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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리돈님의 댓글에서 우리는 남이 하면 어덜터리 내가 하면 낭만적인 사랑, 남이 하면 최소한 의제 강간, 내가 하면 화간,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가담항설 속에 담긴 인간 본질의 정수를 사라센님이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같은 대상을 다루되 방향이 정반대인 쌍을 이룬 속담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걸, 속담은 속담일 뿐이며 격언과 금언 역시 수위가 높은 속담에 속할 뿐이라는 걸.
사리돈님 말을 달리 하자면 그렇다. 사돈 남말 하고 있네.
권력은 뭐냐면 음 사리돈님 입을 막는 것이다.
바람 부는 대나무숲으로 귀양을 보내거나.
하긴 뭐 그렇다. 나도 마음에 드는 유부녀 꼬셔서 놀면 얼마나 좋을까 간헐적으로 상상한다.
(이제 보니 재밌다. 가끔이라고 쓸 걸 문자속에 매여서 간헐적이라니)
그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지만 또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그 남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라는 생각이 미치면,
한 번 킬킬대다 단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기소불욕 물시어인/기소욕 시어인(자신이 받고 싶은 바를 남에게 베풀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보통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정도는 된다. 아주 술에 쩔거나 약물에 중독된 상태에 나머지 조건이 부합하면 실천궁행할 확률은 쬐끔은 상승하지 않을까도 싶다.
각설하고 다음의 내용은 내 추론이지 선량한 다수의 지배적 인식은 '결코' 아니다.
소수설 정도로 받아들여야 정신 건강에 좋다. 아니면 읽지 말거나.
여기 쓴 글은 다수설이 아니며 현실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현상들이다. 어쩌면 저런 현상을 파악해가며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일 수도 있고. 하지만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작가들 소설에서도 작품 소재로 쓰는 일이 있다.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닌 자신 주변의 일이라면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를 것이다.
뭐야 일부일처제가 어느 정도 hormone-driven 기전에 영향을 받는 인간에게 많은 병리현상을 낳는다는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필요악이고 득보다 실이 많으면 언젠가 때가 되면 그 틀이 깨어진다는 소리.
글구 양태를 달리할 뿐, 과거와 같은 다부일처제나 일부다처제는 그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약간의 변형이다.
serial polygamy(남자 또는 여자 통칭)는 권력과 부를 지닌 남자 혹은 여자를 축으로 보면 시간차 다부일처제나 일부다처제이다. 달리 말하면 정통 일부다처제나 다부일처제가의 속성에 가까우나 그 변형.
사회학에서 결혼 풍습을 다룬 인류학과 정치학이 인생에 무슨 쓸모가 있나 하는사람들이 있지만 나름의 쓸모가 있고 우리들은 그 영향권 아래에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Polygamy
http://en.wikipedia.org/wiki/Serial_polygamy#Serial_monogamy
또 그런 성풍속도도 있다. 물론 거의 어느 나라에나.
조직 내에서 상층에 있는 한 남성, 또는 여성 구성원의 약점을 쥔 남성이 한 여성 구성원과 일정 기간 관계를 맺은 후에 신입 여성 구성원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과정에 기존 여성 구성원이 촉매나 상황 유도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 말하자면 마담뚜나 채홍사 역할.
이런 풍속의 특징은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조직에서 자주 발생한다는 점, 그리고 최초 촉매자인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을 당시 대개 신입이거나 상승욕구, 인정욕구, 조직 적응 공포에 시달리게 마련이며 상당한 시간이 흘러 적극적인 촉매 역할을 하는 경우까지도 그런 심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한다는 그리고 그리고 실제로 보자면 확률은 낮지만 하위직 여성 구성원의 수가 압도적으로 남성 구성원에 비해 많은 경향이 있다(이건 특징으로 넣기 좀 그렇기도 하다) 이 세 가지를 갖춘 조직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몇몇 곳을 금방 떠올릴 것이다.
채홍사 역할을 한 여성은 사실 물질적/심리적으로 독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역시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물지도 않다. 한편으로 보면 남성은 약한 심신미약(자립불능) 상태인 저 여성들을 의제강간하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영화에서 간혹 호기심에 불타는 어린 처녀들에게 성애의 기쁨을 자연스러운 경로를 거쳐서 알려주는 로맨틱한 남성을 그려내듯이 서로 나쁘지 않은 추억으로 남는 사례도 적지 않다. 뭐 어찌 보면 바로 이게 자연스러운 성애이다. 성의 본질이 원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쳤을 때).
이건 또 어찌 보면 중고참 여성 구성원과 신입 여성 구성원 사이에 정도는 조금 약할 지 모르나 일종의 심리적 모녀(상하)관계가 성립하는 탓이기도 하다(물론 일반화는 금물, 개인차는 많다). 남성의 경우 심리적 형제(상하)관계가 성립하기는 하나 업무에 관해서 강하게 성립할 뿐 남녀의 성적 관계로 들어가면 양상이 꽤 다르다.
(뭔가 하나 빠졌다 했더니 여성을 정복이라기보다는 공략의 대상으로 놓고 봤을 때 여성 일반(이런 말이 성립하는 건지나 모르겠다)의 성향을 감안하면 최선의 전술은 여성의 주변을 공략하고 환심을 사는 일이다. 특히나 주변 성체 여성들. 관계 면에서 여성은 감성과 즉흥성, 이미지에 약하다. 의외로 결과값을 중시하지 과정이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기쁨의 최종 전달자가 누구인지에만 관심을 보일 뿐 얼개를 잘 모른다-역시나 남녀차보다야 개인차를 강조하고 싶지만 현실엔 어느 정도 벽이-
여성은 다른 여성들에게 묻는다. 저 남자 위험하지 않느냐고, 재미 있느냐고 똑똑하냐고... ... 뭐 적잖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동네 여성들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성들 역시 그런 패턴에 영향을 받는다. 단지 조금 정도가 약할 뿐. 그게 맞을 수도 그를 수도 있으며 최종 판단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에는 좀 문제가 있다. 어차피 남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주변 여성에게 악의가 있었다면, 주변 여성이 맹하고 사리 분별을 잘 못하는 경우라면 좀 손해볼 일이 벌어질 게다. 그래도 자신의 책임이다. 물론 피해자 길들이기 식 여론이야 더 어리석은 노릇이지만... ... .
이미지 관리라는 건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약점은 드러내지 않고 장점을 드러내는 전략.
어떤 사람을 보면(특히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 노래를 못하는데 여성과 함께 하는 회식을 하거나 할 때면 항상 노래 잘하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친구나 부하직원을 대동하고 분위기를 띄우고 자신은 마이크를 절대 잡지 않는다. 실은 노래 못하는 거 들키면 매력이 떨어지니까. 그 두려움을 그렇게 막아내는 것이다(물론 뒤통수 맞는 일도 있다. 그게 인생의 묘미니까). 대신 여성들은 노래 잘하는 옆사람 덕에 그 자리 멋있었다고 기억에 담는다. 그 외에도 뭐 비근한 예는 많다. 놀이 공원 놀이가서 롤러코스터 타고 번지점프하고 스릴 있는 거 즐기는 거 하며 무척 위험해 보이지만 안전 장치를 완비한 시스템 속으로 끌여들이는 거, 영화 보는 게 일상적이다.
........나는 아직도 권력지향적인 남성하면 여성성이 강한 수컷으로 보인다. 왜일까? 물론 여성성을 이루는 많은 속성 중에서 몇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둔 말이고 열등함이라는 의미와는 맥이 닿지 않지만 좀 부정적인 일부 속성이라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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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마냥 낮추어 볼 것은 아니다.
쾌락을 인정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혹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관계를 맺고 난 후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도덕 교과서풍이지만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쾌락'. 한편으로 보면 인간에게 최고의 쾌락은 일상의 자연스러움, 불가식으로 표현하자면 무애(걸림 없음)이다<---여기에 방점)
성 관계를 두고 권력과 육체적 힘, 그리고 순결 개념이 작용하기 때문에 여성이 항상 피해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어느 정도 예외는 있다. 물론 저 생각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예외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씩 예외를 넘어 일정 수준까지 비중을 늘려갈 것이다.
자꾸 노는 계집 창에 나오는 한 풍경을 빌어 성체가 유체를 exploit(좋지 않은 과정이나 의도가 개입한다는 뜻이다)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저런 풍경이 세상의 과반은 아닐지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얼개이다.
위의 얼개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대개 어린 딸을 둔 돌싱녀가 재혼 또는 다시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후에 의부가 그 딸을 유린하거나 (법률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정도가 심한 심신미약 상태의) 돌싱녀가 채홍사 역할을 하는 경우와도 맥이 닿는다. 역시 정신적으로 약하다는 점이 큰 요소이다.
남성들도 못지 않으나 우리나라 여성들(서구 선진국의 경우 그 정도가 좀 낮은 편)은 전반적으로 서로 닮고 비슷해야 안심이 되는 강박이 강하다. 거기서 벗어난 이들도 있지만 대개 그 입지를 갖추게 된 데에는 남성이나 부모의 물질적 힘 등이 작용할 공산이 크다 아직까지는. 그 외부 변수가 사라진 상태가 지속될 때 실제로 자립능력이 있는가가 드러나는 셈이다. 평범한 사회계층이고 경제력이 약해도 자립하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들도 있다. 아마 그 수는 그래도 바로 앞 여성들에 비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도 핵은 역시나 여성의 순결을 강요하는 정신문화, 그리고 여성이 생명을 키우는 보호자이지만 약자의 입장에 있다는 일반의 의식이다. 저 쾌락을 누린 남성들에게 특징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유독 마누라나 딸의 순결에 집착하고 감시한다는 점이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다른 남성에 비해 극단적 대처를 할 개연성이 크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로맨스.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말들이 요새 많이 나온다. 역시나 서구에서 시작된 주장으로 보이며 여성 사회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지 않나 싶다. 어디까지나 추측. 말은 어렵지만 실은 여성인 자기 몸의 주인은 바로 자신, 좁혀서 성관계의 대상을 선택할 권리는 여성 자신에게 있다는 말일 게다(물론 남성에게도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겠다). 내 버자이너의 주인은 곧 나...묘한 일이지만 이걸 내 보지의 주인은 나라고 하면 욕 먹는다. 외래어와 자국어 사이에서 수직 계층 구조가 존재하는 셈이다. 어찌 보면 풍경은 다르지만 문어체와 구어체의 위상 차이. 그런데 또 한자어를 써서 병신이라고 하면 욕이 되지만 정서상 병든 몸이라고 하면 이때는 우리말이 조금 공손함과 배려의 느낌을 풍긴다. 뭐 찾아보면 이런저런 관계 역전 사례는 많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저 번에 연극 이름이 '내 버자이너'였는지 '내 보지'였는지.
나중에는 대음순이나 소음순, 슴가도 내 베스티뷸, 내 브레스트 뭐 이런식으로 나아갈 지 모르겠다.
성적 자기결정권에 내포된 의미는 확대해서 보면 남녀를 떠나 성적 주체성이 약한 심신미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덧붙여 사회복지학 쪽의 강점 관점과도 맥이 닿을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 여성을 비롯한 성적/물리적/경제적 약자에게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약자라는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나 또 일정 부분은 왜곡 또는 과장된' 관념에서 벗어나는데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정도. 어떤 시혜의 대상이라기보다 자립할 능력이 부족한데 그 부분을 채워주고서 스스로 그 결과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
뭐 잡글에서 일반적인 평범한 성풍속도나 정반대의 예는 모두 생략했다. 보통 글이란 무언가에 치중하는 것이지 나머지 모집단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 모집단이 있음을 묵시적 동의의 대상으로 깔고서 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자신이 성적 피해자이지 더럽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잡혀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그런데 사실 많은 남성들 역시 그 상처 혹은 인식에 사로잡혀 있고. 성은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세 끼 밥 먹는 것처럼 일상이다. 성이 숭고하다면 세 끼 밥 역시 숭고한 것이고 세 끼 밥 어렵게 해결하는 게 비루하고 나쁜(?) 것이라면 성 역시 그렇다. 어차피 맨 하부엔 생명/죽음이 쌍생아로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누구라서 그 천형에서 벗어나 해탈할까?
음...쓰고 나니 정리도 되지 않은 잡생각을 괜히 썼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제는 르뽀소설 형식을 빌려 상상력이 개입할 여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깜냥은 못 되고... ... .
그나저나 이 잡문을 쓰려고 그토록 사전 자기 검열을 해야 하다니 쩝.
하긴 뭐 이론으로만 보거나 요새 20-30대 여성들이 손 잡고 다니며 술자리 등등에서 하는 성담론으로만 보자면야 지금 내가 올린 글은 케케묵은 것이다. 흠...그네들 머릿 속 생각으로만 보자면야. 하지만 소리내어 말할 때, 그리고 자신의 현실이 될 때 갈수록 케케묵은 냄새는 사라질 게다.
수미쌍관을 맞추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
역시 남 일 상관 말고 내 할 일이나 해야 할까?
첨언: 이런 류의 글이 저속하거나 미풍양속에 위배되거나 불쾌하거나 젊은 층에게 해가 되고 반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면 글 내림. 뭐 신변잡기니까. 쩝. 그리고 난 큰 방향을 놓고 봤을 때 여성 혐오주의자라거나 남의 허물이나 약함을 악용하는 부류는 아니다. 단지 현실은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부류.
첫댓글 아래 글하고 이 글하고 두 개를 끝까지 읽어봤는데 좀 정리해서 글을 쓰시고 쉽게(또는 용어 설명을 곁들여서) 글 하나에 대주제 하나, 소주제 2-3개 정도로 쓰시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글을 쓰신다면 다음에는 글을 안 읽게 될 것 같네요.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죄송.
올 것이 왔군요.
품목 별로 잘라내고 중간 중간에 바느질을 해서 이어야 하는데 좀 게을러서.
반성해 볼랍니다.
그나저나 '쉽게'는 정리해서 쓰라는 말이지, 글에 쓸데없이 어려운, 일반인들이 잘 쓰지 않는 용어를 쓴다는 뜻은 아니겠죠?
간혹 몇 개 그런 경우도 있다 싶고 어쩌면 내가 일부 전문가의 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더랬는데
실은 내가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여튼 남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건 내가 잘못 쓰고 있다는 방증이겠죠.
흠. 그저 '평범한' 일상 풍경 나열한 정도고 먹물 든 놈은 아니고
기껏해야 먹물이 옷에 몇 방울 튀긴 사람 정도로 자신을 알고 있는데.
또 형식이 아닌 내용을 두고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거 문장이 이상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댓글 달면
그걸 빌미로 손을 대보겠다는 흉악한 꿍꿍이 속도 있어요. 쩝 뭐 글이 산만해서 요지를 모를 지경이라면 그런 댓글도 기대하기 힘들지만서두.
중고등학교 다닐 때 '수필'을 붓이 가는 대로 쓴 글이라고 배웠고 영한 사전에 essay가 수필이라고 나와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붓이 가는 대로 쓰면서도 독자를 빠지게 만드는 글을 쓰려면 글재주가 엄청 좋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essay가 일정한 형식과 주제를 갖춘 글쓰기라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아는 게 많으신 것 같으니 서양 사람들 에세이 쓰듯이 정리하시면 좋은 글 많이 쓰실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도 뒷심이 없으면 별로 쓸 말이 없는 게 일반적인데 쓸 게 많으신 것 같으니 가지치기와 모양내기를 좀 하시면 재미있고, 멋있는 글을 쓰실 수 있을 것 같아 부럽기도 합니다.
cappuccino님의 평가는 뒤통수 뜨겁게 만드는 과장 :)
essay 중에 중수필 장르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필가 중에 방망이 깎던 노인으로 잘 알려진 윤오영씨가 중수필+붓가는 대로 쓴 글이 합쳐진 수필 문학 선구자 격일 겁니다. 그리고 보면 예전에 비해 수필에 대한 관심들이 많이 줄었어요. 좋은 수필가가 사라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세상이 복잡해져서 사람들 안목이 줄어서일 수도 있고.
시간 나면 윤오영씨 '고독의 반추'라는 작품을 함 사서 읽어보세요.
나이 든 이들(한 40대 중반-70대) 중에 저 수필집 고이 간직하고 꺼내 읽는 분들도 제법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책에 나온 본문을 멋드러지게 읽고 분석하면서 멋있다는 말을 연발하던 당시 광화문 고액 과외 하던 국어 선생 생각이 나네요. 이런 양반들은 아름답고 멋있는 글 자체에 감탄하지만 전 소설도 역사 소설, 영화도 타큐 스타일을 좋하해서 수필이나 시를 거의 읽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글을 좋아하니 글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내용의 효용성을 더 중시하는 속물이라...
윤오영씨는 방망이 깍던 노인 풍의 글 말고도 많은 글을 썼습니다. cappuccino님이 생각한 것으로 보이는 유미주의풍(art for art's sake)의 수필은 아니고 수필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제도 현실에 천착하되 좀 무겁고 무척 정교한 수필이 고독의 반추입니다. cappuccino님이 실용 번역을 많이 한다지만 글과 논리의 정치함이 무언지 윤오영씨 글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글을 어떻게 쓰는가 준거틀로 삼아봄직한 책입니다. 방망이 깍던 노인이나 달밤처럼 서정과 세태를 그린 글 말고도 전혀 종류를 달리하는 글들이 작품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에는 '퇴고'라는 말의 어원이 나오는데, 천하의 이태준도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가는 명문은 없다고 해서 수긍이 많이 갔습니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이라고 말은 해도 진짜 명문은 엄청난 퇴고와 구성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지요.
cappuccino님 말이 맞습니다.
무언가 진중한, 높은, 치밀한 무언가는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머리 속으로, 연필로, 몸으로 준비하고 가다듬었던 것이고 때와 상황이 맞아 순간 봉오리가 피고 확 불이 붙고 봇물이 터진 것입니다. 그 오랜 기다림과 고뇌의 시간을 모르는 사람들은 경탄하며 일필휘지라는 수식어를 선사하지만요.
바닷가님. 고독의 반추 사서 읽어볼게요. 추천 감사해요
이 책 절판된지 오래라 범우문고 삼중당 등에서 다시 펴낼 줄 알았더니 온라인 서점에서 보이질 않는군요.
다른 작품들 몇 개는 있는데.
인터넷 중고서점 몇 곳에 중고책을 내놓은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