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잉크병 (외 3편)
최승호
은하계 한구석 다 망가진 별에서
글을 쓰는 개미,
그것이 나다
머리는 큼직한데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글개미
밤마다 검은 잉크들이 나를 기다린다
검은 침묵 속의 언어들이
글개미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불립문자 앞의 바보,
침묵의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글개미의 팔자는 이렇게
백지 안에서 더듬거리고 맴돌며 뻘뻘거리다
눈알이 딱딱해지는 새벽을 맞이하는 것일까
발을 하나 들어 머리를 긁적이는데
이것 봐라
책상 아래로
쿵!
개미 머리통이 떨어진다
천둥소리
뭉게구름 속의 저 고요는
137억 년 전
아니, 그 이전에도 있었던 고요
뭉게구름 속의 저 고요는
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고요,
절대로 죽지 않는 고요,
그 고요의 만발처럼
떠 있는
뭉게구름 속에서
오늘은 천둥소리도
연꽃 속의 수줍은 심청이처럼
잠자고 있네
취한 밤
데킬라 몬테알반 술병 속에는
선인장(仙人掌) 애벌레가 들어 있다
날마다 술에 절어
바닥에 누워 있는 벌레,
술꾼들은 그 미해탈의 나비를 씹어먹곤 한다
늦은 밤의 바에는 늘 취한 사내들이 있다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자
혀가 꼬여 돌돌 말릴 때까지
마음껏 헛소리를 지르자
술꾼들이란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하는 낙타들이다
사막의 심장에 독한 술을 들이붓는 낙타
잔뜩 취해 뇌를 뭉개버리고 싶은 낙타
나도 늘 취해서 사는 것 같다
나비의 꿈속에서 살았던 장자처럼
백일몽 속에서 늙어가는 허깨비처럼
언젠가는 나도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내 안의 끈질긴 괴물
허무와 싸우면서 말이다
어느새 날이 밝았는지
어찌된 영문인지 바에는 나밖에 없다
빈 술병들, 빈 의자들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쓰레기 안주들,
빈 술통을 짊어진 낙타처럼
나를 쓰레기투성이 오아시스에 내버려둔 채
모두들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일까
그로테스크
사나운 빗줄기가 유리에 흘러내리고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일 때,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놓을 때,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불현듯 그 기이한 문어를 떠올렸다. 발 하나를 떼어내듯 자신의 음경을 어둠 속으로 출발시키는 문어를.
달의 뒷면으로 하강하는 달착륙선처럼, 그것은 목표물을 향해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태고의 흑암이 깔려 있는 바다에서 그 괴상한 음경은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을까. 눈 먼 채 개흙에 우글거리는 먹장어들이나 입 큰 아귀, 왕코브라처럼 성질 사나운 곰치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눈앞에 벼락불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고 사방이 점점 더 캄캄해진다.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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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 1954년 춘천 출생.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진흘소를 타고』『세속도시의 즐거움』『회저의 밤』『반딧불 보호구역』『눈사람』『여백』『모래인간』『그로테스크』『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고비』『북극 얼굴이 녹을 때』. 현재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