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 13~14절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라고 증거된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은 120명 정도의 제자들이 전심으로 기도하는 모임 가운데 임한 것인데..
진정 그러한 성령 강림 사건에 있어서의 모든 핵심과 본질은 아래의 본문과 같이 증거된 약속의 말씀을 위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고, 사실상 기도에 있어서의 모든 핵심과 본질부터도 따지고 보면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실제로 말씀과 벗어난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관계있는 기도일 수가 없는 것이고,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닌 정욕적으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결코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으로 인한 응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수많은 사이비들이나 이단들, 타종교들까지도 자기들 나름의 기도들이 있는 실상임을 감안하면 그러한 자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기도, 곧 하나님과 상관있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며 생생히 응답하시는 기도와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구주 예수님 이름과 함께 말씀대로, 말씀을 위해, 말씀 그대로의 역사들을 구하고 사모하며 누리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직접적, 실제적인 힘과 경험들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 자체부터야 말로 단적으로 말해 말씀의 영이 아니실 수 없는 것이고, 말씀과 함께 말씀 그대로 생생하시고 충만하시며 강렬하게 역사하시는 분인 것이며, 그 위치와 역할 상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으로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는 분인 것이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말씀대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 그대로 하나하나 모두 다 실제가 되게 하시는 분인 것이며..
게다가 그 위치와 역할 상 그러한 기도를 들으시는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고, 말씀과 함께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는 분인 것이며, 말씀대로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는 분인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모든 응답과 구원의 일들, 특히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은혜와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들을 위해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들, 나음과 화평들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구원을 모두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께서도 본질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어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인 것이며..
근원적으로 그렇듯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더 나아가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을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 인생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더 살펴보고 통찰해 봐도 성경 전체적으로, 또한 교회사적으로 성령님께서 가장 충만하시고 강렬하시며 기이하게 역사하신 일들에 있어서도 아래 본문 및 전후의 오순절 마가의 마락방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 4장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의 성령님께서 온통 진동하신 역사 또한 사도행전 4장 29~31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와 같이 잘 증거되어 있듯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말씀의 신앙이 그 중심과 본질이었고 그 결과 또한 말씀대로의 역사와 말씀 증거의 확산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사도행전 10장에서의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님의 강렬하심이 거의 마가의 다락방에서와 유사했던 역사에 있어서도 사도행전 10장 44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다름 아닌 말씀의 자리에서, 당시에 말씀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베드로를 통해, 게다가 다른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고 치열했던 말씀의 신앙, 말씀의 갈망이었던 고넬료와 그 친지들 가운데 실제했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6장의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임했던 감옥터가 뒤흔들릴 정도의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에 있어서도 사도행전 16장 24~25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와 같이 증거된 말씀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억울하게 고초를 당하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위기의 상황에서도 오직 말씀대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곧 율법 및 구약 성경에 그 누구보다 정통했던 바울이었기에 합리적으로 유추하자면 필요하면 말씀대로 10가지 이적을 일으키시고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여리고 성까지도 무너뜨리시는 등의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 그대로 믿으며 의지하고 맡기면서 말씀대로 전심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 좀 더 확대하면 말씀과 기도와 찬미와 경배와 예배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그 정도로까지 역사하신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에서도 사도행전 19장 11~12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와 같이 증거된 것과 같은 치유와 축사와 기이한 역사들을 겸한 모든 영적 각성과 부흥의 역사들에 있어서도 다른 그 무엇보다 전적인 말씀의 통로라 할 수 있었던 두란노 서원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그와 같은 모든 이치와 원리들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 있어서도 조금도 다를 수 없는 것으로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생생하시고 충만하시며 강렬하시고 풍성하신 모든 역사와 실제와 누림들에 있어 다른 그 무엇보다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완전히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원론적으로 우리 인생들이 어느 정도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와 결코 별개일 수가 없는 것이며, 사실은 생각 이상으로 상관이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절대적인 전제와 기준, 관건과 통로가 아닐 수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렇기에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실제들을 사모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나아가 모든 교회와 부서와 모임과 직분자와 성도들, 가정과 일터와 학교와 영역과 지역들, 나라와 민족과 열방과 세대와 땅 끝, 세상 끝 날에 이르기까지에 있어서 다름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죄악들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은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켜야 하며, 무엇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더욱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서 더욱 간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가운데에서의 특별한 헌신의 작정 기도들마다 말 그대로 특별하고 강력하며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1:4~5)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9월 5일(화)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