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유경환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라 청산 가는 나비 훨 훨훨 벌을 지나 남빛 강을 건너 또 계곡을 날고,
나래가 아프면 청무우밭에 쉬고
나래가 지치면 절벽을 찾고 나래가
부러지면 남빛 강에 떨어져 죽고......
나래 – 그 부드러운 나래 한 쌍으로 하늘을 치며 하늘을 치며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나비의
꿈, 눈부신 햇덩이를 훈장처럼 붙이고 하늘로 녹아버린 나비의 가슴.
비바람 가려서 달밤을 날고 달밤을 나를 땐 전설 꽃무늬, 노을 속을 지날 땐 불꽃 무늬, 남빛 강을 건널 땐 청동 무늬, 모래처럼 쏟아진 별무리는 밤하늘에 흘리고 간 나비의 유언
끝없는 잠과 같이 숨 죽은 밤하늘 어디서든지 반드시 고운 여인이 죽어 가리라는 어지러운 춤 하늘에서 흩뿌리는 나비의 눈물 하늘에서 흐느끼는 나비의 시.
뉘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작은 목숨을 걸고 나래 치는 아름다운 넋, 풀잎에 이슬지듯 소리도 없이 남몰래 나래 치며 사라질 너, 너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부르고 나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불러라.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라 청산 가는 나비 훨 훨훨 벌을 지나 남빛 강을 건너 또 계곡을 날고 청산에 불 붙으면 나래에 불 당기고 불보래 속에서도 나래를 쳐라.
(시집 『감정지도』, 1969)
[작품해설]
이 시는 여린 ‘나비’를 통해 순수한 생명력의 순결⸱동경⸱희망⸱아름다움⸱불안 등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나비’는 모든 생명의 표상이자 이상을 꿈꾸고 있는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현재 ‘나비’는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 이것은 ‘나비’와 같이 아름답고 선한 존재일수록 훼손되거나 파괴될 수 있는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불안과 절망의 이중적 구조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 세계를 상징하는 ‘청산’을 찾아 끝없이 ‘나래 치는’ ‘나비’앞에는 ‘남빛 강’과 ‘계곡’으로 대표되는 많은 장애물과 위험 요소들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시인이 생각하는 위험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자유당 말기의 부정부패,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불의와 부패로 점철된 당시의 부정적 현실 상황이 아니가 한다. 실제 그는 등단 시절인 1950년대 후반에는 저항적인 현실 참여적 작품을 다수 발표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사상계』에서 편집부장까지 역임한 이력과, 『사상계』 사장인 장준하(張俊河, 1915~1975)와 동서(同壻) 관계인 것만 고려해 보아도 그가 등단 초기에 기울인 사회적 관심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전 7연의 산문시이면서도 단순함에서 오는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둘째 연만은 행 구분을 한 형태로 형식의 변화를 주었다. 또한 4음보 율격을 기본으로 한 동일 시구의 반복에 의한 유장한 리듬은 순수한 우리말 시어 ‘남빛 강’⸱‘청무우밭’⸱‘청동무늬’ 등 신선한 색채 감각과 함께 이 시를 한층 더 세련되게 느끼게 해 준다.
‘나비’가 ‘청산’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넓은 ‘강’을 건너고 깊은 ‘계곡’을 지나야만 한다. ‘나비’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부드러운 나래 한쌍’과 ‘청산’을 향한 ‘꿈’과, 그 ‘꿈’을 키워준 ‘가슴’뿐이다.
가는 도중 ‘나래가 아플’ 때는 ‘청무우밭’에서 잠시 쉴 수도 있지만, ‘지치’거나 ‘부러지’게 되면 ‘절벽을 찾’거나 ‘강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나비’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산’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나비’의 비극이 있다. 그 까닭을 6연의 끝 구절 ‘너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부르고 나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불러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비’라는 존재은 ‘뉘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작은 목숨을 걸고 나래 치는 아름다운 넋’의 소유자이기에 잠시도 현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비록 ‘풀이에 이슬지듯 소리도 없이 남몰래 나래 치며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해도, 이상을 향한 끝없는 몸부림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운명이자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청산’으로 표상된 이상이 있어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청산’을 향한 끊임없는 날갯짓과, 그것의 좌절 및 죽음이 있어 진정 아름답다는 논리이다. 이런 까닭에 ‘천산’을 향한 ‘나비’의 몸짓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 된다. ‘나비’에게 ‘날개’가 없다면, ‘청산’을 향한 강한 열망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나비’이겠는가. 그러므로 ‘청산에 불 붙’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나비’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 자신의 ‘나래에 불 당기고’ 그 속으로 결연히 뛰어드는 것이다. ‘청산’으로 가는 여정이 마르리 고통스럽다 해도, 더구나 ‘볼보래’뿐인 이사이라 해도 그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날갯짓, 이것이 바로 나비를 나비이게 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유경환(劉庚煥)
1936년 황해도 장연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및 언론대학원 졸업
195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시 「아이와 우체통」 가작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바다가 내게 묻는 말」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0년 현대문학상 수상
1981년 대한민국문학상(아동문학 부문) 수상
2003년 제15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조선일보 논설위원 및 문화일보 논설고문 역임
현재 한국아동문학교육원 원장 및 『열린 아동문학』 주간
시집 : 『감정지도(感情地圖)』(19609), 『흰 사슴』(1972), 『산노을』(1972), 『아기 사슴』(1974), 『흑태양』(1974), 『고전의 눈밭에서』(1975), 『이 작은 나의 새는』(1977), 『누군가는 땅을 일구고』(1981), 『겨울 오솔길』(1986), 『촛불 한 자루 마주하고』(1986), 『노래로 가는 배』(1992), 『원미도 시집』(1997), 『낙산사 가는 길』(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