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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본 뜻: 이 말은 본래 불교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뜻하는 '중생(衆生)'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두 갈래로 그 의미가 분화되었다. 그 하나가 '중생(衆生)'으로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해탈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만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는 '중생'의 소리가 '즘->짐승'으로 변하면서 사람을 제외한 동물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바뀐 뜻: 본래 '중생'이라는 한자어에서 나온 이 말은, 오늘날 사람을 제외한 날짐승 · 길짐승을 통틀어 일컫는 '짐승'이라는 우리 말로 귀화되었다
출처:
p. 566,
이재운 ·박숙희 편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1000가지』(3판, 2008), 예담
한자권 불교 용어 중생에서 시작되어 우리말 음차로 즘생-짐승이 되었다는 저 설명이야 어지간한 이들은 알고 있지만
나는 불교 영향을 조금 받아서인지 짐승이라는 말에서 즘생이라는 음과 불교의 윤회설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즘생은 이번 세상을 사는 모든 생명들. 사실은 본래 불가에서 가리키는 중생(인간의 몸을 받아 타고난 생명들 뿐 아니라 다른 모습을 받아 태어나 윤회의 업보를 끊지 못하는 모든 생명들). 어원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렇다. 토양을 딛고 서지 않은 좁은 문(전문성)은 대개 어떤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즘생에서 즘이라는 음이 금번 세상이나 이 번 삶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내 생각이 어원학자들이 근거를 들어 증명해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윤회사상과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다는 후천적 지식을 토대로 내가 둘을 짝지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뭐 내가 지금 끄적거린 어느 게 먼저냐는 이 프로세스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즘생(들)아"라고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대강 업을 벗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아 그런 뜻이다.
물론 협의의 짐승과 광의의 중생이라는 의미가 섞여 있다. 나도 그 중에 하나라는 뜻과 더불어.
적어도 욕은 아니란 소리다.
농담으로 내가 저 개인어를 썼을 때 상대가 편치 않은 심리적 상황에 놓여 있다면 오해를 살 여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서로의 개인어를 상대가 그리고 집단으로서의 상대가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개인의 그 개인어를 풀어 설명할 여지를 주는 게 거시기 뭐냐 문화나 토양의 수준이다. 그 여지, 여백이 없으면
대개 탈 난다.
세상은 내 청춘 시절과는 많이 변했다.
세대차이는 계속 반복되는 셈이다. 공통 분모가 있으면서도 항상 일부는 다른 양태로.
나이들수록 많이 버리고 그 중에서 공통 분모만을 취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담 저기서 공통 분모는 광의의 중생일까? 협의의 짐승일까?
공통 분모는 작을 테니 짐승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있다.
꼭.
공통 분모는 흐릿하고 성기다.
불가에서 그리도 버리라고 해쌓는 분별지심은 슬쩍 각도를 바꾸면 공자의 말(이라고 하는데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랑 흡사하다.
나이들수록 흐릿해진다. 확신은 갈수록 줄어든다. 그렇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에서 거론하는 상수, 정확한 값은 아직 찾지 못했으나 분명히 그 범위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답이 들어있다는 것은 분명한 범위의 수. 그게 흐릿하고 성긴 공통분모이고 늙은이들의 현명함이다.
어쩌면 그게 생물종 그리고 인간 개개인의 다양성과 맥이 닿을른지 모른다.
그 다양성이 개체의 고유성을 낳는다. 다양성이 없이는 고유함이 없다.
고유함은 곧 다양성인 것이다.
어쩌면 원래 고유했던 존재가 세상을 살며(발달을 거치며) 고유함을 상실하고 공포라는 회로가 처음으로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자신이 언제 느꼈는지 그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재구성해내고 그걸 들여다볼 수 있다면 고유함을 회복할 수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척 어리거나 걸음마도 못한 때, 아니면 그 이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혹자는 불확정성의 원리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할 것이다.
맞다.
내가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느냐고?
그렇지 않다. 대충 어떤 양상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알 뿐이지 수식으로 표현된 것 보고 그걸 이해하지는 못한다.
또 혹자는 크리스티의 소설 'Elephants can remeber'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거기 소설 속 노인네들은 정답도 전체도 모르지만 일부-특히 자신이 직접 접한 것-는 정확히 알고 있다. 수사하면서 문제를 풀면서 답은 찾아가는 것이지 원래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우리네 인생도. 전체 그림을 완전히 바꾸어 놓지는 않으나 방향을 혹은 적잖은 일부를 바꾸어놓는, 노인네들의 작지만 정확한 기억이나 지식이 있다. 인간이 쓰는 도구인 '재현'은 저 작지만 정확한 지식이나 경험을 포착해낼 수 없다. 왜 저 작지만 정확한 지식이 중요한가 하면 항상 그런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닌 재현해 낸 근거를 들어 전체를 뒤엎어버려리는 욕심을 부리는 이들. 주로 상승욕구에 시달리는 이들이 그렇다. 완벽하지 못한 게 인간이고 자신도 인간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주장한 내용 중 저 작은 부분이 사실과 실제로 배치된다는 작은 오류 때문에, 아니 그 작은 오류가 낳은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하여 무너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전체 그림을 보지도 못하면서 작은 조각으로 전체를뒤엎어버리려는 사람들에게 부화뇌동하여 힘을 실어주는 많은 사람들. 불행한 일이나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그 모습을 보인다. 세월이 흘러 그 잘못을 인정하는 정도만 해도 이미 괜찮은 사람 축에 속하는 게 우리네 세상이다. 혹성탈출에서 반쯤 잠긴 자유 여신상을 보며 '이 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어' 통곡하는 찰톤 헤스턴처럼 우리는 발달사에서 유체 시절에 부모를 그렇게 배신한다. 부모 되어 자신의 그 모습을 깨닫는 것만 해도 괜찮다.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대개는 수위와 빈도를 달리하여 유체 시절에 그 실수를 저지른다. 인간 남녀의 갈등/자식부모 관계의 갈등도 적잖은 부분 저 얼개를 벗어나지 못한다. 저 오류, 그리고 저 오류를 이용하는 자들, 이용하는 자들에게 당하고서도 그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고 귀가하지 못하는 이산자들 -이런 이산자는 여성이 더 많고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독한 착취의 대상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그 작은 실수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며 들어오면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안전한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머리로만 알지 행동에 옮기는 비율이 낮다. 못 났고 미워도 같이 부대끼며 살아줄 이들인데- 이 현세에 지옥을 불러낸다
///////////그 이산자들의 아픔을 귀신처럼 알아내는 이들이 있다. 알아보는 이들 역시 갈린다. 이산자들을 돕는 이들과 이산자들의 정신과 몸을 즐기는 이들. 그들에게 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그 작은 실수를 인정하고 동류들 품으로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무척 힘든 일이다. 최초의 한 발을 뗄 때까지, 그 임계점에 다다를 때까지의 고통. 하지만 임계점에 다다르지 않으면 이산자들에게 현세는 계속 지옥이다. 한 발을 떼고 복수를 하시라 :)
어쩌면 즘생들 세상에서 복수는 필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생이자 인간이라면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다. 복수의 대상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당사자에게로 한정하는 일. 그 주변이나 전혀 관계 없는 불특정 다수이자 자신보다도 약자인 이들에게도 향하지 않는 것. 나는 그 정도면 현세 인간계 도덕에 부합한다고 본다. 직위나 신분, 재산, 육체점 힘에서 우위에 있더라도 올바른 복수의 대상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제대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힘든 일이다. 대개는 가해자 역시 피해자 주변을 흔들어 피해를 입혔을 것이고 대개 교사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집안 유체들이나 부하를 활용했을 테니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 아니겠는가.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내 보기에 현실에서 그 감정을 극복할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보인다. 동해보복의 그 지독한 쾌감이란. 주변을 흔들어 그 개체를 궁지로 모는 일, 실은 그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 놈의 상식을 갖춘 성체라면 아주 어렵지만 그 감정을 극복하고 해낼 수 있을른지 모른다. 한 번 뿐인 인생, 어쩌면 좋은 짓도 나쁜 짓도 다 해보고 떠나는 게 나을까? 그래도 가해자의 아이들과 배우자, 부모, 주변의 똘마니들에겐 교사죄를 저지른 이들과 같은 수준의 처벌을 가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가해자는 대개 '나는 해도 되지만 너희들은 하면 안 된다'는 논리에 빠져 있다. 아니 무의식 속에 인간 누구나 저 논리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이는 아주 많지는 않다. 자신도 그 동해보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동해보복은 저 논리를 '니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로 바꾸는 것이다. ... ... 그리고 한 가지 가해자 뇌리엔 언제나 보복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튼튼한 성을 쌓고 주변을 인의 장막으로 둘러싸게 마련이다. 나는 가해자들이 저 두 겹의 장벽을 쌓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다....일단 여기서 중지.....//////////////////
나는 저 오류를 막아섰던 자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아니 그들이 지키려 했던 이들에게 배척당하고 상처받는 모습이 더 흔한 풍경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아니면 그들이 가고 난 후에야 대개 사람들은 후회한다. 그렇담 동류들에게 그렇게 당하지 않는 선에서 자원을 활용하여 저 오류를 이용하는 자들에게 대응하여 수위를 낮추거나 지연시키는 게 나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또 혹자는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도박장 룰렛 게임이다. 딜러가? 아니면 돈을 건 이가? 주사위를 돌리면 주사위를 한참을 숫자가 적힌 저 작은 칸막이들을 사람의 감각으로 보기에 일정한 방향 없이 이리저리 맴돌다가 이윽고 동력이 다하면 어느 숫자가 적힌 칸에 들어가 멈춘다. 맴도는 칸막이 하나하나 그리고 맴도는 과정이 말하자면 상수이다. 한 갈등 상황(룰렛 게임 한 판)에서 두려움과 오해가 풀리면 순간(주사위가 멈추는 순간) 상수 범위에 들어있는 값 하나가 잠정적,한시적(유한한 인간과 달리 시간은 무한하다)으로 그 상황의 답이 된다. 한 동안 시간이 흘러 다시 룰렛이 돌면 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상수 안에서 또 한 번 답이 결정된다....계속 그렇게 리로드되는 것이다. 그걸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의 태양이 떠오르거나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으로 비유함직도 하다. 내가 보기에 파국을 낳지 않을, 상수에 해당하는 값 범위를 찾아 내는 것 그게 '어른된' 자의 지식이다. 무언가를 안다면 확신하지 못한다. 아니 확신하되 저 상수 범위 내에서 확신하는 것이다. 인간 개체가에게 전지함이란 불가능이다. 그것은 신이라는 개념의 영역이고 인간만 놓고 보자면 전지함은 곧 인간 개체 모두의 지식(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산물)이 한 시점에 합쳐진 순간(특이점, singularity 정도로 해두자. 나도 특이점 개념 잘 모른다.대충 그런갑다 정도지)에나 가능한 노릇이다.
[전문가들의 함정은 그런 것이다. 전공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를 나처럼 대충, 사실은 그도 아니고 음가로만 알고 있으며 실제 해보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주변 동료들이 공간 내에서 그런 말 쓰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읊어내는 지식들이 실은 전문가의 행동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문제는 그렇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 말이 전문가지 실은 세상 누구나 그 오류에 빠져 남들의 도움을 일상적으로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잘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그런 점에서 불가 탱화에 나오는 긴 수저로 상대 밥을 떠먹여 주는 우화는 참 의미가 깊다. 클클. 언제나처럼 다른 종교나 문화에도 저 탱화의 닮은꼴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서로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이라고 우겨댄다. 서로 모방하고 교류했으면서도. 그런 모습에 지친 이들은 힘들어하며 공통분모를 찾아나선다.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겠으나 여기서 확 씨족사회, 집성촌, 일부일처제, 핏줄 잇기로 건너 뛰어도 맥이 닿는다. 설명할 재주는 없고 여튼 그렇다. 남의 떡은 항상 커 보인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제 손에 쥔 떡이 더 클 때가 많다.]
나는 서구나 법조계의 작문에서 흔히 보이는 두괄식이 이른바 권력을 행사하는데 무척이나 유리하다는 걸 알지만 그리 못한다. 상황어인 우리말에 포로로 잡혀 있는 몸이라서.
이거다 확정해 놓고 왜 이거냐 풀어내는 것보다는
마구 늘어놓고 자 이제 헝클어진 이걸 풀어서 어떤 답을 찾아내 보자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다.
너는 어떤 걸 조금 알고 나는 어떤 걸 조금 아니 합쳐서 조각맞추기 놀이를 해보자 이런 과정이 문제 해결 그리고 그 결과값인 되도록 많은 당사자들에게 이로운 결실을 낳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곧잘 즉효를 원한다. 쌈빡하고 멋지다. 확신에 찬 그 표정과 근육.
현란하게 묘사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논의의 편의를 위한 두괄식, 딴 것은 젖혀두고 이것이 중요하니 이것을 중점으로 논의해보며 답을 찾아보자라는 방식의 두괄식이 아닌 답은 무조건 이거다라는 류의 두괄식에서 권력(절대적 확신과 무오류설, 호가호위, 한화 회장 김승현류의 교사죄와 대리전)의 내음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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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잡글을 올리느냐 하면 이건 모두들 역사책에서 접했을 소도, 정확히는 정신적인 소도라는 기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털어내야 스스로도 타인에게도 위험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 내 짧은 식견에 얼마나 될 지는 모르지만 나같은 부류는 타인에게 해를 가할 수학적 확률이 지극히 낮다. 물욕, 신분상승욕, 성욕을 떠나 인간계만 놓고 봐서 가장 가치가 낮은 인간이 지닌 속성은 그 욕구 대상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이는 비열함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끈을 놓지 않으면 적어도 그 비열함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게 좋지만 극한 상황에 처해 타인에게 해를 가할 확률이 높은 이들을 나는 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평범한 악, 많은 이들은 그게 결코 자신의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온실 속의 화초들. 가까운 주변과 가족은 보고 챙기지만 속한 큰 생태계가 깨지면 그 자신조차 사라진다는 순망치한 때문에 최소한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이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인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극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현명함과 타인에게 극한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는 자비심을 갖추어 극한 상황 자체에 빠지지 않는 게 상선이지만. 당신은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지만 간혹 세상 사람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어쩌면 생명으로서 편한 선택은 그 어리석은 이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남의 일은 그냥 두어두는 것이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쩝. 난 가르쳐본 적 없다. 단지 적어내려갈 뿐.
첨언: 이런 류의 글이 저속하거나 미풍양속에 위배되거나 불쾌하거나 젊은 층에게 해가 되고 반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면 글 내림. 뭐 신변잡기니까. 쩝. 그리고 난 큰 방향을 놓고 봤을 때 여성 혐오주의자라거나 남의 허물이나 약함을 악용하는 부류는 아니다. 단지 현실은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부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