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역사의 향기
- 전주 경기전에서
조윤수
이른 봄에 제주도에서 봄을 만끽하고 돌아와서 약간 조용한 봄날을 보낼 것 같았다. 아직 춘삼월이 다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모녀가 만나서 우연히 경기전慶基殿을 산책하게 되었다. 역사적 가치보다 이젠 시민의 공원으로서 자리매김한 경기전 뜨락의 숲이 좋기 때문이었다.
대나무밭이 있는 사고史庫로 막 들어서려던 때 어디선가 달보드레한 암향이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 서야 아! 사고 앞에 기이한 매화나무가 있다고 했지! 뜰 가운데서 아담한 노매老梅 한 그루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찍은 사진은 어느 동인지 표지로 채택되어 기념비로 남게 되었다.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다워서 꼭 한 번은 들려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이 매화나무로 하여 경기전 전체가 담고 있는 역사의 향기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사군자 중의 매화도梅畫圖를 그릴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그 가지에 있다. 고매古梅의 굴곡진 가지를 잘 그려야 매화의 품격을 나타낼 수 있다. 꽃은 다음이다. 경기전 안뜰의 매화나무가 꼭 그렇다. 가지가 세 번이나 절묘하게 굽었고, 굽어진 가지 끝에서 겹꽃과 홑꽃이 총총히 달려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바라보는 사람들도 꽃과 향보다는 그 굴곡진 등걸을 입 모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런 고매가 그리도 화사한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언제쯤부터 그렇게 힘든 등걸을 누이고 있었던 걸까. 노매의 둥치가 반은 비어 있어 시멘트 같은 약품재로 메워져 보수되어 있다. 고매는 역시 고매高梅이고, 고매故梅, 고매故梅, 고매苦梅, 고매孤梅며, 고매枯梅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고매의 맛을 모두 지녔다. 하여 잔가지마다 만발하게 피어난 꽃들이 모두 고귀하고 또 고아하며, 아취가 깊어 어떤 말로 칭송하기조차 어쭙잖았다.
경기전을 자주 들렸지만, 매화 철엔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던가. 맨 가지로 외롭게 서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참 무심했다. 매화 등걸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이심전심 조우하게 된다. 매향처럼 은근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경기전 정신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태조어진’과 ‘왕조실록’을 목숨으로 보전하였던 선비들의 넋이 다니러 온 듯하여….
내 친구 임 여사는 경기전 문화해설사로 십여 년 일하고 올해로 퇴임했다. 은퇴 기념으로 경기전 동편 담에 세 그루의 이팝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나와 함께 전주박물관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전주 문화 지킴이의 일역도 담당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매화나무 감상을 감동적으로 전했더니 경기전의 사계四季를 이야기하면서 특히 볼만한 풍경을 귀띔해 주었다.
봄엔 사고史庫 앞의 매화, 여름엔 배롱나무, 특히 배롱나무꽃이 피었을 때 갑자기 소낙비 온 뒤 떨어진 꽃잎이 땅에 달무리 무늬를 지었을 때,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사고 앞의 매화나무 옆 정전 담장 옆에는 키 큰 잣나무가 있는데 뿌리에서부터 능소화 한 그루가 잣나무 등걸을 감고 올라가서 높은 가지에 꽃을 피운다. 다음으로 정전 앞의 팽나무 이끼를 들었다. 내가 하나 더 들고 싶다면 정문 안으로 들어와서 오른편의 고목이 된 우람한 회화나무를 들고 싶다. 그걸 그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하니 가을의 단풍 든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거목이 된 경기전의 은행나무는 향교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명품 중의 명품이다. 겨울에는 경기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나무들이 나목으로 서서 한 생을 되돌아보며 숲에 가려졌던 전각들의 지붕들과 그 속의 역사성을 찾아보게 한다. 그것은 전주의 대표적인 역사적 문화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지난주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 소낙비인가 했더니 태풍의 영향으로 오후 내내 비가 내렸다. 여름날 소낙비 내릴 때의 배롱나무가 생각나서 경기전에 들어갔다. 우산을 받고 바짓가랑이가 다 젖었지만, 과연 경기전 전각 사이사이의 배롱나무는 잠시 나를 잊게 했다. 휘어졌으나 말쑥한 굵은 가지의 빼어난 수형이 고풍스러운 전각들과 조화를 이루어 참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전각들 사이에서 애절하도록 화사한 진분홍 꽃잎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사고 전각 앞의 배롱나무 밑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흥건하게 고인 빗물에 달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전주시의 경관을 보자면, 전주부로 입성하는 남쪽 들머리의 한벽당과 그 뒤 승암산자락은 견훤성 터가 있으므로 후백제의 견훤의 땅으로 보면 좋다. 오목대와 이목대 그리고 향교를 지나서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중심에 경기전이 자리하고 있고, 구 도청 자리에 전라감영이 복원되었으니, 객사까지 이어지는 관광 벨트가 형성되어 이 일대를 조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보면 좋을 것이다.
한양을 두고 전주가 조선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과잉 선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경기전의 의미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서, 전주의 충성스러운 선비들에 의하여 어진과 왕조실록을 보존하였다는 중요성과 희소성을 생각하는 데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놓치지 않아야 할 경기전의 문화 코드가 있다면, 하나는 입구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지차개하마至此皆下馬 잡인무득입雜人毋得入와 정전의 정자각 풍판에 붙어 있는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말함이 아닐까. 경기전의 참모습 또한 면면히 이어져 오는 역사 문화의 향기에서 그 정신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역사의 뒤란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전주인들의 정신이 팽나무의 푸른 이끼처럼 경기전 뜨락에 서려 시민의 공원이 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도 내 친구는 조선의 선비 후예답게 문화재를 사랑하는 전주 지킴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서 든든하다. 역사가 이룬 이러한 품격을 현대의 가치와 양립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앞으로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전주 경기전:
전주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의 맞은편에 위치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 있는 정원이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성씨인 전주이씨의 발원지였던 만큼 태종 시기에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당을 전국에 만들면서 이곳 전주에도 하나를 만들었다. 이 사당은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얻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전주를 대표하는 주요 관광지 중에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