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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創氏改名)-일제강점기 한국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던 일
1. 일제강점기 말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던 일
조선총독부에서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던 것을 말한다.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한다. 한국의 성명(姓名)을 일본식 시메이[氏名]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創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에서 보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조했다.
1.1.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 민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梅謙次郎)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면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없애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되고 우메 겐지로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해졌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정서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겼고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계획이 아주 포기되진 않아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다. 얼마 후 3.1운동이 일어나 이 계획은 유보되었지만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이에(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창씨개명 2안을 수립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한편 일본 내부에선 동경제국대학 교수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교수를 필두로 조선을 점진적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나쁨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를 우러러보게 한 다음에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2대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 등이 채택했으니 이게 바로 문화통치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선 식민지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 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의 벤치마킹이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는데 오히려 격렬한 반발로 식민통치가 어렵자 동화엔 관심이 없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하여 내놓은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선 이런 점진적 동화가 급진적 동화로 바뀌었는데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1.2.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우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시키기 위한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나미 지로는 가혹한 탄압으로 조선 내부의 독립 운동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이에 고무된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를,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를 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조선인의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내지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에 조선, 중국식 성을 폐지하고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를 강요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조선인과 대만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고 그 증거로 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며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이란 용어도 적극 사용했다.
우선 일본은 조선의 지식인층을 단속하기 위해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체포했고 이들에게 극심한 고문을 가하며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끝내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구속된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 정책에는 차라리 자신들을 죽이라고 거의 미친 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프라이드가 높은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의 강요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3.1운동을 뛰어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끝내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다.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성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 자발적으로 창씨한 사람은 신고(또는 설정) 창씨였다. 과거에는 자발적으로 바꾼 설정창씨와 강제로 이름을 바꾼 법정창씨로 구분되었으나 조사결과 설정창씨와 직권창씨를 따지지 않고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당연히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해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궁극적으로는 한반도를 식민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하려던 계획이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전쟁에 어떻게든 조선인을 좀 써먹어보려고. 사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애써 피하려고 했다. 왜냐고? 안그래도 차별받으며 사느라 감정이 나쁜 조선인을 군대에 억지로 집어넣고, 무기까지 쥐어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인을 배제만 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했던 것. 내선일체 항목을 보면 딱 나온다. 징병과 징용의 시행 때 일부 친일파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지껄인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이런 우려 대로 징집이후 도망쳐서 중국군이나 광복군에 합류한 조선인도 나타났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외관은 매우 닮았기 때문에,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외견과 법적으로도 조선인과 내지인 즉,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 하기도 했는데, 같은 이유로 거부당했다. 식민지배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고 적용하는 법률이나 가하는 형벌 등도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조선인보다는 분명 낫겠지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는데 이게 마냥 좋아할 일이겠는가? 그래서 이 정책이 민족 말살 정책의 핵심적인 위치로 지목받는다. 오히려 식민지 초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외형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사실 자체를 일본인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실제로 3대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인 테라우치 마사다케는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다.
나름대로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준비해서 건국기원절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 대만과 동시에 6개월의 시한을 주고 '자발적으로 창씨하셈'이라고 집중적으로 광고를 때렸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의 수속을 매우 편리하게 해주었고 비용도 깎아주었다.
미나미 지로는 매우 느긋한 태도로 조선인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으로 폭발적인 신청 접수가 있으리라 예견한 나머지 총독부에서 현장 격려공문까지 발송했을 정도였는데, 그날 하루 전국에서 고작 48명만 창씨를 했고 이로 인해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총독부는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독촉하면서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려야 했다. 하지만 2월 말까지 호응은 겨우 0.26%였고 두 달이 지나도 1.07%였다(...).
전국의 유림과 문중의 강력한 반발로 접수율은 터무니없이 낮았고, 시한의 절반인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에 불과했다. 7.6%라는 경이적인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혀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켰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게 된다. 당시 신문들은 xx군 xx% 달성! 이란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는 등 총독부의 강제력을 매우 절실히 입증한다.
통감부 시기에는 일본에 아부하거나 이득 좀 보겠다는 이유로 자발적인 창씨개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애초에 창씨개명 1호라는 이동인 같은 경우 누가 강요했을 리 없고, 송병준 역시 경술국치 시기 정도 되면 이미 일본식 이름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인의 일본식 이름 사용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이런 떡밥 때문에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는 둥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하며 망언을 지껄이는데, 대꾸할 가치도 없는 병크. 애시당초 조선을 일본 내로 영구 편입하려던 계획의 일부일 뿐이며, 설령 조선에 도움을 주더라도 그걸 강제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덧붙이자면 창씨개명은 조선 이름을 공식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 게다가 성을 만들 때도 고대 일본 귀족 성씨인 원평등귤은 쓰지 못하게 했으며, 일본 무사계급의 유명한 성들로 창씨개명하는 것은 애당초 거부했고, 조선인들은 조선인임을 알 수 있는 성씨로 창씨개명을 하게 시켰다.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락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 현재도 2ch 등지의 혐한초딩들 사이에서는 "~라는 성씨는 재일" "~는 이런 점을 볼때 재일"이라는 식의 발언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의 '차별의식' 자체가 그대로인데, 이런 정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창씨개명의 결과는 한민족을 문화적 정체성조차 상실하였지만 여전히 차별을 받는 열등한 2등 일본인으로 만들 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자주 거론되는 것이 당시 유명인사 중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발견된다는 이유로 자발적인 정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그건 창씨개명이 자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선전용. 참고로 해방 직후 친일파 1명이 자기는 창씨개명도 안 했다고 반박했지만 반민특위의 이 말에 버로우 탔다.
진짜로 일제측이 창씨개명을 강요했어도 꿋꿋이 개명 안 하고 버틴 사람 중 한 분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있다. 훌륭하신 분이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그 당시 일제가 넣은 압박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 버틴 사람이 대단하신 것이지, 못 버틴 사람이 약한 건 아니다. 또한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일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독립 의지와 민족 정체성이 뚜렷했던 독립 운동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말그대로 평범한 민중이었을 뿐이기에 민족성도 없는 무지한 민중이었다고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한 남성혐오 페이스북에서 시대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지도 않고 글을 올려 비판받고 있다.
의외겠지만, 창씨개명을 거부한 이들 가운데는 친일파도 있었다. 어느 친일파는 거액을 총독부에 헌납하고, 악랄하게 사업을 하여 악명이 높았는데 창씨개명에 죽어라 반발했다. 심지어 창씨개명을 하느니 그냥 죽겠다고 대들었다. 되려 창씨개명을 관리하는 일본 관리들이 그를 설득해야 했는데 그동안 친일파로 잘 활동하던 사람이라 이랬으니 그들도 당황다. 하지만 이런 설득에도 그는 이름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버티다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을 메어 죽은 이도 있다. 그러니 창씨개명 거부했다고 죄다 저항하던 항일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홍사익 같이 일본군에서 장성급에 오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인물도 있다. 근데 이 경우는 일제가 정치적/정책 선전 이유로 안해도 터치 안한 듯. 사실 조선인과 천황의 신민, 두가지 정체성을 내세운 사람에게 굳이 창씨개명을 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한편 세벌식으로 유명한 공병우 박사는 창씨개명하라고 하니까 본인이 사망했다는 사망신고서를 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안동 권씨의 경우 안동의 안(安)과 권(權)을 따서 안켄(安權)으로 창씨했으며 더러는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여 안도(安東)로 창씨한 경우도 있었다. 노(盧)씨의 경우, 시조가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쌍제촌(雙悌村)에 살았기 때문에 오카무라(岡村)로, 하동 정씨는 고향인 하동(河東)을 일본식으로 훈독한 가와히가시(河東)로 창씨했다. 참고로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다. 고령 박씨의 다카기(高木)의 경우에는 박(朴)의 목(木)자와 고령 박씨의 고(高)자를 따서 만들었다.
남(南)씨나 류(柳)씨, 임(林)씨, 계(桂)씨, 오(吳)씨는 창씨개명을 안해도 좋았다. 미나미(南)나 야나기(柳), 하야시(林), 카츠라(桂), 쿠레(吳) 같은 성씨는 이미 일본에도 있었기 때문에 안 해도 알아보지는 못했다는 듯. 반대로 진짜 일본인인 미나미나 야나기 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선인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 가뜩이나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이 사람의 이름을 조선식으로 읽으면 류종열이라, 전혀 위화감이 없는 조선식 이름인 바람에 조선인으로 인신공격 당한 일도 있다.
이것만 봐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없애고 동등하게 대우하려 창씨개명을 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웃기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민중들에게 조선 총독이 임금이나 다름없이 보였음을 방증하는 사례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 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오래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한국에서는 성씨가 같다는 것은 분명 몇 대 조상의 위에서엔가는 혈연이 있다는 뜻이다. 사실 조선 말기의 족보매매로 '구매한 성씨'와 그렇지 않은 성씨의 분간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실제로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가 창씨개명으로 훼손된 경우는 생각보다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남궁(南宮)씨의 경우에는 성이 두 글자인데다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미나미노미야' 같이 읽을 수 있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이는지라,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일본어 훈독으로 '츠카사소라'가 되는 사공(司空)씨도 마찬가지. 다른 2글자 성인 독고(獨孤), 선우(鮮于), 제갈(諸葛), 황보(皇甫)씨는 일본어로 읽었을 때 다소 위화감이 있는지라, 본관 등을 따서 창씨를 하긴 했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으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되는 셈. 박(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키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신라시대에 건축 기술을 일본에 전해줬다는 의미로 '신라의 우물' 의 의미를 담은 아라이(新井)이나 마츠이(松井)도 많이 썼다. 일본에도 이미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도 없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
전주 이씨의 경우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쿠니모토(國本)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약방'이었다.
이밖에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田(타), 山(야마), 原(하라), 川(카와), 村(무라), 本(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 당시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를 강요받았다 기존 국적이나 조선적을 계속 유지하면 되지 않느냐고?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항목 참조. 다만 손정의의 경우에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인인 자기 부인을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역관광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한자+인명용 한자+상용한자+카타카나+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한자+인명용한자+카타카나+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다섯 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한자, 한글 불문.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를 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 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예를 들어 사토(佐藤)라는 사람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원칙적으로는 성을 한글로 '사토'라고 써야 하며,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佐藤을 성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무조건 좌등으로 읽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 성씨를 한국식 독음으로 쓰는 예가 양산시에 거주하던 망절씨. 독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박사도 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는데, 당연히 공문서에는 순한글 성씨 및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이 다수 나온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든다란'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고유명사이니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지 무슨 귀화를 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이유가 전혀 없다. 차라리 일본에서만 쓸 통명 내지 별명이라도 만들면 모를까.
창씨개명 거부자에 대한 조선총독부 불이익 조치들
1940년 창씨개명 제정 이후부터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거부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내렸다.
○ 직장/노무
⌕ 조선인 중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해당자를 즉시 해고한다. 다만 창씨개명에 참여하였던 자는 복직을 할 수 있다.
⌕ 각 직장 및 노무사(社)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의 고용 및 입사 등을 절대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봉급 급여를 불허하거나 삭감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함과 동시에 해당 직장을 강제 폐쇄 조치한다.
○ 학교/교육
⌕ 조선인 학생 중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의 경우 해당 학교 교장 및 교사는 해당 학생들에게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교직원들도 창씨개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어긴 교장 및 교직원은 즉시 학교에서 제명 및 해고 처리를 당하며 학생의 경우 즉시 정학 및 퇴학 조치를 한다. 학교 집단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는 입학을 불허하며 교육 대상에서도 전면 제외한다. 학교 중 조선 성명을 쓰는 학생의 입학을 무단으로 허가했을 경우 해당자는 엄벌에 처하며 해당 학교도 폐교 조치한다.
⌕ 학생들은 물론 해당 학생들의 부모나 직계 가족 등도 모두 창씨개명을 해야 하며 이를 어기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 전원을 처벌 대상으로 올린다.
○ 교통/수송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 승객은 모든 교통편 이용을 불허한다. 또한 1등석 등 객차 이용도 절대 불허한다.
⌕ 철도 수송화물에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 역시 수송 이용을 불허하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처리한다.
○ 기타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은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물자 및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 조선인 성명을 사용하는 자는 행정기관 민원 사무에서도 불허 대상이며 민원상담의 일체를 금한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일본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 간주하며 군헌병과 경찰 등을 통해서 요주의 사찰 대상으로 선행한다.
⌕ 창씨개명 제정 이후 출생한 조선인 신생아는 무조건 일본 성명으로 먼저 짓거나 단독으로 지어야 하며 조선 성명 단독으로 짓거나 일본 성명과 병행해서 짓게 될 경우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해당 부모는 엄벌에 처한다.
빠스껫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을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이 항목을 자세히 읽어보았다면 당연히 알 수 있겠지만 '창씨개명을 한 사람=친일파'인 것은 절대 아니다. 시인 윤동주씨도 창씨개명을 했지만 친일은 절대아니었던것.애초 1941년 기준으로, 조선인의 81.5%가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렇다면 절대다수의 조선인이 친일파란 뜻이 된다(...). 정말 그렇다면 오키나와처럼 미군정을 거쳐 결국 일본에 귀속됐든, 대만처럼 지금까지 친일 열기가 후끈하든 했을 것이다. 당시 학교 진학 및 취직 등 현실상 어쩔 수 없이 했던 사람이 대다수이며, 김대중처럼 부모가 창씨개명을 한 사례도 있다. 드물긴 하지만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도 창씨명을 가진 분은 많다. 물론 아래에 나열된 사람 중에 친일파도 있지만 유명인물의 창씨개명 사례를 가지고 해당 인물을 친일파라고 단정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래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저항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 중에서도 창씨개명을 한 사람도 제법 있다. 항목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만, 친일파 여부와 창씨개명의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악질 친일파 중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도 꽤 된다. 왜냐면 악질 친일파라서, 굳이 창씨개명까지 해가며 충성심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창씨원리와 상관없는 내용은 주석처리바람.
○ 강만길 - 쿄다 만키치(姜田萬吉) : 강/만길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인 - 콘도 후미히토(金東文仁) : 김동/인으로 분리하여 '김동'으로 창씨한 다음, '인' 앞에는 문학을 뜻하는 文을 넣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한자는 같지만 金이 빠진 東文仁이라는 기록도 발견되기 때문에 콘도가 아니라 히가시(東), 혹은 가네히가시(金東)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김동환 - 시로야마 아오키(白山靑樹)
○ 김영덕 -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徳) : 성씨인 金에 본관인 언양의 彦을 넣어 창씨했다.
○ 김영삼 - 가네무라 코스케(金村康右) : 김강우? 성씨인 金에, 흔한 일본식 성씨의 접미사인 村을 합성한 창씨. 가네다, 가네야마 등과 함께 김씨들이 흔히 사용한 창씨다.
○ 김대중 -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 : 김해 김씨인데다 흔한 김씨들의 창씨명과는 다른 '도요타'를 사용한 것이 다소 특이.
○ 김성근 -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
○ 김종필 - 가네무라 슌에이(金村俊英) :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
○ 김재규 - 가네모토 겐이치(金本元一) : 가네모토 역시 당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이다.
○ 김활란 - 아마기 카츠란(天城活蘭) : '활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덕술 - 마츠우라 히로(松浦鴻) : 한자 鴻에는 기러기라는 뜻도 있지만 넓다는 뜻도 있어서 히로라고 읽은 것이다.
○ 리덩후이(이등휘) -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
○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 본관인 고령(高靈)에서 高를 따고, 朴에서 木을 따 창씨하였다. 고령 박씨들의 흔한 창씨법.
○ 박중양 -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 '중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창화 떡밥왕 - 오바라 마사카즈(小原昌和) : '창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정자 - 타야마 사다코(田山貞子) : '정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백석 -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 : 이름 '기코'는 백석 시인의 본명 '기행'을 그대로 썼다. 시라무라는 본래의 성씨인 白에, 일본식 성씨인 村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
○ 백선엽 -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대장과 같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요시노리가 당대의 유명인사였다는 점과 창씨개명 시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일 수도 있다. 시라카와는 앞서 백석 시인처럼, 본래의 성씨에 일본식 성씨인 川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이다.
○ 서정주 - 타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 본관인 '달성'으로 창씨했다. '달성'을 일본어식으로 읽어도 위화감이 없으므로, 본관이 그대로 창씨로 사용되었다.
○ 송병준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 : 조선인 최초로 창씨개명을 하게 된 인물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동인이 훨씬 빠르다. 다만 이 이름을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 어쨌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노다 영감', '야전 대감'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 신격호 - 시게미츠 타케오(重光武雄). 신씨들은 본관이나 성씨의 합성명이 흔한 것과 달리, 주역의 간지를 따라 창씨한 예가 많다. 그에 따르면 신은 중광이 되는데, 중광을 일본어로 읽으면 일본에서 흔한 성씨인 시게미츠가 되므로...
○ 신현확 - 히라하야시 유쿠니(平林佑國)
○ 심영 - 아오키 진에이(青木沈影) : 예명인 '심영'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창씨만 하고, '심영'은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아오키(青木)라는 창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을 변형한 것.
○ 쑨원 - 나카야마 쇼(中山樵) : 쑨원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도쿄의 히비야 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그 근처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저택이 있었고 이 글자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의 호와 창씨명으로 썼다. 중국에서는 쑨원이란 본명보다는 창씨에서 유래한 호를 붙인 '쑨중산 선생'으로 더 많이 부른다.
○ 우장춘 -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 나가하루는 장춘(長春)의 일본식 독음이고, 스나가란 성은 그가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자로 들어가면서 얻게 된 성씨이다. 다만 해외 논문 등을 발표할 때에는 '나가하루 우'(Nagaharu U)로 쓰는 등 우씨 성을 고집했다고 한다.
○ 윤동주 -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 : 성만 일본식으로 바꾸고, '동주'는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치호 - 이토 치코(伊東致昊) :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 자를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이광수 - 카야마 미츠로(香山光郞) - 香山은 일본의 1대 천황인 진무 천황이 도읍으로 정한 나라현 가시하라(橿原)시 인근의 산인 카구야마(香久山)에서 가져왔으며, 광수(光洙)의 光과 일본식 郞을 합쳐 이름으로 삼은 것.
○ 이동인 - 아사노 토진(朝野東仁) : '동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朝野라는 창씨명은 '전주 이씨 → 조선'에서 온 듯.
○ 이명박 -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 일본 출생으로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따라서 통명이었던 아키히로가 주가 되어, 그것을 그냥 한국이름 '명박' 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 이봉창 -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
○ 오리 전택부 - 젠케 타쿠후(全家澤鳧) : 창씨개명 당시에 전씨 집안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전가(全家)'로 했다고 생존 당시 KBS 프로그램인 《사랑방중계》에서 밝힌 바 있다. 이름 부분은 '택부'를 그대로 사용.
○ 장면 - 다마오카 츠토무(玉岡勉) : '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준하 - 조안 슌가(張安俊河) : 장/준하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역시 당시에 흔한 창씨법이다.
○ 장훈 -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 '장'에다 本을 넣어 창씨했다.
○ 정지용 - 오오유미 오사무(大弓修) : 동이족을 나타내는 한자 夷를 파자하여 大弓으로 창씨하고, 활 쏘는 자세를 뜻하는 修를 이름으로 삼았다.
○ 주요한 -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 : 이름 '코이치(紘一, 굉일)'는 일제의 황도정신이자 일본 제국주의 핵심사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 핫코이치우)에서 따온 것이다.
○ 최규하 - 우메하라 케이이치(梅原圭一) : '규하'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케이나츠(圭夏)'였다는 얘기도 있다.
○ 최린 - 가야마 린(佳山麟) : 崔를 파자하여 佳山엄밀히 따지자면 隹山이겠지만으로 창씨하고, '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최영의 - 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 : 崔에서 山을 따고 앞에 大를 붙여 창씨하였으며, 한민족을 뜻하는 배달을 이름으로 썼다. 그래서 그의 이명이 '최배달'인 것.
○ 하판락 -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 하/판락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했다.
○ 현제명 - 구로야마 즈미아키(玄山濟明) :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제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역시 흔한 창씨법.
○ 홍난파 - 모리카와 준(森川潤)
○ 홍진기 - 도쿠야마 신이치(徳山進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