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항뎐
- 육이오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서울로 돌아왔을 무렵, 모든게 어수선하고 부족 했던 시절, 공부다운 공부는 한번도 못한채 필자는 이미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었었다. 그 때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이 홍길동뎐과 장화홍련뎐 이었다. 읽을거리가 전혀 없던차에 이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으며 다른 책은 없었기에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 이번에는 그 때 읽었던 홍길동뎐의 재미를 이기항뎐을 통해 되살려 보고 싶지만 이 이기항뎐에는 극적인 요소가 없으며 다만 그가 1970년대 화란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던 한국인 기독교신자들을 모아 그의 거실을 개방해 예배를 드린 이야기와 은퇴후 사재를 털어 헤이그에 이준열사 기념관을 설립했다는 이야기 뿐이다.
- 필자는 암스테르담에 발령 받아 그곳에 도착한 다음 날 이기항씨를 만난다. 그의 부인이 그의 집 창고에서 한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쌀을 비롯한 식료품을 받아 판매하고 있었으며 필자는 다음날 아침 걱정을 해야하는 처지였기 때문 이었다.
- 당시는 해외발령시 3개월은 단신 부임이어서 집과 끼니를 함께 걱정할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다행히 집은 선임자의 말을 듣고 답사도 없이 정했고 이제 쌀, 라면 그리고 단무지 등등을 샀으니 일단 발등의 불은 끈 셈이었다.
- 그는 필자보다 약 3년 반 전에 고려무역 ( 현 KOTRA 의 전신 ) 직원으로 암스테르담으로 파견되어 3년후 귀국 발령을 받자 고려무역에 사표를 내고 그곳에 주저 앉았다. 매달 나오던 월급이 끊기고 아직 다른 직업을 갖기 전이라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다. 임시 방편으로 그의 부인이 한국교민들을 상대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을 일본 식품점에서 받아와 그의 집 창고에서 판매하고 있는 중 이었다. 한국식품이 구라파로 진출하기 훨씬 전 이야기다.
- 이기항씨 부부는 처음 만난 필자에게 화란 선배로서 여러가지 생활 팁을 주었고 저녁식사 초청도 하였으나 필자는 다음으로 미루었다. KLM항공사와 대한항공의 화물기 취항 관련 회의를해야 했고 대사관에 인사를 다니고 교민, 주재상사 대표 등등 을 만나느라 바쁘게 지내던 중 다시 한번 이기항씨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는다. 그리고 그 댁에서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 남편은 S대와 공군장교를 거쳐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주한 미국대사관에 취직한다. 부인은 E여대를 거쳐 모교인 E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만하면 당시 한국에서는 엘리트 중 엘리트요 생활 형편도 상류층에 속하고 또한 교회에서도 장로와 권사 직분을 갖고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부족한 무엇이 내재해 있었다고 한다.
- 그러다 고려무역이라는 회사에서 해외파견요원을 모집 한다는 광고에 그야말로 “ 뿅 “ 가버린다.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몇년을 열심히 일한 대가가 나타났다. 바로 암스테르담지사로 파견된 것이다. 도착 당일 저녁을 먹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함께 기도를 드렸는데 그들의 말을 유추해 보면 대강 이런식이었다.
- “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 저희가 아버지의 은혜로 오늘 오후 이곳 암스테르담에 무사히 도착 하였습니다. 하늘의 천당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땅위의 천당은 바로 저희가 발을 디딘 이곳 화란입니다.…….. 중략. 바라옵건데는 저희가 이곳에서 오래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 드렸사옵나이다. 아멘.”
- 몇달을 지내고 보니 교민이건 주재원이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독교인이어서 필자는 놀랐다. 나머지 몇사람은 성당에 나간다고 했다.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모두 같은 기독교로 치부하던 필자가 볼 때 대한민국은 100프로 기독교국가로 생각 되었다.
- 이들과는 대사관 주재회의 또는 상무관주재 회의 그리고 상사협의체회의, 모국의 유력 국회의원 방문시 소집 미팅 등등을 통하여 자주 미팅을 가질 기회가 많았다. 아마도 지금 그런식으로 미팅을 강요하면 모두 청와대로 진정을 하고 난리를 떨었을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회의가 끝나면 매번 회식에 들어가는데 회식 시간을 대부분 교회 이야기로 흘려보내곤 했다. 아마 공통되는 화제가 당시에는 그것 밖에 없었던 듯 했다. 그리고 말미에는 이젠 이곳 암스테르담에도 한인교회가 생겨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매번 그런식으로 끝이었다.
- 필자가 보기에는 꼭 무슨 교회를 얻고 목사님을 청빙하고, 그런 거창한 담론보다 우선 마음 맞는 사람끼리 어느 집에 모여 예배를 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니냐고 필자가 말하니 몰라서 그렇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필자는 속으로 “ 그렇게 하다가는 부지하세월이다. 이 무리들아! “ 이렇게 외쳤다.
- 그러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뒤 다음주부터 이기항 장로님 댁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교자로는 당시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자유대학 ( VRIJE UNIVERSITEIT: 화란에서 1-2위를 다투는 대학임 ) 에 교환교수로 와 계신 손봉호 ( 현 고신대 석좌교수 ) 박사님을 모시기로 했다고 했다. 필자도 참석 요청을 받았지만 그 당시에는 다른 무리들 처럼 절박하지 않아 참석 하지 않았다. 그 집회가 바로 최초의 화란한인교회의 태두였음에 비추어 필자도 그 예배에 참석해서 증인의 한 사람이 되지 못 한 것이 지금은 크게 후회된다. 이 교회를 시작으로 현재 화란에는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곳곳에 6개의 교회와 성당 한 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 이기항 장로의 부친은 평안북도 철산 인근의 대 지주였으며 그 역시 그의 동네에 교회가 없어 주일 마다 교인들이 멀리 떨어진 읍내의 교회를 다니느라 수고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의 대청마루를 개방해 예배를 보게했다고 한다.
- 첫 예배날. 동네 교인들을 영접하는 것은 물론 마당에서 서성이던 여러 하인들의 손을 잡아 마루로 끌어 올리는 아버지를 보고 어린 이기항장로는 크게 감동하였으며 후에 월남후 남산 기슭 해방촌에서 어느 목사님과 개척교회를 세워 그 교회가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 아버지는 철산 인근의 집에서 지역 신도들을 위해서, 아들 이기항 장로는 화란 암스테르담의 자택에서 한국인 신도들을 위한 첫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써 장한 부전자전 ( 父傳子傳 ) 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필자도 이기항 장로를 대면하고 나서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모습인지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 그 후 이십 오년 이상이 흐른 후 이기항 장로님께서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그 동안 뫃은 전 재산을 이준 열사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쏟아 붓는다. 그는 헤이그 ( 영어 HAGUE 화란어 DEN HAAG ) 에 있는, 1907년 당시 이준 열사께서 분사 ( 慎死 ) 한 호텔 ( HOTEL DE JONG ) 을 매입했고 수년에 걸쳐 그의 유품을 수집하고 사들여 드디어 1995년 이준 열사 기념관을 개관 한다.
- 당연히 한국정부가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이었으나 게을러빠진 정부가 손을 놓고 있던 일을 그가 해 낸 것이다. 이로써 구 한말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찬탈하고 억압했던 또하나의 비극적인 역사현장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릴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격이 한층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 했다.
- 또 수년이 지난후 필자는 한국에서 H일보와 K 방송을 통하여 이준 열사 기념관 개보수 작업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 신문과 방송은 각각 자기네가 후원해서 대대적인 개보수가 진행 되었고 마침내 이준 열사 기념관이 새로 개관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는데 정작 이기항 장로님 에 대하여는 한마디 언급이 없어 어안이 벙벙 했다. 모두 자기네의 공적을 부풀리는데만 시간을 쏟았다.
- 이것이야 말로 고의적인 언론의 왜곡보도요, 이런것을 바로 탐천지공 (贪天之功 :남의 공을 제 공으로 만듬 ) 이라 한다. 한국의 언론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발전이 없음을 통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