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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30년이 지난 지금 한중관계가 총체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유동적인 국제질서 하에서 국가 간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추구하는 가치와 꿈꾸는 미래가 판이하고 국력의 차이가 확대되면 관계 변화는 불가피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마음마저 달라진다.
최근의 한중관계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변화를 넘어 과도한 이상 징후를 보인다. 마치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라도 되는 듯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야당 대표와 주한 중국 대사의 비외교적 회동 장면과 정제되지 않은 언사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듣기만 해도 불쾌한 위안스카이, 삼전도 같은 단어가 난무하고 어떤 여당 간부는 야당 대표가 국민의 자존심을 짜장면 한 그릇과 바꿨다는 웃지 못할 비유까지 했다. 이 모두가 국제질서의 대격변기에 한중관계의 올바른 발전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에 대한 얄팍한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들은 이러한 성숙하지 못한 모습과 저급한 정치싸움에 더 자존심이 상한다.
사실 한중관계의 변화는 시진핑 주석이 미국과의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주장하고 중화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중국의 꿈(中國夢)’을 열창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특히 헌법까지 수정하며 무리하게 추진된 시진핑의 3연임을 뒷받침하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권력 집중과 강성 외교는 결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격화시켰고 소위 ‘안미경중(安美經中)’에 안주했던 한국의 입지를 기초부터 흔들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가치·이념적 대립과 이를 자양분삼아 국가와 민족의 미래보다는 편협한 정치파벌의 이익에 몰두하는 국내 정치과정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전협정 체결 70년을 넘기면서도 평화보다는 전쟁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한반도의 안타까운 현실에서 중국과 미국이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만약 하나만의 선택 혹은 일방에 대한 절대적인 경사를 주장한다면 이는 분명 무모하거나 무지한 것이다. 하늘을 찌르는 애국심도 한반도 주변 정세의 객관적 진단과 합당한 처방이 담보되지 않으면 한 시기의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지난 30여 년의 한중관계를 살펴보고 상호 인식, 대중 정책, 외교 역량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대응책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상호인식의 악순환,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현 단계 한중관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양국 간의 상호 인식이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중간의 비대칭성이 확대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에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는 한중관계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중국인이 바라보는 한국과 한국인이 바라보는 중국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치·안보·이념적 갈등이 비정치, 비정부 분야 전반으로 확산되어 점차 고착화되는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급상승하는 것은 미래의 한중관계 관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은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이념에 대한 이질감, 동북공정 등 역사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자기중심적 태도, 2016년 사드 사태 이후 중국의 각종 제재와 압박, 북한의 핵 개발과 각종 도발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 등에 크게 기인한다. 또한 장기 집권 구도를 구축한 시진핑이 ‘중국식’ 체제·이념과 그들만의 발전 방식에 기반한 강국 건설(强國夢)에 매진하고 그로 인해 미국과 중국의 전방위적 패권 경쟁이 지속되는 한 한국의 입지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절 불가한 한중관계의 복합적 현실을 직시하고 상호인식의 악순환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 위해 첫째, 수교 이후 양적 확장에 주력했던 민간교류 과정을 면밀하게 점검하고 재정비해야 한다. 하나의 예로 민간교류의 대표적 통로인 거대한 규모의 관광교류가 양국 국민의 상호이해 증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부정적인 기능이 수반되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객관적 검토가 필요하다. 사드 사태 이후 아직 본격적인 상호관광이 재개되지 않은 시점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정책을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민간교류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중국인 유학생 유치 정책 재정비도 매우 시급하다. 특히 유학생 문제는 양국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의 주요 교류 통로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동안 중국과의 유학생 교류는 한중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부정적 상호인식의 확산 요인으로 작용했다. 많은 중국인 유학생이 한국에서의 유학을 자기 성장에 유익했던 과정으로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최근 국내의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로 많은 대학이 학생 충원에 애로를 겪으면서 교내 재정 확충을 위한 중국인 유학생 모집에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교육, 생활 등에 대한 관리와 지원이 부실할 경우 한중관계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출입국 관리, 학업, 취업 등 관련 정책 전반에 대한 정부와 대학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둘째, 언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부분도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그동안 한중관계의 비약적인 발전과 이해증진에 기여한 언론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환경의 급격한 변화, 국내 정치와 결부된 일부 언론매체의 이념적 편향성,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에 편승한 무분별한 과장 보도 등이 양국민의 상호인식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일부 유튜버의 무분별한 비방, 왜곡, 선동 위주의 방송은 한중 간 상호인식 악화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국내의 주요 언론 매체는 중국 주재 특파원, 각종 현장 취재 등을 통해 축적한 자료와 우수한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언론계의 이러한 자원을 얼마나 적절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양국민의 상호 인식 변화, 더 나아가 한중관계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대중 정책의 국내 정치화를 경계해야 한다
1992년 수교 이후 역대 정부가 추진한 대중 정책의 공통점은 전임 정부와 구별되는 차별화된 정책을 통해 보다 격상된 관계 발전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중 정책 역시 외형적으로는 기존 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강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임 정부와 차별화된 정책을 통해 상호존중, 상호신뢰에 기반한 보다 ‘당당한’ 한중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다만 미·중 패권 경쟁으로 가치 공유와 안보 동맹이 강조되는 국제 환경, 강경 보수화된 대북 인식과 정책이 대중 정책에 너무 자극적으로 반영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대 정부의 대중 정책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전임 정부의 정책을 수정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교 30년이 지난 지금 긍정적인 계승 발전보다는 정체, 악화, 대립의 단계에 처해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를 시정할 방안은 있는가?
첫째, 정치·경제·안보적 현실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국민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대중 정책의 기조와 원칙, 추진 범위와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각 정부가 시도하는 차별화된 정책도 이 범위 내에서 탄력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한 기본 전제다.
둘째, 국내 정치를 고려한 5년 시효의 단기적, 파편적 정책이 반복적으로 양산되고 차기 정권에서 폐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정권 차원의 정무적 판단에 함몰되어 내실보다는 외형, 장기적 비전보다는 임기 내의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는 자기 희망적 대중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이러한 교훈을 무겁게 인식하고 자신만의 예외적 성과를 꿈꾸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와 직결된 ‘초정권적 전략’을 수립하고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정권 간의 주요 정책 ‘이어 달리기’가 진실성 없는 정치적 수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셋째,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중국의 고유한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중국의 역할을 과도하게 기대할 경우 북한 비핵화, 남북 관계 개선,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의지’와 ‘능력’을 오판하고 실망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반대로 한미동맹만을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만능 수단으로 과신하는 것도 매우 비현실적이다. 이는 심정적으로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며 이념적 지향성의 문제만도 아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교차하는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우리의 지혜와 균형의 문제다. 중국이 추구하는 한반도 정책의 핵심 가치는 ‘의(義)’가 아니라 ‘이(利)’이며 미국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자국의 핵심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그들에게 한반도 문제는 장기적인 전략 경쟁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그 사이에서 국익을 수호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글로벌 중추국가는 결코 구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 외교의 인사·조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이를 추진할 인사·조직의 역량이 부실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동안 대중 외교의 인력과 조직은 중국 주재 대사관과 총영사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의 준 외교 인원까지 더해서 상당한 규모로 확대 발전되어 왔다. 따라서 향후 대중 외교의 역량 강화는 양적인 확대가 아니라 인사·조직의 효율적 관리·운영을 위한 질적 발전과 내실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첫째, 대중 외교인력 양성, 안배 과정에서 현지화, 전문화, 국제화의 ‘삼위일체’를 중시해야 한다. 특히 국면 전환기에 진입한 한중관계의 많은 현안이 전문적, 다자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과거처럼 중국 현지에만 익숙한 인력으로는 업무 추진에 한계가 있다. 중국의 한반도 담당 인력도 북한 유학파를 중심으로 서울과 평양만을 오가던 ‘한국통’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
둘째, 대중 외교 인력의 인사·조직 측면에서 변화된 환경을 고려한 재조정이 필요하다. 특히 과거에 비해 중국 주재 공관 근무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중국의 체제적 특성에 대한 거부감, 주재국 급지 산정 등 구체적인 인사제도의 미비, 코로나19 방역 기간에 체감한 열악한 생활환경, 한중관계의 지속적인 악화 등이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중국 근무를 기피하는 우수한 외교 인력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애국심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셋째, 대중 외교역량 강화 과정에서 대만 주재 대표부의 인사·조직을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전략에 노골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5~6위의 통상국인 대만과 비정치적 관계 발전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반도체, 공급망, 안보 등의 측면에서 대만과의 관계가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대표부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다만 대만 문제의 구조적 특성과 중국의 정책 기조, 양안 관계에 대한 대만의 여론 추이와 2024년 1월의 대만 대선 전망, 미국과 일본의 대만 정책 등에 대한 객관적 검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국내의 반중정서에 편승한 즉흥적이고 부실한 대만 정책은 오히려 소탐대실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한중관계의 재정립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시진핑의 장기 집권이 본격화되고 중국의 대내외 환경이 크게 변화한 데 기인한다. 대내적으로 연일 ‘신시대’를 외치지만 정작 중국의 체제·이념과 정치 현실은 마오쩌둥의 ‘구시대’로 퇴보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의 평화와 번영, 화합의 운명공동체를 주창하지만 내심 반드시 자기 주도의 ‘중국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이처럼 ‘중국몽’ 실현을 위한 중국의 저돌적인 행보는 필연적으로 국제사회의 곳곳에서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고 있으며 불행히도 우리는 그 최전선에 서 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한중관계는 안보면 그만인 관계가 아니다. 모든 갈등을 속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비방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지난 30여 년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축적한 전문 인력이 있고 바람직한 대중 정책을 가늠할 수 있는 경험과 지혜도 있다. 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적재적소에 안배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중관계, 더 나아가 한반도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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