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
서울대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17호(2021.04.15)
임광수 임광토건 명예회장·본회 고문
대담: 오정환 (공법83-87) MBC 부장 / 본지 논설위원
“서울대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조국은 바꿀 수 있어도 모교는 바꿀 수 없다”. 임광수(기계공학48-52) 임광토건 명예회장이 본회 회장 재임 시 가장 즐겨 사용한 말이다. 그의 모교 사랑은 많은 인사들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공대식(기계공학56-60) 본회 자문위원은 “모교 사랑 집념을 빼고는 임 회장을 설명할 수 없다”고 했고, 허문명(가정관리86-90) 동아일보 부국장은 “임 회장님은 서울대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을 갖도록 해주신 분”으로 기억했다.
모교 사랑은 동창회 사랑으로 이어져 ‘본업이 서울대총동창회장’이라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임광수 회장은 여러 난관을 뚫고 마포구 도화동에 장학빌딩을 재건축함으로써 서울대총동창회 보유재산 1,000억원 시대(2012년 기준)를 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서울대 폐지론’에 맞서 동창회보와 여러 일간 신문에 그 부당함을 게재하고, ‘국가 경쟁력과 교육의 수월성’이라는 저서를 7,000부나 발간해 요로에 배포함으로써 폐지론을 일축했다. 모교의 역사도 다시 썼다. 세계의 유수 명문대학에 비해 초라했던 모교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아 ‘개학 1895년, 통합개교 1946년’으로 바로 세웠다. 이는 ‘정통과 정체성’이란 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모래알 같은 서울대인을 결집시켜 신년회, 총회 등의 행사 규모가 200명에서 1,300명으로 증가한 것도 임 회장의 동창회 사랑에서 나온 결과이다.
4월 14일 서울 충무로역 G3호텔에서 만난 임 회장의 모교와 총동창회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94세에도 혈색은 맑고 음성은 건강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행복하다’는 말도 자주 했다. 서울대총동창회 중흥의 역사를 쓴 임 회장에게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94세 치고는 건강한 편이죠. 하나님께 항상 감사 드려요. 난청과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은 있어요. 6·25 전부터 자동차 운전을 했어요. 젊은 시절부터 자동차를 오래 탄 탓인지 다리가 조금 불편합니다. 그 외에는 좋습니다.”
-건강 비결이 있을까요.
“술·담배를 멀리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해 왔습니다. 하루 30분 이상 걷기, 아침은 고구마 2개, 하루에 날 땅콩 20알 이상 먹기, 요가로 스트레칭도 매일 하고요. 특히 체온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해 아침 체온 36도 이상을 유지하도록 애씁니다. 그럼 암에 걸리지 않아요. 환절기에는 손바닥을 비벼 따뜻하게 한 뒤 얼굴을 감싸고, 인중을 자주 문지르면 콧속으로 스미는 따뜻한 기운 덕에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코로나도 질 나쁜 독감이죠. 이러한 건강법을 실천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업은 어떠세요.
“지금 중견 건설사들은 희망이 없어요.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많은 부분이 대기업 건설사 위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에 호텔 세 개(G1, G2, G3)를 지어 전체 규모가 400실 정도 됩니다.
코로나로 관광업이 어려워지면서 쉽지는 않은데, 여력은 있습니다. 청주와 인천의 골프장은 잘 운영되고 있고요. 사업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겪게 되지요. 코로나 상황이 풀어지면 다 잘될 겁니다.”
-이루어 놓으신 게 많으니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건설해서 충북도에 기증한 충북학사를 거쳐간 학생이 4,600여 명이고, 그 중에서 국가고시 합격자가 145명(2020. 9. 9) 됩니다. 앞으로 매년 3억6,000만원씩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죠.
자식들이 현재 60대, 70대인데 다들 건강하고 손주들도 그렇고요.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회장님 삶의 중심에는 일에 대한 열정도 있겠지만, 신앙심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도 가고 그럽니다. 안사람이 심장이 좋지 않아 오래 투병 생활을 했어요. 하나님께 매달리다 결국 일찍 저 세상으로 갔지요. 안사람이 누워 있어도 집안의 중심이 되고 화목한 가정의 버팀목 역할을 잘했습니다.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즐겁게 삽니다.”
-총동창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데, 회장직에서 물러나시고 8년여 시간이 흘렀습니다. 밖에서 바라본 총동창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총동창회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여전하지요. 12년간 무보수로 봉사했고 임기 초기에는 미주동창회 방문 여비나 총동창회 운영비를 사재로 채우기도 했지요. 총동창회가 밖에서 볼 때 단합되고, 투명하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회비나 장학기금 모금도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이희범 회장님이 잘 해주고 계셔서 기대가 큽니다.”
임 회장은 아쉬운 점이라며 서울대의 수월성 교육을 자극하기 위해 시작했던 ‘우수 강의 동영상 제작 지원 프로그램’의 단절을 언급하기도 했다.
“어렵게 이기준(화학공학57-61) 전 총장님을 모셔서 모교 교수님들의 우수 강의를 동영상으로 제작하는 사업을 지원했습니다. 그 중 몇몇 강의는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현재 코로나로 강의 동영상이 중요한데, 당시 동영상을 제작했던 교수님 중에는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분도 있습니다. 동창회가 상당히 앞서서 온라인 강의 콘텐츠 제작 사업을 지원한 건데, 연결되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임 회장님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도화동 장학빌딩을 떠올리는 동문이 많습니다. 건립 과정에서 어려운 점도 많았겠지요.
“장학빌딩을 짓기 전에 5층짜리 구 동창회관이 있었지요. 이 구 회관이 이미 재개발 지구에 세워졌었고, 30년 이내에는 그 자리에 또 재건축을 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묘안을 찾다 ‘재개발이 완료된 지역이라도 상업 또는 업무 지역에 한정해서 도시 주변이 급속한 발전과 변화가 있고 건물 크기를 극대화하는 경우 재건축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을 찾아내 재개발을 할 수 있었지요. 불가능해 보였던 재개발 허가를 받아 내면서, 구평회 당시 E1 명예회장과 김상하, 강신호 회장 등이 바로 10억원을 쾌척하기도 했지요. 저도 솔선수범의 차원에서 50억을 냈고요. 장학빌딩 건립기금 모금하고, 건설하는 동안은 사무직원 월급도 거의 동결하다시피 하고 모든 자원을 아껴 썼습니다. 그런 진심이 통해 18명의 동문이 10억원 이상씩 기부해 주시는 등 빠른 기간에 목표였던 300억원을 넘어 410억원을 모금했습니다.”
-장학빌딩 건립모금 당시 장학제도와 연계시켜 혁신적인 모금 방식이라고 외부에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울대 졸업생들이 모교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고 하면서 모금이 잘 안될 거라고 했지만, 저는 자신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명예를 중시합니다. 기부자 이름의 특지장학금 제도를 도입하면 기부금 모금이 활성화될 거라 생각했고, 역시 주효했습니다.”
-이제는 서울대 폐교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회장님 임기 초 왜 폐교론이 나왔고 어떻게 가라앉혔는지 궁금합니다.
“교육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잘못 표출된 것으로 봅니다. 총동창회가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교육의 수월성 밖에 없고, 공산 국가에서도 명문대학이 있다는 논리의 기고문을 각종 언론매체, 동창회보에 게재했습니다. ‘국가경쟁력과 교육의 수월성’이라는 저서를 7,000부 발간해 요로에 배포함으로써 폐지론을 일축 시킬 수 있었습니다.”
-회장님 인생에서 서울대는 어떤 존재입니까.
“제 인생의 길잡이이자 버팀목 같은 존재지요. 서울대에서 꿈을 키워 사업을 일으켜 사회에 봉사할 수 있었고, 어려울 때 많은 동문들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임광토건, 충북협회, 서울대총동창회 등에서 큰일을 해 오셨습니다. 가장 보람찬 일이라면요.
“장학빌딩 건립이지요. 또 충북협회장 시절 고속철도의 청주 역사가 배제된 것을 바로 잡아 청주 오송역을 유치한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많은 후배가 성공하는 삶을 꿈꿉니다. 그런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 주시지요.
“글쎄요. 저는 정직하게, 사심 없이 열심히 노력하면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원로로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로 인한 저 출산 추세는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합니다.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고 기업의욕과 근로 의욕을 높여 경제가 활성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총동창회에 대한 조언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많은 동창회 활동이 단과대학별로 이루어지다 보니 서울대에 대한 동창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습니다. 동창들 간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별, 직능별 동창회 활동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모교 방문 행사 등도 활성화되면 모교 사랑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임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난청 때문에 몇몇 질문을 바로 이해 못 해 미안하다고 했다. “금년이 94세예요. 살아있는 것만 해도 축복이지요. 제가 기계과 6회인데 매달 6일 청계천변 불고기집에서 모임을 했어요. 모임 끊긴 지 10년이 넘었네요. 그 친구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요. 대학 졸업하고 잠시 청주공고에서 교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6명의 학생을 서울대에 보냈는데, 강명한(기계공학55-59)이라는 제자가 있었어요. 그 제자가 ‘선생님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와서 만난 뒤 얼마 있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갔어요.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교사 시절 참 열심히, 무섭게 가르쳐 서울대에 6명씩 3년을 보내고, 그 이후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노 선배의 뜨거웠던 삶의 이야기는 긴 그리움과 함께 마무리됐다. 정리=김남주 기자
임 동문은
△1928년생
△충북대 명예 경제학 박사
△미8군 사령부, 24공병단 통역관
△교통부 공전국 기계과 근무
△미국 코사(COSA)무역 한국지사 부지배인
△한국항만협회 초대회장(5선)
△충북협회 회장(8선)
△충청일보 발행인, 본회 회장(6선) 역임
△현 한국항만협회 명예회장, 임광토건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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