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약국 외 판매는 물 건너갔나?' 심야시간대 의약품 구매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일반의약품에 대한 약국 외 판매가 보건복지부 측 '시간끌기 작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현행 약사법 테두리 내에서 24시간 의약품 판매가 가능한 장소를 확대하겠다던 정부가 의약품 분류 재검토와 분류 체계 개편방안 쪽으로 논의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1년여를 끌어왔던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관련 논의가 정부 의도나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지도 불투명하고 분류체계 개편을 통해 슈퍼나 편의점 판매가 가능한 의약품 종류도 한정적이다. 결국 약사회는 국민 불편을 외면한 채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했고 보건복지부는 약국 외 판매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약국 외 판매를 주장하던 기획재정부도 이번 조치에 대해 "복지부 향후 일정과 의지가 불투명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보건복지부는 3일 의약품 재분류를 통한 국민 의약품 구입 불편 해소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를 '정공법'이라고 주장했다. 약사법 개정이라는 정석적인 방법을 통해 가정상비약 슈퍼 판매를 추진하겠다는 설명이다. 의약품 재분류 작업을 통해 '약국 외 판매 의약품'이라는 새 항목을 신설하고 여기에 종합감기약ㆍ해열진통제ㆍ기타 소화제 등을 넣겠다는 계산이다.
그동안 보건복지부가 의약품 안전성만을 강조하면서 약사법 개정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데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복지부가 의약품 약국 외 판매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자아낸다. 복지부는 중앙약심이 이달 15일 첫 회의를 시작하지만 더 이상 구체적인 일정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보건의료미래위원회에서 각종 심의안건에 대한 일정을 구체적으로 공개한 것과는 다르다.
복지부가 먼저 약사법 개정안을 내지 않고 중앙약심을 통과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의심의 시선을 보낸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정부가 법안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약외품 등을 분류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설명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민 불편을 외면한 약사회도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현행 약사법은 의약품을 약국에서 약사를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복지부는 그동안 고속도로 휴게소 등 '특수 장소' 개념을 확대하는 방식을 통해 의약품 슈퍼 판매 방안을 해결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심야나 공휴일에도 24시간 의약품 판매가 가능한 곳을 특수 장소로 지정하고, 인근 약국 약사가 관리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의약품을 판매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선 약국의 약사가 대리인을 지정해야 하는 등 약사회 동의가 필요한데, 약사회는 당번약국제를 들고 나오면서 의약품 약국 외 판매를 반대했다.
미적대던 복지부가 약사법 개정안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시민단체 등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를 위한 시민연대 조중근 대표는 "복지부 발표안은 국민 염의를 저버린 채 이익단체인 약사회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약심에서 합의 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복지부 발표안은 경제조정정책회의 결정은 물론 국민권익위원회의 약국 외 판매 관련 권고와도 거리가 멀다"며 전국 7개 가정상비약 시민연대 대표자회의를 열어 장관 퇴진 운동 등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앙약심에 참여하는 의사들이 전향적 태도를 보이면 전기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이 문제를 다룰 중앙약심의 의약품분류 소분과위원회는 의료계 4명, 약계 4명, 공익대표 4명으로 구성된다. 약계와 공익대표가 대척 관계에 있는 가운데 의료계 4명이 의약품 재분류의 열쇠를 쥐는 구도가 된다는 것이다.
서비스산업 선진화 차원에서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를 독려해온 기획재정부는 소극적인 보건복지부 태도가 답답하다고 지적했다. 기획재정부는 복지부가 밝힌 의약품 재분류 계획이 일정상 더디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고, 논의 과정에서 약국 외 판매가 허용되는 품목도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이번 복지부 발표 내용은 기획재정부가 합의한 것은 아니다"며 "복지부가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일정은 계속 지연되고 실질적 내용도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의료서비스 시장 확대를 둘러싼 재정부와 복지부 간 해묵은 갈등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박기효 기자 / 신헌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