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몽을 꾸고 복권을 사다
이런 꿈을 꾸었다. 그것도 며칠 사이에 똑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꾸니 신기했다. 꿈에서 나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하얀 모래밭이 펼쳐진 바닷가가 아니고 어릴 적에 다슬기를 줍고 바구니로 뿌구리를 잡던 내 고향 삼척 오십천 가녘처럼 보였다.
폭이 좁은 바다 건너 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이쪽에는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 손질된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라기보다는 강처럼 보이는 물길이 구부러지는 곳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보였는데 예전에 물길을 돌리기 전 오십천 가녘에
있던 봉황산 같았다.
처음 꿈에서는 산을 넘으니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기에 서둘러 산에서 내려와 바닷가로 갔는데 두 번째 꿈에서는 바로 바닷가에서 물속의 물고기 떼를 바라보았다. 그리 깊지 않은 바닷물은 밑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았는데, 팔뚝만 한 크기의 물고기가 수없이
뛰놀고, 그리 크지 않은 거북이가 떼 지어 헤엄쳤다. 내가 바닷물에
손을 집어넣으니 멀리서 큰 물고기가 다가와 내 손을 물었는데 그게 마치 환영 인사처럼 느껴졌다.
꿈에서 본 풍경이 너무
생생하고 아름답고 신기해서 15세기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화원경의 이상향을 재현하여 그린 화가 안견의
대표적 명작인 몽유도원도가 생각났다. 나도 그런 화가를 만나면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몽유해변도(夢遊海邊圖)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면 좋으련만, 내 주위에는
보잘것없는 사람의 꿈 따위를 그림으로 그려 줄 한가한 화가가 없으니 아쉽다.
꿈에서 깨어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환시를 보다’라는 대목을 찾아 읽었다.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날 잡아 잡수.’라는 듯이 내 손을 제 입에 넣어 주던 큰 물고기가 눈앞에 또 떠올랐다.
정말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으로 물고기가 나오는 꿈의 해몽을 찾아보았더니 물고기를 잡는 꿈은 재물이
들어오거나 좋은 일이 일어나는 길몽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태몽이라는 해석도 있었지만, 내 연세를 생각해서 무시하기로 했다. 그래도 내 손을 간질이던 아름다운 자태의 물고기를 생각하면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똑똑한 아들을 얻을 꿈같기는 했지만,
그런 꿈은 40년 전에나 꾸었어야지.
나이 든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 부귀영화 모두 이 나이에 바랄 수는
없으니 딸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나에게 재물이 들어오는 꿈이라면,
그것도 적지 않은 재물을 기대한다면 답은 복권당첨밖에 없다. 약소한 연금으로 넉넉지
않은 은퇴 생활을 하는 나에게 재물이 들어온다면 복권 말고는 방법이 없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복권 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꿈 얘기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봄날 토요일 정오쯤에 성당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행차해서 거의 20년 만에 복권이라는 걸 샀다. 그것도
$1짜리 열 장을 샀으니 $10이라는 거금을 들였다. 숫자 여섯 개가 다 맞는 1등에 당첨되면 현찰로 $2,800만, 다섯 개가 맞으면 $2,700, 네 개가 맞으면
$46, 세 개가 맞으면, $3, 나머지는 꽝이다. 월요일 저녁에 추첨할 때까지 아내 얼굴을 볼 때마다 꿈 얘기가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천기누설하지 않고 용케도 참았다.
월요일 저녁 일곱 시 오십칠 분에 추첨하는데 가슴이 떨리지는 않았다. ‘내 팔자에 무슨 일확천금을?’이라는 생각을 미리 했기에 평온한 마음으로 추첨 중계를 볼 수 있었다. 결과는?
꽝은 아니었다. 숫자 여섯 개 중에서 세 개가 들어맞아서 $3을 건졌다. 그런데 복권을 또 사야 하나? 한 번만 더
사기로 했다. 물고기 꿈을 두 번 꾸었으니 복권도 두 번은 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꿈 얘기를 이렇게 떠벌렸으니 길몽도 약발이 다 떨어졌을 거다. 그래도 일확천금을 하지
못 했어도 오랜만에 아름다운 고향 풍경 비슷한 경치를 꿈에서 본 게 어딘데.
(2018년 4월
25일)
첫댓글 한달 이상 형기의 잔잔한 글이 여기에 올라오지 않아,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걱정도 되던 차라 오늘은 여기에 안부를 묻는 글을 올려볼까 하고 들어왔더니, 아이고! 반가운 글 "길몽"이 올라왔네 그려~다시 보니 좋구먼. 앞으로 한 20년이상 동안도 꾸준히 좋은 글 써주시게, 그러도록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