 있어. 이 따위 명령이!”
라는 말과 함께 내던지려 했으나. 차마 그럴수는 없다.
국법을 초월한다는 백마패와 흑마패,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배속된 특수 수사기관이며, 특수한 현상등에 관련한 일처리를 하고 전담한다.
“기대가 크네.”
이름이나 알까만은 영상대감이 직접 건낸 말한마디.
에효.
한숨이 폭 나오지만 할 수 없다.
이런건 금방 끝내버리겠다.
“기방이라도 들렸다 가는게 예의일까나.”
“마음에 드는 아이라도 고르셨습니까?”
“물론 보름전에 몰래 대궐 담넘었을 때...”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소월의 고개가 나무관절 돌리는 듯 끼이익하고 90도로 꺽이며, 끼어든 사람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왔는지 소월의 옆에는 약 3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이 서 있었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와 최대한 움직임을 생각한 도복, 그리고 특이한 곡선을 가진 도 2자루를 허리에 찬칼. 그리고 소월에게 보여주려는 듯한 작은 나무 명찰이 그의 손에서 달랑 가렸다.
끼이익..
옆으로 뉘여져 써있는 글을 읽기 위해 소월도 몸을 기울렸다.
백마패를 가진 어사는 누구나 한가지씩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은 흑마패도 마찬가지지만 흑마패는 특수 임무 중에서도 비밀스런 임무에서 쓰이는 능력자들이 많다. 하지만 어느쪽이라도 능력자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보디가드를 겸하는 방자는 국가에서 특별하게 길러지는 자들 중에서 뽑혔다.
“백련회(白蓮會)..”
중년의 아저씨는 고객를 끄덕였다.
“마헌이라고 합니다. 저번 미팅때 뵈었지요?”
“아.. 재비뽑기에서 진 결과가 이런곳에서 나타나게 될줄이야.”
마헌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사실인걸 어찌하랴.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누가 더 자신과 맞는지를 고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중요한건 역시 ‘운’이었고, 그에 누군가의 제의로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라는 것이다.
“젤 처음 누가 제비뽑기로 하자고 했지요?”
“사소한것에 목숨걸지 말자구. 그보다 앞으로 잘 부탁해.”
마헌은 물론이라는 듯 믿음직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미모의 여성이 뽑였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한탄을 금할길이 없었다.
“우선 임무를 받았으니, 명령을 따라야지. 마헌도 임무가 뭔지 알고 있지?”
“개별 통지 받았습니다.”
“좋았어. 가자구.”
루루랄라 전진을 하려고 할 때 마헌이 어깨를 잡았다. 벌써 상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니 흐뭇.. 아니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자 마헌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전에 사건의 계요는 아십니까?”
“계요?”
그게 무슨 이불이라도 되는 듯 되물었고, 마헌은 또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소월은 처음엔 다들 이런 것이라며 마헌을 위로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고 대드는 마헌의 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첫 임무를 임하는 태도라고 하기엔 무책임하시군요.”
“대들기 없기. 하지만 명령서에는 진짜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구.”
그랬다. 품안에 갈무리한 명령서에 적힌 것은 ‘대망을 조사하되, 그것이 위험하다면 상황에 따라서 처리하라.’라는 것이었다.
“쫀쫀하게 굴지말고 알고 있는대로 말하라구. 우린 파트너잖아. 파트너. 어감이 좋은데? 어쨌든 그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거야?”
막막한 단어다. 대망(大望), 말 그대로라면 큰 희망이라는 뜻이지만 희망을 조사하라는 것은 아닐게 분명했다. 소월의 무지함에 감탄했을리는 없지만 마헌은 한동안 굳어있던 몸을 간신히 풀고 약간의 불평을 털어 놓았다.
“휴.. 선임 어사님께서는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그것에 대해 서고도 조사하시고 하셨건만. 방법이 없군요. 하긴 보필하는 것은 저의 임무니까요.”
“헤헤 역시 상급자는 편하다니까.”
다시 굳어버리는 마헌을 부여잡고 다시는 안하겠다고 다짐을 하고서야 마헌은 설명을 시작했다.
“대망은 물건이나. 사람이 아닙니다.”
“물건도 사람도 아니라. 그런게 어디 있어? 무슨 신이라도 되는 거야?”
“어쩌면.. 말이죠.”
마헌은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숨겨져 있을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주지 않았고, 대망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1.소망
늘 평온한 모습의 연못, 이름조차 없어서 그저 작은 호수라는 뜻으로 ‘소호’라고 부른 것이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이름이 되서 불리고 있다.
소호는 넓은 분지의 가운데 있었다. 바로 옆에는 한천이라고 불리는 작은 고을이 있었고, 멀리 백제시절부터 이곳에서 뿌리를 튼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작은 연못을 지키는 것을 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과 사.
이 고을의 모든 것은 이 연못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태어난 아이는 이 연못물에 씻겼고, 죽은 사람들 또한 이 연못물로 그 몸을 씻겼다. 그러나 그렇게 특이한 관습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거르더라도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작고 조용한 고을은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세월에 파묻혀도 변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씨를 뿌리며, 여름엔 뜨거운 태양 밑에서 잡초를 뽑거나 소를 먹이는 일을 하며, 가을에는 수확하고, 겨울에는 보리를 심었다.
작은 고을에 큰일 같은 건 어느 집 소가 송아지를 낳았다느니 하는 것 따위가 전부였다. 그만 큼 이 고을에서는 사건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해였다.
아이들은 제각기 눈썰매나. 눈사람을 만드는 것에 분주했고, 그러느라 한 소녀가 산으로 산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대감집의 수진이 사라진 것이 그렇게나 큰일처럼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진을 찾기 위해 온 분지를 돌아 다녔다. 몇몇 어른들로 조직된 일행들이 멀리 옆 마을까지 가야했던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새근새근 잠든 채로 한 사내에게 업혀서 마을에 도달한 것이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내는 말없이 소호에서 소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잔잔한 연못은 미동도 없었지만. 사내의 마음은 무척이나 흔들리고 있었다. 뭔지 모를 불안한 감정이 사내를 혼돈에 몰아넣었다. 물론 그건 소녀 때문은 아니었다.
“신비한 연못, 불완전한 신의 땅..”
수진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러갔던 대감집 머슴 도광이 수진을 대리고온 사내가 이상하다며, 사내에 대해 이것 저것 떠든 것이 씨가되어 여러 가지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집체만한 호랑이가 있었어. 그런데 저 오빠가 손을 내밀었거든? 그런데 호랑이가 쿵~~ 하고 쓰러지는거야~’
수진이 깨어나 자신이 어떻게 실종됐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을 듣고 몇몇 사람들은 수진이 꿈을 꿨다는 둥 말이 많았지만, 그것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수진은 자신이 호랑이를 보고도 울지 않았다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랑하고 다녔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호랑이를 쓰러트린 사내에게 온 관심이 쏟아지는 것을 뜻했다.
“자내는 누군가. 어떻게 호랑이를.. 산의 신을 인간이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인가.”
무예를 익힌 듯 가볍고 날렵한 차림에 허리에는 호신용인지 아니면 무언가 싸움을 하기 위함인지 용도가 분명치 않은 장도를 차고 있던 남자를 불러들인 최대감은 한동안 뚫어져라 그를 지켜보았다.
“호랑이가 평범한 짐승은 아닙니다만. 산신은 아닙니다.”
“정말 호랑이를 죽인건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해칠 의도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고맙다고 해야겠군. 우리 아이. 수진이를 지켜줘서.”
최대감은 진심인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대감의 모습에 사내는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나만 더 묻겠네. 자네의 이름은 뭔가.”
“설(雪).. 한 설입니다.”
밖에 소복이 쌓이는 눈을 보며,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진짜 이름인지. 아니면 눈을 보며 지은 가짜 이름인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최대감은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좋다면 자신의 딸을 줘서라도 이곳에 있게 하고 싶었다.
많지도 않은 질문이었지만 마치 신비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러운 대감의 모습에 한설도 깊이 감명 받았고 그렇게 한설은 대감집에서 살며 농사를 지었다.
시간은 흘렀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겨울이 찾아왔을 때, 조선에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휘 융, 후에 연산군이라 불리는 조선 10대조의 왕이었다.
“오빠 또 여기 있는거야?”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한설은 못에 박힌 듯 연못을 떠나지 못했다. 아마 처음 부터였을 것이다. 이 연못에 온 정신을 빼앗긴 것. 왼지 변하지 않는 곧은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수십년 곧게 자라는 대나무처럼 이 연못도 줄곧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나르시즘이라던가.”
“나르.. 뭐?”
“서쪽의 큰 나라의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야. 물에 비친 자신을 보고, 한없이 한없이 자신의 모습에 취해서.. 결국엔 헤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지.”
“하여간, 그 책 몇번이나 읽는 거야.”
“하지만 좋은걸. 신비롭잖아. 커다란 철을 두르고, 아름다운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 결투를 하는 거야.”
최근 수진은 서양의 문물에 빠져있었다. 보통의 여아들이라면 청나라의 여러 물건에 반해있었을 테지만, 수진은 뭔가 색다른 것을 좋아했고, 우연히 구한 이 책한권은 수지에게 새로운 상상을 펼치게 해주는 보물이었다.
수진은 많이 자라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작고 약하게만 보였던 모습은 이제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느새 어엿한 숙녀로서 이제 한사람의 여자로 변모하고 있는 수진은 방심하고 있다면, 반해버릴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해있었다.
“오늘 춥다. 어서 들어가.”
“오빠는 안 추워? 바보 같아. 나도 오빠랑 같이 있을 거다 뭐.”
“이러다 감기 걸리면 나만 혼난단 말이야.”
수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빤히 설이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감기 걸리면, 간호 해줄 꺼야? 당연히 해줄꺼지?”
“무..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이런 것에는 익숙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방심했던 것일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설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진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설마 이렇게 귀엽고 예쁜 수진이를 모른 척 할거야?”
“..”
“뭐라고? 어서 말해봐~~”
설이의 팔을 부여잡고 대답을 채촉 해보지만 한설은 말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하늘은 그런 한설의 마음을 나는지 모르는지 검게 물들어 구멍이라도 뚫린 듯 눈을 퍼부어댔다.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한설은 말이 온다는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정작 알 수 없는 것은 말의 정체였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밤에 파발마라니 급보임에 틀림없었다.
“신기한 일이네. 파발마라니.”
“정말, 나도 처음 보는 것 같아. 우리마을과 파발마라니 뭔가 안 맞는거 같지?”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하늘의 어딘가 무너진 듯, 눈은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휘이잉--
갑작스럽게 돌풍이 둘을 향해 불어닥친다. 작은 눈보라가 둘의 시아를 가린다.
“...”
“에?”
수진은 무슨 소린가 하고 설을 바라보았다. 설의 볼은 더 붉어져 있었다. 수진의 얼굴이 금새 환해졌다.
“비겁해! 잘 안들렸단 말이야! 다시 말해줘!”
“내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춥다 어서 들어가자.”
“헤, 감기 걸려야겠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수진은 까르르 웃어댔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발이 걷히고, 둘이 사라진 연못가에는 주인 잃은 발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쩌어억..
불길한 소리가 호수가에서 들려왔으나 그 소리를 들은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2.하선 포구
“나리. 어서 피하십쇼!”
주막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소월이 막 국밥을 한입 먹으려고 하려던 찰나였다. 대망이라는 것은 사물이나 물건이 아니라. 커다란 호수를 말하는 것이었고, 그 호수로 가기 위해서는 이 마을, 하선 포구에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제외하고 다른곳은 전부 험준한 산으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었다.
산행 전 기분좋게 식사를 하려는 찰나 누군가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행색으로 봐서 이 근처를 순찰하던 포졸이었던 모양인데 꽤 다급한 어투였다.
“무슨 일이냐. 지금 무척 기분 좋은 상태라는 말이다.”
기분 좋은 듯 술을 들이키고 있던 남자는 포졸을 보며 짜증난다는 듯 말했지만, 그만둘 기세가 아니었다.
“지금 해안선에 정체 불명의 배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포구에 배가 줄지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니더냐!”
뜨거운 정오의 햇살아래에서 포졸을 향해 멍청한 소리를 낸 것은 술을 마시던 남자와 같이 있던 포졸이었다. 포졸은 다급한 듯 그것의 정체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예의 왜구들이 분명합니다.”
탁---
“왜 지금 말하는 거야. 바보녀석!!”
술잔을 내팽개치고 관모를 고칠 새도 없이 포졸을 걷어차는 남자. 폼새를 보아 아전들 중에 한명인듯했다.
‘꽤나 사명감에 불타는 아전인가보군.’
감동한 소월이 밥 한술을 목구멍에 넘길 때,
“어서 도망갈 차비를 차려라!”
“예. 옮으신 판단입니다.”
퍼 억 --
소월이 던진 국밥이 아전의 뒤통수를 그대로 직격했다.
만족할만한 솜씨라고 감탄하기 전에 아직 한 숟갈 밖에 못 먹은 것을 깨닫자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냐! 이분이 뉘신지 알고 하는 것이냐.”
기절한 상관을 부여잡고 불타오르는 사명감이라기 보다는 황당하다는 표정의 포졸을 보고 한심한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고을 아전이겠지.”
“아 알면서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국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국법 운운하면서 왜구가 쳐들어왔는데 도망을 간단 말이냐! 그것이 네놈 녹봉을 받아 처먹는 자들이 할 짓이란 말이냐!”
포졸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거였나? 일찍 말하지 그랬어. 알겠다 특별히. 도망갈 때 너도 데려가 주도록 하지.”
“그게 아니잖아!”
퍼 억--
나라는 어지러웠다.
아랫것들은 제 살길을 찾아 아부하거나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바빴고, 그보다 낳은 자들은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에 바빴다. 많은 어사들이 수없이 고쳐 잡고, 강력한 국법을 시행하더라도 이런 악법은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녹봉을 받는 이들이 먼저 도망을 가는 세태는 이미 익숙한 듯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정도였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얼마 전부터 애용하던 봉을 꺼내들고,
“젠장.. 이럴 때 어딜 간 거야. 마헌 녀석은...”
소월은 자신이 조사를 보냈다는 걸 어느새 잊고있었다.
왜구들이라면, 당당히 포구 정면을 이용할게 분명했다.
지독하게도 맑았던 하늘이 갑작스레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하긴 비라도 온다면 피냄새도 금방 지워질테니 바쁠껀 없었다.
“당신들은 뭡니까!”
왜구들을 맞이하러 나온 소월은 눈앞의 광경에 흥미가 생겼다. 조금 일찍 배에서 내린 것 뿐인지 아니면, 선봉장으로 마을을 살피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각기 무장을 한 5명의 왜구가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남자는 갓 20세를 넘은 듯 했고, 미남형이라고 볼수는 없지만, 꽤 귀엽게 생겼다고 해도 좋을만했다. 키도 크지 않았기에 어떻게보면 십대의 소년이 어른 복장을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였다.
남자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랐는지 불쾌한 얼굴이었지만 불안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비장의 수라도 있는 게 분명했다.
“크크크..”
자신만만하게 웃는 왜구 한 녀석이 칼을 이리저리 움직여 금새라도 찌를 듯 위협했다.
거의 다 벗은 듯한 행색에, 치마 같은걸 둘러싼 3~40대의 아저씨들로 각기 왜도 한자루 씩을 들고 있었는데, 행색보다는 그들이 들고있는 칼에 더 관심이 갔다. 단순한 왜도는 아니었다. 보통의 왜구라면 이 빠진 왜도를 들고 다는게 보통인데, 이들의 칼은 모두 잘 벼려져 있는게 보통의 왜구가 아니라고 선전이라도 하는 듯 했다.
“보통 왜구들은 아닌 모양이로군.”
“소우다. 우리들은 사무라이다. 자랑스러운 무사다.”
조금은 왜어가 섞인 말이었으나. 의사소통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들의 말을 다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저들의 의지는 간단했다.
“고르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뱉을 말은 아니군요!”
상관 없다는 듯 탐욕이 가득찬 얼굴로 왜도를 들이미는 아저씨들을 보며 남자의 얼굴은 더욱 찌프려졌다.
“파-- 워드, 블레스트 임팩트!”
남자의 힘이 담긴 주문의 영창이 한순간의 틈을 타고 왜구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주문은 방출되자마자 그 힘을 증명했다. 강력한 무언의 힘이 왜구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며 허공에서 내팽개쳐 버렸다.
“겟코.. 크윽.. 뭐냐. 무당인가.”
“노노-- 그렇지 않습니다. 전 이래봬도 유학파라고요. 바른 명칭은 샤먼입니다.”
아직도 입을 놀리는 왜구를 향해 마법을 한방 먹여 완전히 기절 시켜버리며 대답했다.
3.마법사
“마법이로군.”
소월은 알고 있었다. 서양에서 쓰인다는 주술로, 그 근본은 각기 다른 4대력을 원천으로 강력한 힘을 이용한 술법. 그 종류는 수백가지에 이르르며- 응용과 조화에 따라 또 다른 힘으로 발전한다. 라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조차 보기 힘든 것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소월의 어사 연수 때의 동료 중에서도 저런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알고 있었을 뿐, 자신보고 상대하라면 별로 자신 없는 녀석이었다.
그 때 멍하니 동료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있던 왜구 몇이 소월의 사정권으로 들어왔다.
“무 뭐냐..!”
“비겁하다!!”
분명 조선말이지만 안 들린다는 듯 소월은 계속 봉을 휘둘러댔다. 그 보람으로 2명을 손쉽게 처리한 소월은 득의 만만이었다.
왜구들의 배는 모두 30여척. 모두 크지 않은 판목선이지만. 조선의 것보다는 무척 약해긴 항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무임승차까지 허용했는지 무척이나 많은 수가 내려 수를 해아일수 없을 정도였다. 최소 500은 되어보인은 왜구들의 모습에 소월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비겁하다!!”
하지만 소월의 말 역시 그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 수백여명의 왜구들이 포구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곳은 끝장이었다.
“파이어 볼!”
이국의 말이 왜구들의 전진하는 앞에 커다란 화염 폭탄을 만들었다. 당연히 거대한 화염에 겁에 질려 도망가리라고 생각했다. 소월도, 그리고 그 마법을 사용한 남자도.
저벅 저벅..
살이 타는 냄새가 느껴지는 대도, 왜구들은 불길을 지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차가운 기운이 금새 불꽃을 사그라트렸다.
“깔깔깔... 그것도 불꽃이라고 만드는 것이냐. 불꽃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법이지.”
어느새 인가 나타난 사람은 기이하게 큰 키와 태양을 연상케하는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그 복장은 기모노였다. 따로 본다면 아름다움 그 자체였지만, 같이 놓고 보자니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다.
“막을 수 없다. 나의 신념을 너희 따위가 막을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녀의 말대로 남자가 만들었던 것보다 수십배는 커보이는 불꽃이 그녀의 손위에서 넘실거렸다. 크기를 보자니 그 위력이 저절로 동감이 갔다.
“당신은 누구지?”
“글세. 곧 죽을 사람에게 가르쳐 줄만큼 값싸지는 않거든.”
“쳇!”
여자의 동작에 따라 거대한 화염구가 마법을 사용하는 남자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마법의 힘으로 막아보려는 듯 했지만. 막지 못할게 분명했다. 역시나 값싼 것은 아니지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위험해!”
“두고 봐야 알겠지.”
소월은 양팔을 한껏 벌렸다. 양팔을 벌려 온몸으로 불꽃을 맞이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며, 금발의 여인은 한껏 웃어 재꼈다. 이제 남는 것은 재와 후 폭풍뿐이리라. 바보같은 모험을 하다니 이미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퍼어엉---
거대한 불꽃이 넘실였다. 폭팔과 함께 들려온 수진의 단발마가 들려왔다.
왜구들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이와의 동행이다. 이번은 반듯이 승리할 것이 분명하다.
금발의 여인은 그제서야 한사람을 발견했다.
“자.. 이제 나오는게 어떤가. 할멈.”
기모노의 여인의 말이 끝나고 조금의 여유를 두고 느릿느릿 한 노파가 나타났다. 아직도 자욱한 연기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약간 인상은 쓴채였다. 왜구들이 알아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 마을의 토박이인 듯, 멋부리지 않은 소박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러나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무척이나 휜 허리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던 노파는 여인을 노려봤다.
“이런.. 꽤나 훌륭한 인사네요. 기분 나쁘셨나보죠?”
상황판단이 안되는건지 아니면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건지 노파는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만 노파는 그 어느쪽에도 해당 안된다는 듯 미묘한 태도였다.
“불꽃이 그립지 않나? 할멈에게 배운 그 힘이다..”
또 다시 거대한 불꽃이 여인의 손끝에서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모두 끝내버리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끌어모은다.
거대한 호수.
예전엔 소호(小湖)라 불린 아주 작은 연못에 불과했지만, 전대의 왕. 연산군의 어명으로 마을을 삼키고, 조금씩 그 세를 불려 이제는 더 이상 감당하기도 힘들만한 대호(大湖)가 되어버렸다.
남자는 조용히 그 물을 들여다본다. 티 없이 맑은 물.
너무 맑아서인가. 신비하게도 물고기 한 마리. 소금쟁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비켜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붉은색의 잔혼이 남자가 있는 곳을 내리 찍었다. 어느새 그 자리에 남자는 보이지 않았고, 투명한 빛을 발하는 물줄기가 먹이를 찾듯이 솓아 있었다.
촤악--
시원하게 물방울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은빛의 칼날이 자신에게 인사했던 붉은 잔혼에 맞부딪쳤다.
째앵- 하고 쇳소리가 고요한 호수가의 침묵을 깨트린다.
“오랜만이군.”
“나 역시.”
두건이 벗겨지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먼저와 있던 남자는 마헌, 소월의 명령으로 먼저 호수를 조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호수는 아무런 일도 버리지 않았다는 듯 시치미를 때고 있었고, 방심하던 찰나 그 시치미를 끝내고 자신의 진면목을 보였던 것이다.
“사람을 먹는 물은 처음 보는군.”
“사람뿐이 아니야. 살아있는 것은 뭐든 먹어치우지.”
“먹보인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군.”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둘은 과거 백련회의 동료로 서로의 힘에 대해 인정할 정도의 사이였다.
“백 마패를 모시는 건가?”
“마패라니.. 그렇게 말하면 어사님이 섭섭해하지. 백 어사라고 말하라구.”
“큭..”
“하지만 뜻밖이군. 이런 곳에서 백련회의 동료를 만나게 될 줄이야.”
마헌은 자신을 삼키려고 했던 호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체로 말했고, 비도는 그런 그를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벌써 10년이나 되었군.”
거대한 호수는 예전에 호수의 별명인 소망(小望)과는 어울리지 않았는지 이제는 대망(大望)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특이한 욕심을 한껏 품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쿠아아앙!!
엄청난 소리가 금발의 여인에게 직격했다. 물론 그 전에 두손을 내밀어 베리어를 쳤지만 화염구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금발의 여인을 불꽃이 휘감았다.
희희낙락한 노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과연 소월과 수진은 아직 살아있었다. 게다가 소월의 옷이 조금 그을린 것을 제외하고 상처하나 없었다.
“굉장한 힘이지만. 이유도 모른채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밥값을 보상받기 전에 죽을 것 같으냐!”
미묘하게 달랐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둘은 살아있었다.
“어 어떻게..”
헉헉거리며, 불품없게 타고 찢겨진 기모노를 부여잡고 여자가 노려봤다. 분명히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을만한 시간은 안됐다. 수진도 이미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분명 해냈다. 게다가 어떻게 한것인지 훌룡하게 반격까지.
“네놈! 무슨 짓을 한게냐!!”
치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겠다는 듯 한.
“큭큭.. 에레나 말했지 않았느냐. 너는 약하다고.”
“할멈! 무슨 소리야! 난 분명 모든 걸 배웠다. 할멈의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런데 어째서 지는거지? 왜?”
“말했잖느냐. 에레나. 마법은 강하지만. 그보다 강한 자들도 또한 수없이 많다고.”
불쌍하다는 듯한 노파의 말에 에레나의 눈이 치켜떠졌다.
“인정 못해. 있을 리가 없잖아. 이 강대한 힘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뭔가 정식적인 불안이라도 있는 듯 에레나는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영창하시 시작했다.
“호호호..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신만 다시 빼앗는다면 그때는 나 혼자서 상대해주지. 하지만 지금은 내 군대와 싸워야 할거다.”
신을 빼앗는다.
이상한 소리였다. 물건도 아닌 것을 빼앗겠다라는 호언이라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리라. 그러나 에레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렁찬 함성이 마치 해일인양 전면 가득 밀고 올라온다. 우울한 불루빛 하늘아래에서 그에 대비되는 검 붉은 피를 뿌리려 달려드는 왜구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온 악마와 같았다. 그들은 모두 에레나라는 마녀의 주술에 걸려버린 듯 맹목적인 살육의 굶주림에 미쳐있었다.
“거기! 마법을!”
“거기라니 실례에요! 수진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거기라는 무책임한 말은 싫었지만. 수진은 두말없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막지 못할건 자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들에게 그것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에? 수진?”
의외로 여성스러운 이름에 소월은 당했다는 듯 뒤돌아봤지만 수진은 가볍게 무시하고 영창을 시작했다.
괴성에 가까운 함성에 수진의 목소리는 들릴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분명 영창은 계속되고 있었고, 자신은 능력을 사용해 우선은 막아 보인다! 라는 것이었다.
4. 원군
화르륵!
산체에서 마을이나 근방의 소식을 빠르게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등화, 약 12가지의 정보를 분간해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등화가 삽시간에 산체를 향해 전진해온다. 등불 3개. 긴급, 습격, 중요.
어떤식으로 전달한 소식도 이보다 간결하게 위험을 나타나고 있지는 못했다. 과거에도 몇 번 켜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채를 위협할만한 커다란 위협, 그리고 신을 노리는 왜구들의 침입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 병력을 집결시켜라. 백화단과 흑화단을 내보내고, 청화단에게는 총포와 진천뢰의 사용은 허용한다.”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별칭 두더쥐. 특기 화약 만들기인 설지범이었다. 특이한 이름과 성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설은 겨울에 산체의 두목과 남만을 기념하여서, 그리고 지범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라고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산체의 수령 단 한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말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적화단은 어찌 합니까.”
붉은 망토를 두른 사내들중에 대표로 보이는자가 한걸음 걸아나왔다. 그는 자신들만이 출진 명령이 없자. 불만족스러운 듯 두더쥐에게 항의했으나. 두더쥐는 말없이 한 봉우리를 가리켰다.
“너희들은 늘 특급 임무가 최우선이다. 만일 다른 삼화단이 뚫리면, 최후에 신을 죽인다. 어때, 이래도 불만족스러운가?”
“최고입니다. 그 이상의 임무는 없습니다.”
적화단의 사내는 한껏 미소를 머금고 두말없이 자신들의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오히려 다른 삼화단이 부럽다는 듯 그들을 보고 있을 정도였다.
신을 죽인다.
별거 없어보이는 말이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혹은 그것을 어떻게 죽일수 있을것인가. 궁금하기는 모두 매 한가지였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자들은 없었다. 신에 대해 정확히 아는 자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 무서움만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들의 죽음으로 이끄는 것.
“말도 안돼!!”
끈어진 팔뚝을 물끄러미 바로 보던 사무라이 하나가 기이한 표정으로 음울한 표정을 지으며 수진을 바라보았다. 쉴세없이 피 비린내가 진동한다. 그리고 수진의 얼굴은 조금씩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어째서 쓰러지지 않아?”
“그들은 이미 살아있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피의 굶주림.. 죽음에 대한 갈망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노파는 미동도 없이 둘이 쉴새없이 사무라이들과 대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몇 마디씩 거들뿐이었다. 그래도 해결책까지는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덤비는 자에게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마법을 퍼부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까지 하는겁니까. 이 작은 마을에!”
“쯧쯧..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당연히 그 죽음은 모든 것의 목적이니라.”
“말이 안돼 잖아.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하러 태어나는데? 왜 태어나는 건데?”
소월은 자신의 두배만한 사무라이를 쓰러트리고 지친 듯이 그 사무라이의 칼을 잡아 들었다. 소월의 나무 봉은 이미 부러져 그 사무라이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아이야. 세상엔 왜 빛과 어둠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한가지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으리아차! 잔득 힘을 주어 왜도를 휘둘렀으나. 피의 굶주림인지. 죽음의 갈망인지로 이미 사람이 아닌 사무라이는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았다. 손가락이 반쯤 잘라져있었으나. 어디서 힘이 났는지 강하게 부여잡고 자신의 왜도를 높이 치켜세운다.
‘야단 났군.’
두손으로 왜도를 뺄려고 낑낑대고 있는 틈에 어느새 사무라이의 칼이 소월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키에엑--
기쁜듯한 표정이 사무라이의 얼굴에 옅보인다.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이끌어낸다. 피가 자신을 유혹했다.
“거기 까지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한자루의 붉은 창날이, 한자루의 은색 칼날이 각기 사무라이의 팔과 목을 베어버렸고, 곧 바로 춤을 추듯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듯, 아니면 그러기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헥헥.. 더 이상은 못해..”
다행이 두사람의 등장으로 긴장이 끈이 풀린 듯 수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언제 끝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다.
우와와와!
“뭐 뭐지”
“원군이다. 드디어 우룩의 전사들이 나선게지.”
“우룩?”
우룩. 들어본 적 있었다. 과거 조선과 똑같은 이름을 썼던 나라가 있었다. 고대의 왕국은 근방의 십여개의 작은 나라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신비에 쌓였던 나라가 바로 우룩이었다. 그 것은 전설로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았다는 꿈의 나라이기도 했다.
“평등.. 인가?”
생각 못했다는 듯 소월의 말이 이어질 때 쯤 본격적으로 대군과 대군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룩의 전사들이라고 불린 자들은 각기 흰색, 검은색, 청색을 걸치고 있었다.
흰색과 검은 색은 돌격하여, 힘과 힘으로 사무라이들과 맞섰다. 청색의 전사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산 기슭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이 무언가 준비를 하는 듯 더뎌보였다. 소월로서는 그게 대포인 진격뢰를 준비하는 것인지는 몰랐음으로 뭔가 비겁하게 싸우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승부의 결론을 내릴 가장 중요한 이들이었다.
점차 두 무리의 싸움으로 번져나가자 곳곳에서 피의 분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응?”
“생각해봐. 왜구와 산적, 모두 빼앗을려는 자들이잖아.”
“그렇지.”
수진은 당연하다는 듯 동의했다.
“그런데 왜구는 진짜 왜구가 아니라. 왜의 정규군대, 즉 사무라이들이고. 산적들은 산적이지만 빼앗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지키려고 하고 있잖아.”
“정규군? 역시 그래서 다들 왜도를 쓰는 거구나.”
수진도 생각안해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다. 진짜로 빼앗으려고 하는 자들은 진짜 왜구가 아니고, 진짜로 빼앗아야 할 이들은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뭘까..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목숨을 빼앗아 가며, 지키고 빼앗으려고 하려는 건.”
“대망..”
“??”
“소망에는 신이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그래.. 그것은..”
수진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을 할 때쯤, 갑작스럽게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청의의 전사들이 준비했던 무언가에서 거대한 폭음이 내기 시작했다.
퍼어엉!
바로 옆에 대포알이 떨어지며, 수십개의 철과 돌조각이 퍼져나와 주변의 사무라이들이 살점이 하늘까지 치솓았다. 가공할만한 위력의 대포들이 왜구들이 뭉쳐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발포가 되기 시작한것이다.
“제길.. 이번에는 대포인가.”
에레나는 생각 못했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부하들이지만, 최소한 적도 없애줘야만 그 계획도 성공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쓰러지고 있는 것은 거의 자신의 부하들뿐이었다.
노파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한번도 웃어주지 않았으면서 처음보는 아이들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기분 나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에레나는 신경질 적으로 품안에 갈무리해두었던 작은 두르마기를 꺼내들었다.
보기만 해도 섬뜻한 몰꼴의 귀신들이 백귀야행을 펼치고 있었다. 시체를 먹어치우고, 시체를 뒤집어 쓴 체로 춤과 노래를 부르는 귀신들의 모습은 과거 신라의 선승이 그렸다는 귀축도였다
“자 힘을 보여라.”
선승의 그림. 그 의도는 선을 행하여, 지옥을 면하라는 일종의 경고의 표시였지만. 에레나에서는 이것이 훌룡한 지옥의 구현을 위한 매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을 펼치고 허공에 띄우며, 금지된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점차 줄어나가는 왜구들을 보며, 백화단과 흑화단의 전사들은 점점 활기를 되찾아 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갈 까마귀무리들이 마을의 지붕에 앉아 즐겁게 피의 향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죽어있는 자신을 이해 못하고 끈임 없이 눈을 굴리는 사무라이의 시체가 기분 나쁘게 전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쓰윽.--
또 한명의 사무라이를 베어 쓰러트리고 난 후에 비도는 붉은 장창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검붉은 피를 가볍게 씻어내고 창을 어깨에 둘렀다.
잠시의 여유를 살려 헉헉거리는 마헌의 옆으로와 그가 쓰러트린 왜구를 살폈다. 과거에 여러본 구경해본적 있는 솜씨. 여전히 녹슬지 않아있었다.
“이거. 죽지 않았군. 역시 과거 백련회의 수장다운 솜씨야.”
“.. 네 주변을 보고하는 말이냐.. 실례라고. 그런 식으로 자랑하는 건 말이지.”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마헌의 말마따라 비도의 주변에는 그 세배정도의 사무라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방식의 차이야. 방식의 차이.”
손을 휙휙 저어보지만 확실히 차이는 심했다.
눈처럼 새하얀 흰 야행복에 외국에서 들여온 듯한 희색이 코트를 입은 채로 시체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남자는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과연.. 모든 혈도의 봉쇄인가요?”
“당신 어떻게 기척도 없이..”
기척도 없이 자신의 등에서 유유히 사무라이들을 관찰하고 있는 남자의 등장에 마헌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상관, 어사를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되버리면 임무는 이미 반 이상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실례했군요. 전 한 설이라고 합니다. 현재 우룩의 수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도움이 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서 설이 오빠?”
“어라? 수 수진 아씨?”
한천 마을에서의 헤어짐 이후 의외의 장소에서 한설과 수진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기쁨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반이 쓰러진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에레나의 주술은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5.봉기
숨을 한껏 들이마셔본다.
마을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었다. 흔히 말하는 봉기가 이 작은 마을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분명치 않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분명치 않았으며, 과연 무엇을 위한 봉기인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불안.
굉이와 곡갱이를 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부시고, 관청까지 쳐들어가는 그들의 형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라져 가는 것들..
아마 3년전이었을 것이다.
갑돌씨네 암탉한마리가 없어진 것은 이 작은 마을에서 꽤나 큰 일이었다. 관청에서도 포졸 2명을 보내왔을 정도였으니, 이 마을이 얼마나 평온한 마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은 다른 곳에서 더 커지고 있었다.
포졸들이 실종되고, 시간을 두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없어져갔다.
커다란 못, 대망의 마을 만천이 점차 죽어가고 있었다. 원인도 모른 체로.
“한설.. 이제 무슨 일이야!”
경황없이 공포 어린 모습의 수진을 보며 한설은 대감집도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우두머리 없는 봉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도 집단 히스테리같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명확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무언가 선을 넘어버리는 일이 발생하면, 어느 쪽으로도 좋지 못했다.
“수진 아씨. 어서..”
수진을 대리고 두 눈에 공포가 어렸으면서도 그 때문에 더 광기가 넘치는 사람들을 헤치고 저택에 도착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 전혀 없었다.
“여긴 괸찮나봐.”
피..
한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안방으로 들이닥쳤다. 안방의 문에는 피가 뿌려져 있었다.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수진이었다.
“어 엄마! 엄마!”
탁! 문이 얼리는 순간 한설은 수진은 잡아 품에 안았다. 하지만 못봤을리 없다.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있는 방안에서 최 대감은 흐느끼고 있었다.
힘없이 팔을 내려트리고 있는 것은 안방마님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쓰러진 몇몇 하인들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 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설마 대감님께서?”
“그러나 이미 늦었지. 몇 명을 죽인다고 해도, 돌아오지 못하겠지.”
한설은 수진을 놓고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인들을 죽였을 무기인 칼을 집어들었다. 아직도 피가 굳지 않은 그 칼을 들고 한설은 최대감을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대감.”
“무 무슨.. 크윽..”
“꺄아..”
어머니의 죽음으로 패닉상태였던 수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최대감은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팔에 벤 칼에 시선을 두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감님이라 해도 살인의 죄는 무겁습니다.”
“자네가 짊어지겠다는 건가. 이건은 그 누구의 잘못도..”
“누구든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관청에서는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최 대감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붉게 물든 방안과 쓰러진 3명의 하인들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어찌 할 셈인가. 저 많은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 셈인가.”
“산으로 갈 것입니다.”
“산적이 되겠다는 건가.”
“뜻을 세울겁니다.”
한설은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밖으로 사라졌다.
온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몇일 후 나라에서 보낸 수십여명의 포졸이 들어 닥쳤을 땐 최대감과 그의 어린 딸 수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최대감은 끝내 마을 사람들의 행방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나라에서는 최대감에게 봉기를 해산시킨 공로로 정 6품을 주고, 한성에 새로운 집과 땅을 주었다.
그것은 조선 10대조의 왕 연산군 때의 일이었다.Episode 1. 대망-上
5.백귀야행
사무라이 시체위에 앉은 갈 까마귀 한 마리가 용감하게 시체가 죽어있는지 살피기 위해 부리고 사무라이의 볼을 쪼았다.
반응 없음.
까악! 기쁜 듯이 본격적인 식사 전에 동료를 부르고 동료들이 보는 가운데 본격적인 식사를 하려고 고개를 높이 치켜올렸다. 그러나 시간대가 좋지 않았다. 에레나의 주술이 지금막 펼쳐졌던 것이다.
까아아----
갑작스럽게 손이 솓아 올라와 자신의 볼을 쪼았던 까마귀의 목을 조였다. 기척 같은 것도 일절 없었다. 게다가 손은.. 그에 연결되어 있어야할 팔도 없었다. 그저 손만이 홀로 자신을 우습게 본 검은 까마귀를 응징할 뿐이었다.
퍼덕 퍼덕
괴로운 듯 두어번 날개를 퍼덕였지만. 이미 목이 꺽였고, 더 이상 힘을 읽고 쓰러졌다.
“크르르..”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린다. 의아한 듯 자신의 목을 살펴보니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하지만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오랜만에 얻은 자신의 육체를 살펴본다. 목에 구멍이 뚫렸고, 팔이 없을 뿐. 훌륭한 신체였다.
“센네마노의 카늘이로구...”
바람이 세는 통에 정확히 발음할 수는 없지만, 대충 천년만은 하늘이라는 뜻인 듯 했다. 그리고 똑 같을 말로 천년만의 하늘을 기쁜 듯 바라보는 존재는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일어서라.. 천년전의 고통을 기억해라..”
나라를 잃은 자들..
천년전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 자신의 죽음을 이해 못하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깨닫지 못한 자들이 지금 부활하고 있었다. 천년전의 전사들이 지금 사무라이들의 시체를 매체로 부활하고 있었다.
“역시나 신비롭구나. 백귀야행이여...크하하하하”
에레나의 얼굴에는 황홀에 가까운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에 와서 자신을 막을 만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죽여도죽여도.. 그 육체가 소멸하기 전까지 그들은 움직일 것이다. 죽음의 갈망보다도.. 피의 굶주림보다도 더한 것. 그것은 삶의 애착이었다.
좀더 수진과의 만남을 뜻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또 다른 변수로 인해 전장은 변화하고 있었다. 많은 수의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고, 처음에는 잘싸웠던 우룩의 전사들도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청화단이 포격을 중지했다.
“왜 포격을 중지한 거죠? 저들을 막기 위해서는 대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새로 계발한 포탄을 준비중입니다.”
소월은 멍해졌다. 이 정도로 많은 화약을 본것으로도 놀라운데 새로 계발한 포탄이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아쉽지만.. 백귀야행을 딱히 막을 방법이 없어.”
한설의 말에 모두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대 규모의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별것 아닌 듯 대수럽지 않은 말투로 소월이 손을 들었다.
“뭐지요.”
“에레나라는 사람이 노리는 신이라는 것. 정체가 뭐지?”
“소월님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은 왜..”
소월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에레나가 노리는건 신이 아닐거야.”
“신이 아니라면 왜 저 정도 대군을 이끌고 왔을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마도..”
소월은 노파를 주시했으나. 곧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좀 기다려 볼까?”
“무슨 소리를 할려고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나. 자 기대들 하라고. 곧 폭죽놀이가 시작된다.”
우아아아!!
거대한 외침이 작은 포구를 뒤흔든다. 생기를 잃은 시체들의 눈이 오히려 밝게 빛난다. 그들의 검에 비친 달빛이 수백개의 보석처럼 느껴진다.
어둠은 모두들의 시아를 좁혀놓았고, 죽은 자들은 천리안이라도 되는 듯 거리낌없이 앞으로앞으로 진격해 나왔다.
“말도 안돼!”
절망에 찬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진짜 죽는것과는 다르다. 왜 수련을 했는가. 바로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백화단의 단원 하나가 지친 듯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감상 따위는 곧 바로 잊어버린다.
“개 자식들!!”
육두문자를 사용하지만, 몸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달려나가는 동료를 다른 단원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인양 눈으로 쫓아보나 헛짓이었다. 예상대로 무표정한 얼굴의 사무라이 하나가 앞에 달려오는 흰 옷의 사내를 향해 검을 내려 찍는다.
“크아아아!!”
어디서 힘이 났는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잽싸게 몸을 튼 백화단 단원은 그대로 검을 긋는다. 손에는 베는 느낌을 느끼며 백화단 단원의 얼굴엔 희열이 나타났다.
죽은 피가 허공을 향해 분수처럼 피어올랐고, 그 장면을 본 다른 단원들은 눈을 크게 떴다.
신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언덕에서 수십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꽃을 품었다. 신호에 맞춰 산채의 사람들은 모두 후퇴를 하기 시작했고, 영문을 모른체. 진격 진격을 연발하던 시체들은 자신들을 향해오는 포탄을 인식하지 못했다.
어둠을 종식시키려는 듯 강한 섬광, 그리고 모든 것을 태우는 듯 오히려 신성한 탄 내음, 그리고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육체의 소멸을 주정하려는 괴성..
“조심해! 모두 몸을 숙여!”
“1분간 숨을 멈춰! 폐가 타서 죽고 싶지 않으면!”
강력한 돌풍이 하선 포구를 에레나는 불결하다는 듯 어린아이 키 만한 부채를 들고 그 폭발을 지켜볼 뿐이었다. 백귀야행의 수는 이제 끝났지만, 체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신을 빼앗는 것. 스스로 괸찮다고 안심 시킨다.
“불꽃놀이라.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는군. 그러나.. 가장 효율 있는 거였을까나.”
“에레나님 어찌 할까요.”
소동 하나가 묻자 에레나는 고개를 젖는다.
“우룩의 바보들은 포기 할 줄을 모르는구나. 하지만 방법은 많으니 좀더 기다려보자.”
에레나의 얼굴에 근심이 비친다. 불꽃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는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지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신을 빼앗아야한다. 왜의 부흥을 위해서도. 분란된 나라를.. 서로를 죽이고, 정의가 없이 혼란된 왜의 정의를 찾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신이 필요했다.
“할멈 이번에도 내가 졌어.”
“에레나. 너는 그 섬나라가 좋은게나?”
“할멈이 상관할 바 아니야.”
“다시 이곳에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말도 안된다는 듯 에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불꽃은 쉽사리 사그러 들지 않았다. 거기에 들어간 화약만 해도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은 왜국이야. 그리고 그들에게는 신이 필요해. 무언가 중심이 필요하지. 붉은 태양 같은 신이 필요하단 말이야.”
“... 왜 네가 그 태양이 되려하지 않느냐.”
밤은 침묵에 대해 관대했다. 승리를 두고 기뻐하는 우룩의 전사들의 모습을 보며 에레나의 얼굴은 잔득 찌푸려졌다. 노파는 그런 에레나의 손을 잡았다.
“네가 태양이 되거라. 누군가 해야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네가 하거라.”
“무 무슨 소리야. 말도 안되는게 분명하잖아.”
“신이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거니까. 네 마음에도 꼭 있을거다.”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소리를 하니까 모두 떠나는 거야. 나도.. 화응도.. 당신은 훌룡한 스승이지만.. 부모로서는 최악이야. 세상에 그게 할 소리야?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게 분명하잖아.”
에레나는 시종들을 끌고 그대로 배에 몸을 싫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없었다. 올때와는 달리 3척의 배만이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별 소득없이 해안가의 전투는 이렇게 끝나 버렸다.
“할멈..”
“들었는가?”
“딸 이었던 거구나.”
소월은 이상하다는 듯 노파를 바라봤다. 노파는 담담하게 딸과의 이별을 맞고 있었다. 분명 몇 년만의 만남인게 분명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어.”
“..?”
“할멈. 당신은 틀렸어. 에레나는 신을 찾으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어. 에레나라는 사람 단지 그리웠던 거 아니야?”
노파가 소월의 얼굴을 쳐다봤다. 몰랐다는 듯 생각조차.. 못했다는 듯.
“나는 처음에 느꼈어. 신을 찾기보다는 그리움을 찾으려고 왔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굴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럴 만한 사람은 없었지. 어쩌면 한설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꽤 미남... 아.. 흠흠.. 그러니까. 에레나는 단지 그리웠던걸 꺼야. 신을 찾는 다는 명목 하에 당신을 만나러 온걸 꺼야. 천여년전의 유물을.. 찾는 다는 훌룡한 명분하에 어머니라는 그리움을 찾아 온걸 거야.”
“앗.. 그렇다면 할머니 외국 사람과 결혼한거에요?”
“이봐 이 상황에서 왜 그런말이 나오는데.”
노파는 소매로 눈가를 매만졌으나. 눈물이 번지는걸 막을수는 없었다. 이미 어머니라고 말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사실은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는거였다.
“할머니.”
“불꽃 때문에 눈이 아프구나.”
불꽃은 아직도 사그러들지 않았으나 이미 백,흑화단은 동료들의 시체를 수숩해 산채로 사라졌고, 단지 남은 불길을 잡기 위한 청화단만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한설과 수진은 오랜만의 재회여서 서먹서먹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마지막 불씨가 꺼지며, 연기는 하늘로 하늘로 올라갔다.
흔들거리며, 연기는 점차 높이 올라갔으나. 결국엔 어둠에 뭍에서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맑아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 하늘에서조차도 사라진 연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영겁의 하늘에 한낱 인간의 역사는 그런 연기와 같은지도 몰랐다.
밤하늘은 억겹의 무궁함을 자랑한다. 무언가를 갈취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을 비웃듯 숨이 탁 막힐 듯이 늘 그곳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곧 새벽이 올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진 해안에는 끈임 없이 파도만이 일렁였다.
(END)
12시일줄이야 ㅡ.ㅜ... 후회 막심입니다.
준비성없는것이 이리 한이 될줄이야.
사실은 한 제시어에 한가지씩 상하로 이어지는 약간 긴 단편을 준비중이었는데. 생각치도 않게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려서 엉겹결에 부분만 갖대 묵어버렸습니다. 시간안에 무언가를 한다! 라는것은 스스로도 즐거운 일이지요. 그럼 즐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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