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말씀의 초대
암몬 사람들과 맞서
싸우던 판관 입타는, 집으로 돌아갈 때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는데, 그의 외동딸이 그를 맞이한다. 입타의
딸은 아버지에게 서원을 지키라고 말하며 자기를 번제물로 바치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비유하신다. 초대받은 이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자, 임금은 아무나 잔치에 불러온다. 그러나 초대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지 않은 자는 잔치에서 쫓겨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코헬렛은 “서원을
하고 채우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5,4)고 충고하고, 벤 시라는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 주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 마라.”(집회 18,23)고 권고합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고대 근동 지방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에서도 발견되는 관습이었지만, 나중에는 금지되었습니다. 자기의 서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않고 서원을 했다는 측면에서, 입타는 진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서원을 취소했어야 할까요? 하지만 아무리 신중을 다한다 해도
서원할 때 그에 뒤따르는 결과를 모두 알아서 서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알지 못하는 미래를 내어 맡기는 것이
서원입니다. 입타 이야기는 주님께 서원한 것은 깨뜨릴 수 없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부부의 경우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계산해 보고 살펴본 다음에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열심히 살다가 가족 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엄습할 때, 결혼 당시
예상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결혼을 취소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입타의 딸은 자기가 죽어야 할 처지인데도 아버지의 서원을 지켜 줍니다. 기상천외한
이런 일을 맞게 될 줄 몰랐다는 것이 결코 하나의 구실이 될 수 없었습니다. 모든 혼인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면서도 서약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도 서원이나 혼인 서약은, 내가 알 수 없는 미래 전부를 몽땅 하느님이나 상대방에게 맡기는 숭고한 약속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후렴).
초대받지 않은 손님 -이연수- 혼인 잔치는 그야말로 축복의 자리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하객들은 저마다 청춘남녀 한 쌍이 부부로 연을 맺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평생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들을 맘껏 축복해 주니까요. 자신들의 혼인인 양 모두 얼굴이 환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받은 이들은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부르러 온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의롭고 경건한 이들이거나 아니면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임금의 명에 따라 거리에 나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아무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세리들과 죄인들처럼(루카 15,1), 이스라엘의 주변부, 끄트머리에 있는 소외된 이들이겠지요. 그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전하는 구원의 말씀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그렇게도 멸시한 천민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을 비유로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 비유 말씀은 일상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듯이 보입니다. 아마도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함께 식사하는 당신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상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모으는 잔치에 우리도 기꺼이 동참하고 흥겹게 놀아 보면 좋겠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초대? -고성균 수사-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일 가운데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중요성은 당사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가정주부라도 어떤 이한테는 요리를 잘 해서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이한테는 청소를 잘 해서 가족이 쾌적하고 정돈된 환경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른 일보다 그 일에 더 정성을 기울인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중요하지 않은 일은 그리 급하지도 않고 대충해도 괜찮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아마 ‘그냥 가서 밥이나 한 끼 얻어먹자.’는 생각으로 잔칫방에 왔나 봅니다.)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온 사람은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임금에게 혼인 잔치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이 초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혼인 잔치에 맞는 예복을 갖추어 입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은 급하지도 않고 대충해도 될,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불과합니까? 미사·기도·봉사·자선·양심에 따른 삶 등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잔칫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성껏 임해야 할 우리의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아랑곳 않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들 -김찬선신부-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혼인잔치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이 잔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초대받습니다.
잔치하면 즉시 즐거움, 풍성함 이런 것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즉시 달려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이는 마치 어떤 음식점이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먹으러 오라 해도 그 음식이 싫으면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하러 가고 돈 벌러 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잔치 초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 부류의 사람들도 이 세상의 사교 파티에는 기꺼이 달려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초대에 아랑곳은 하지만 잔치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로 비유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혼인잔치에는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고 어떤 예복이 어울립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나라이기에 사랑이 예복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드님의 혼인잔치이니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사랑이 우선입니다. 다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늘나라 잔치 참석자들은 다 사랑의 예복의 입고 있으니 이 참석자들과 어울리려면 이웃 사랑의 예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잔치에 불참자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잔치에 아랑곳 하지 않는 이들과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 안소근 수녀-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아들의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하는 임금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언제나 하나의‘초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받은 이들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두 번에 걸쳐 손님들을 초대합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계속 손을 내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친교,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원한다면 그 초대에 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밭으로 일하러 가거나 장사하러 간 사람들처럼 그 분의 손길을 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말이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너그러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우리를 위한 초대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구원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선물을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선택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길을 가다보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그런데 그들의 복장을 보면, 쫙 달라붙는 것은 물론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장을 저 역시도 똑같이 하고 있지요. 이런 저를 보시고 자전거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민망하지 않습니까? 옷이 화려한 것은 둘째라고 쳐도 너무 달라붙어서 쑥쓰러우실 것 같아요.”
하긴 저 역시 처음 자전거를 타기 시작할 때는 이러한 옷을 어떻게 입을까 싶었지요. 꼭 이런 옷을 입어야 자전거를 잘 타는 것도 아닐 텐데, 쑥스럽게 이런 옷을 왜 입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전거 선수도 아닌데 헬멧과 장갑을 끼는 것도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복장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을 보다보니 그렇지 못한 제 자신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편안한 옷과 야구 모자를 쓰고 타는 제가 더 민망해지더군요.
결국 저 역시 쫙 달라붙고 화려한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헬멧과 장갑도 구비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하며(그래야 운전자가 자전거 타는 사람을 쉽게 발견해서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 각종 안전을 위해서도 헬멧과 장갑은 필수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과 장비들은 바로 편안함과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비를 갖추어야 하느님 나라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장비는 소위 사랑이라는 이름의 장비로,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하고 대신 남들이 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사랑이라는 장비가 왠지 약해 보이고, 민망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멀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을 외치고 실천하는 사람, 어때요? 좀 약한 사람 같고, 바보 같아 보인다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이 약해 보이고 민망하기도 한, 사랑의 장비 없이는 도저히 입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모든 이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혼인잔치에 오기는 했지만 예복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이라는 장비를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이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이기에 결국 쫓겨나고 말지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 등은 순간에 불과한 이 세상 안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갖추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한 답이 요구되는데도 이 답을 쓰기가 참 어렵지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차이는 한 사람의 결심에 달려 있다.(토미 라소다)
바쁩니다 - 윤원진 신부- 오늘도 바쁩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오늘도 24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이번 주만큼은 저녁기도, 아침기도를 빠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건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해야 할 일들에 떠밀려 십자가 앞에 앉기 힘듭니다. ‘이해해주시겠지…’, ‘용서해주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애써 위안해보지만 이러한 불안함 속에서도 선뜻 그분께 시간을 내어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하느님이 내 앞에 나타나셔도 “조금만 있다가요”라고 미룰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만 하고요”라고 모른 척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3). 이것이 본래 제가 당해야 할 심판인데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저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이 원고를 당장 덮고 기도부터 해야겠습니다.
부르심과 선택 -전삼용신부- 보좌신부로 있을 때 한 자매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따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승을 따라한다는 말은 자신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 했기 때문에 물위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판단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저의 판단기준은 무조건 ‘겸손함’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참으로 겸손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저를 나무라고 가르칠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를 키울 정도의 스승이 못 되니 안 되겠다고 적당히 거부하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참으로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오랫동안 졸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청하자 저는 “제자는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면 제가 하는 기도들이 이러이러한데 이것을 일 년만 빠지지 않고 매일 하실 수 있다면 제자로 받아줄게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은 자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분은 더 이상 제자가 되겠다는 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몇 달 하다가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신랑의 의복을 입고 있다면 그 사람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부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복을 입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승을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복을 갖출 수 없는 사람은 비록 받아들여졌더라도 아직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 즉 하느님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초대했던 그 백성은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이 보내신 예언자들과 아들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따라서 누구도 초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까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하느님은 공평하게 초대하신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교회 안에도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의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받았지만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맙니다. 이는 교회엔 나오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미사에 나온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결국 ‘부르심’은 다 받았지만 ‘선택’된 이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들은 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지만 사실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그건 하느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또 사제가 되었다고 해서 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니 사제가 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스승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야만 선택받은 자로 남게 됩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택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과연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다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부르셨다면 일부러 죄짓게 만드셨다는 뜻이기에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12사도에 당당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왜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는데 받아들여졌을까요? 이는 유다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해 한 몫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자신이 그 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건들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현세적인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데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선택받지는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원하는 모든 사람은 다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다 선택받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합니다. 이 의복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잔칫상에까지 앉았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쫓겨나지 않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잊지 못할 녹색 영대> -양승국신부- 언젠가 수 백 명이나 되는 교구, 수도회 신부님들과 함께 하나의 중대한 지향을 두고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리 도착한 공문에 분명히 "영대 색깔은 백색"이라고 적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깜박깜박 잘하는 저였기에 나중에 보따리를 펼쳐보니 녹색이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하다가 "나말고도 나 같은 사람 분명히 몇 사람 있을거야?"하고 입장을 했는데, 왠걸 그날 따라 다 하얀 색깔인데 저 혼자만 녹색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튀는 걸 죽어도 싫어했던 저였기에 "나만 혼자 녹색"이라는 것 때문에 미사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며 보냈습니다. 녹색 영대로 인해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시선이 저한테 쏠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일을 떠올리며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과도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중요한 예절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상식 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추리닝 차림으로 왔다면 분명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필요한 품위 있는 고급 정장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인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짐"이란 예복입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은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초대 -임문철 신부- 성령기도회나 ME 강의를 나가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예상만큼 모이지 않아 준비한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절해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나마 오기로 약속한 이들마저 펑크를 내 이렇게 작은 수로 모임을 진행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봉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처럼 황당하고 허망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인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다 늦기만 하여도 화가 날 터인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하찮은 일상사를 돌보느라 오지 않고,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니 이런 모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이라면서도 하느님에게 거저 얻는 구원이기에 우리가 너무 값싸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 하도 마음 좋은 분이시라 너무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억지를 부릴 줄 모르시는 우리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며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 상처받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기회를 주시는 우리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찢어지고 버려진 예복 -한명수 시인-
태중교우인 나는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대로 봉사하며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나 또한 조금씩 그런 물에 젖어들었다. 청소년기를 막 벗어날 무렵 나는 학교 공부뿐 아니라 본당과 교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다. 어느 날 본당 선배가 “미카엘은 참 부지런하구나. 그렇게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을 보니 사회에 나가면 돈 많이 벌겠는데!” 하는 게 아닌가.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지내면서, 교회 일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요즈음 그 선배의 말이 가끔씩 떠오른다. ‘돈’이 나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보다 ‘개인의 의’를 먼저 찾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일이 주어지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합당한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데 오히려 입고 있는 예복조차도 하나씩 벗으며 살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 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찢어지고 버려진 예복을 다시 깁고 다림질해야겠다.
외국의 한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를 -임영숙 -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던 길에 관광명소가 된 외국의 한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를 찾게 됐습니다. 워낙 유명한 곳인지라 신자·비신자가 함께 동행한 길이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우스갯소리로 말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성모 마리아 유치 운동을 펼쳐야겠네.” 모두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조금 듣기 거북했습니다. 얼마 전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세례를 받기로 했는데 약속한 날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귀국 후 그분을 잘 아는 작가 최인호 선생을 만나서 그분도 세례를 받을 마음이 있는 듯하다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분을 선택하는 것이지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총과 축복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분은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뽑히지는 못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는 오늘 복음은 세례를 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즉각 일어나 그분을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 부르심에 적극 응답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지요. 그러나 임금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고, 그를 부르러 온 임금의 종을 붙잡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듯이 오늘 우리가 쫓는 명예나 돈, 안락함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 뜻에 따르는 것이니까요.
주님,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헤아리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
-전수홍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임금의 아들은 그리스도이며, 첫 번째 나오는 종들은 예언자들이고 그 뒤에 나오는 종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잔치 풍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이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되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 아들의 잔치에의 초대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그들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받음은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저 주는 은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외면하기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참된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종들에게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는 임금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 선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런 사랑과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하는 것과 우리 신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나 창녀나 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 초대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되어 있었으며, 이런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시켜 설명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베푸는 천상잔치에 어울리는 옷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회개와 굳은 신앙의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잔치는 기쁨의 잔치이지만 또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십자가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을 우리는 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지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란 싫은거고 없으면 좋은거고 나와는 상관없어야 하고, 그냥 장식품으로만 남아 나를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길을 내 안에서 걸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늘 우리들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에 걸맞는 삶을 예수님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오늘 하루도 기쁘게 생활하도록 합시다. *
- 박기흠 신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라고 이스라엘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주님께 뽑히기 까지 그 삶의 수고를 다해야 하지만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탄식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늘나라란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는 비유로 시작하십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인지라 '모든 것'(4절)은 그야말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여러 번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임금이 초청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자리이며, 개인에게는 그러한 자리에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왕의 초청을 거절한 간이 아주 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왕의 초청에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3절) 왕이 다시 두 번째로 초청하였을 때 그들은 아예 그 초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4절) 그리고는 각자 자기의 일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5절)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6절)
그러자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노하였고,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리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찌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보낸 임금님 자신의 종들까지 욕을 보이고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 잔치에 빈자리를 원치 않으시고, 초청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라도 그 자리를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구별 말고 만나는 누구든지 다 데려오니 혼인 잔치 자리에 이제야 손님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왕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버림을 받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업신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그 행운이 넘어왔고, 죄 많은 우리 역시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임금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오직 초대하신 분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가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예복은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잔치가 시작되기 전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던 임금님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임금님의 눈에 띄었던가 봅니다. 그가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종에 의해 아무렇게나 불려온 그들이 임금님의 수많은 종들에 의해 좋은 예복으로 잘 입혀 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 입기를 완강히 거절하였기에 쫓겨 나갔다고 가정해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호통에 의해 그는 손과 발이 꽁꽁 묶여 바깥 어두움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거기서 통곡하며 슬피 울고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져 담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꼭 입어야 할 그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 27) 우리가 받은 세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똑같은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한 공동체이며, 나뉠 수 없는 연대를 상징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늘나라와 관계된 불가분의 시민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복을 잘 갖춰 입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로 살아야 할 산 신앙은 더욱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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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