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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출 19:16-25
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5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알리니라
출 19:16-25 / [하나님이 시내산에 내려오시다] 셋째 날 아침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산 위에 빽빽한 구름이 쫙 깔리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리자 진 가운데에 있던 백성들은 모두 무서워 떨었다.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이하려고 진 가운데에서 백성들을 데리고 나와 산기슭에 섰다. 18) 시내산이 자욱한 연기에 휩싸였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 불 가운데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연기는 옹기 가마에서 치솟아 오르는 연기처럼 뿜어 나오고 온 산 전체가 뒤흔들렸다. 19) 나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모세가 소리쳐 하나님을 부르자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로 대답하셨다. 20) 여호와께서 산꼭대기에 내려오셔서 모세를 부르시자 모세가 그리로 올라갔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경고하여라. 백성들이 나 여호와를 보려고 마구 올라오다가 목숨을 잃을까 두렵다. 22) 또 나 여호와를 가까이하는 제사장들도 몸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나 여호와가 몸소 내려가 그들을 칠 것이다.' 23) 모세가 대답하였다. `백성들은 이 산 위로 올라오지 못할겁니다. 사방을 빙 둘러서 올라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짓는 표를 해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서 내려가거라.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너라. 하지만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마구 이리로 올라와 나 여호와에게로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들을 마구 내려칠 것이다.' 25) 모세는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 꼭대기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부르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시내 산 언약의 성격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시더라(16-19) 약속한 날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드러났습니다. 모든 백성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주를 만난 피조물의 합당한 반응인 경외감이었습니다. 경외감으로 모세와 이스라엘은 진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경계선은 침범하지 않고(19:12), 그 경계선 밖에 서서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모세가 말하고, 하나님이 음성으로 답하십니다. 이 장면을 보며 백성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로서 모세가 지닌 위치와 범접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확인합니다.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20-25) 하나님께서 침범이 금지된 경계선 안으로 모세를 불러들이십니다(19:12). 다시 한번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로서 모세가 지닌 위치와 권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세를 높여주심으로써 앞으로 있을 오랜 가나안 여정을 이끌 지도자를 준비하십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2가지를 명령하시는데, “백성들에게 경계를 넘지 말고, 제사장들에게는 그 몸을 성결히 하게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영적 위치에 대한 재 언급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라”는 요청이며, 성결은 그들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성결함의 유지가 가나안 정복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성결해진 이스라엘은 이제 율법을 받을 준비가 끝났습니다.
적용: 성결이 능력입니다. 성결할 때, 우린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성결하기를 갈망합시다.
우리 인생은 부정적이고 좌절하거나 최악의 일들만 생기지 않습니다. 어려웠던 일들로 인해 좋은 일들도 생기고, 그 당시에는 힘들고 참기 힘든 고난이었으나 지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은혜를 체험하고 성장하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과정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고 있다면 감사함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해봅니다.
< 설 교 >
여호와의 보좌 앞으로
출 19:16-25 / 박용래 목사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는 논쟁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기의 부모가 있기에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무신론 사상과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애급에서 강 팍한 바로의 왕을 항복시키기까지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출 애급 시키신 하나님! 출 애급한 후에도 뒤에서는 애급의 군사가 추격하여 오고 앞에서는 홍해바다가 가로 막혀 있을 때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갈라놓으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가게 하신 하나님 ! 그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최대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뵌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 출19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 언약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킨 것입니다.
몸을 씻고, 옷을 빨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은 3일 후에 하나님이 만나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백성들로 하나님께 순종을 서원하게 하고 백성들을 삼일동안 성결하게 하고 시내 산에 경계를 정하여 하나님 임재의 장소에 절대로 가까이 올수 없도록 여러 차례 경고를 하고 경계를 돌파하는 자는 살이나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다 행했지만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게 나는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감히 뵈올 수가 없어서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백성들의 성결을 요구하셨습니다.
구약에서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죄인 된 인간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뵈었으므로 자신은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모세는 여호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준비하라 했습니다.
19:14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준비는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성결케 하기 위하여 옷을 빨라고 했습니다. 옷을 빠는 행위는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결케 한다는 것은 바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하는 자는 성결케 되는 것이며 성결케 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씻어 버리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3일의 시간을 준 것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하기를 원하는 것이요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과거의 옷을 그대로 입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것들을 청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던 세상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제 과거의 옷을 빨고 이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길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구체인 고백이 바로 회개이며 그러한 고백을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엡 4장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여 주셨음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준비는 무엇인가? 알아야 합니다.
▶► 그것은 바로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회계가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12:14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 언제인가 잡지에서 매우 감동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며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안 아버지가 이를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아들을 불러 훈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훈계가 사랑의 훈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훈계를 잔소리라고 여긴 아들은 그만 가출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방탕한 자식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녔지만 아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뉘우침의 표시로 삭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참으로 그 아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주면서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온 것에 감동한 아버지는 자신도 이발소에 가서 삭발을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며 아버지의 품에 안겨 통곡을 하였습니다. 아들은 변화된 모습으로 아버지를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와 같이 회계하고 돌아오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 어거스틴의 회개 / 성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무척이나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를 위해 어머니 모니카는 15년이란 긴 세월동안 매일 눈물로 기도할 정도로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3장 11-14절을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회개하고 어두움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함과 색주와 시기에서 벗어나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된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성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고 신실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강건해지며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하는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쁨으로 맞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먼저 잘 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낡고 추한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귀히 쓰임 받는 삶이되어집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 올 때에 자신을 성결케 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함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경계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됩니다. (21)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여기에서 신칙하라는 말은 "단단히 일러서 경고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경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다시 한 번 단단히 경고하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 성을 알고 계십니다.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모세를 보내어 미리 경고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여 경고자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사역자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벌을 받게 되면 그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겔33:8"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만약 그가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해야 할 책임을 다 하지 못해서 악인이 범죄 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그 피 값을 에스겔 손에서 받겠다는 것입니다.
▶ 사역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다 못할 때 교회는 거룩 성과 경건 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패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에 타락과 부패는 자신을 성결케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 교인들은 죄를 책망하고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는 멧세지는 들으려고 하지도 아니하기에 회개의 멧세지는 전하려 하지도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의 맘대로 하는 것은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넘어서는 않될 선이 있습니다.
▣ 자동차를 운전하면 자기의 차선을 위반하지 아니하면 위험한 사고를 만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선위반으로 대형 사고를 일으켜서 생명을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할 경계선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목사의 경계선이 있고 평신도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야할 차선을 혼돈 하고 위반하여 침범하면 교회가 시끄러워 지고 마귀가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신칙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을 넘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맞을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 인류의 조상 아담도 생명나무의 경계선 안에 있었으면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선악과의 경계선을 넘었기 때문에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명을 지키며 경계선을 잘 지키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율법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 왜 하나님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아시면 서도 그냥 놓아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아셨으면서도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로봇트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나 억지로 끌려가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로봇트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끌려 다니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졌다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살면 너희가 나의 특별한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대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하고 명령하시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제 가서 백성들에게 전하고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복 받을 수 있는 길이 있고 복 받을 수 없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알려 주시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희가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받는 길로 강제로 억지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출19:5-8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늘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냐 나의 자유의지이냐' 하는 것입니다.
▶► 요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 그런데 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와 같은 죄인을, 여러 가지로 아직도 미숙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무엇 하나 잘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나를 선택하신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냥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꼭 깨달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실 때에 그의 손은 우리가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강제로 그냥 끌고 가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를 때도 그랬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그러니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그냥 따라왔습니다. 선택은 베드로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 청년에게도 동일한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부자는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 부르심을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손을 잡았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구해줄게!" 하고 손을 내밀은 그 손을 잡았다고 해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내 힘으로 하였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을 손을 내밀어서 구원해 주었다면 누구든지 손을 내밀어 나를 구원하여 준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지 내가 그 손을 잡았기에 구원받았다고 구원받은 것은 내 힘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 손을 내밀어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나를 구원해 주었다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구원도 우리의 삶의 축복하심도 그냥 억지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응답을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성결케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8절,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 하리이다."
이스라엘이 지혜롭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여 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믿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과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과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여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가 그대로 순종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우리는 믿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저는 연약하지만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면서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맺어진 시내 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언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계약입니다.
▶ 오늘 현대인들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감으로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고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성전에 나아와서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도 늘 준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기 위한 회개로 항상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계선을 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줄 아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결단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고 신앙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 그 두려운 체험
출 19:16-25; 히 12:18-29 / 안재경 목사
오래된 종교이면서 최근에 한국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 종교는 생각을 자극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반성을 촉구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오감을 열게 만들고, 온 몸으로 우주를 체험하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특별한 조직과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동참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를 이끄는 뚜렷한 사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합니다. 뚜렷한 입교의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회원탈퇴라는 것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주말에 이 예식에 많이 참여하지만 주중에도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예식에 참여하는 이들은 무언중에 성취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예식에 참여한 이들이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해도 서로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이들은 예식이 끝나면 아쉬운 마음으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서 다음 예배 때를 기다립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다음 예식을 기다립니다. 그 예식이 삶의 유일한 출구일 뿐만 아니라 활로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가 무엇일까요? ‘등산교’입니다.
산은 오르는 것은 가장 평범한 것 같지만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정상을 꼭 밟아보려고 하는 집착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산은 넉넉한 품을 가지고 있기에 높낮이를 떠나서 그 산에 오르는 이들, 심지어 산자락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까지도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하늘에 이르러 보고자 하는 열망을 산에 오르므로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것이 산이기 때문입니다. 산 곳곳에 돌무더기가 있다는 것, 산신령에 대한 믿음은 오래되었습니다. 한국에 기도원이 대부분 산에 있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민족보다 독특한 산 체험을 한 민족이 있습니다. 이 민족은 산 체험으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에게는 산 체험이 곧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산 체험 이전에 물 체험도 했습니다. 바다를 건넌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산 체험이 애굽에서부터 시작된 이전의 모든 체험의 절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체험하고, 삼위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장소를 중심으로 이 예배체험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는 산에서의 예배 체험입니다. 둘째는 집, 즉 성전에서의 예배체험입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늘에 이르는 예배 체험입니다. 순서대로 살펴 보겠습니다.
1. 구약의 예배1: (시내)산 체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3개월 후에 한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 산이 시내산입니다. 절기로 치면 오순절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시내산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 있습니다. 왜 광야로 보내셨을까요? 왜 황량한 곳으로 보내셨을까요? 어떤 생산품도, 문명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올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장로와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예’라고 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할 준비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제 한 민족과 더불어 맺으려고 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으로, 나라로,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준비시켰습니다. 3일째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겠다고 하셨고, 이것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산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산에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십니다. 노파심일까요? 오늘 본문 21절부터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올리시고는 다시 경고하십니다. 백성들이 산에 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답합니다.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라. 제사장과 백성들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한 자들은 끔찍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요. 그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아닙니다. 마치 태양을 직접 쳐다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사회생활에서도 이게 지혜입니다. ‘거리두기’ 말입니다. 경계를 잘 설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배당입구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붙여 놓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경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죽을 수도 있음!”
셋째 날 아침 일찍 산에 벼락이 칩니다. 번개가 번쩍입니다. 산에 구름이 가득합니다. 산 전체가 불붙는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 전체가 어둠과 빛이 교차합니다. 한 순간 밝아졌다가, 다음 순간에 어둠으로 덮입니다. 빛만이 아니라 어둠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이 와중에 나팔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집니다. 쇼파르 라고 부르는 나팔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이 나팔을 붑니다. 누가 나팔을 불까요? 신명기 마지막 말씀인 신명기 33장 2절, 3절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일만 성도가 사실은 일만 천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팔부는 천사들을 동원하고 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큰 두려움이 임합니다. 히브리서 12장 말씀에 보면 모세 자신도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고 했습니다. 산 전체도 떱니다. 지진이 난 것일까요? 지축이 흔들립니다. 자연만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덜덜 떱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백성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모세가 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 백 만 명이 예배 자리에 섰습니다. 지상 최대의 교회요, 지상 최대의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세우셨습니다. ‘내 백성을 모으라’고 하셔서 모였습니다. 이렇게 목사는 예배인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한 것은 신명기 4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나팔소리가 점점 커져서 귀를 찢을 듯했기 때문에 떤 것이 아닙니다. 귀를 찢을 듯한 음향 때문에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힘이 있기에, 심령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으시기에 떨립니다. 시편 29편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온 땅을 채우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한 설교입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소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시시껄렁한 소리나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위협이나 잔소리가 되어갑니다. 오죽 했으면 세상에서도 ‘설교하지 마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을까요? 한편, 설교자가 가현설에 빠져 있습니다. 설교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을 향해서 무조건 손해 보라고 하면 말입니다. 사업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렇듯 설교조차 현실을 회피하는 기제가 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현실을 끌어안는 몸부림이 되지 않으니 예배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예배를 배웠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원체험입니다. 이것은 마치 창조사건과 방불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시내산 체험입니다. 이후 구원의 역사는 항상 출애굽사건과 비견되지 않습니까? 이 강력한 체험 때문에 유대인은 그 극심한 고난가운데서 생존했고,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시내산 체험이 이스라엘 되게 한 것입니다. 시내산 예배가 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2. 구약의 예배2: (예루살렘) 성전 체험
이제 구약의 두 번째 예배, 두 번째 체험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도시의 체험입니다. 도시에서, 집을 지어놓고 신전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예배장소가 고정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거듭 언급했듯이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집에서, 성전에서 예배해야 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는 어땠을까요?
예배할 곳이 광야의 시내산이 팔레스틴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습니다. 광야의 하나님이 이제 도시의 하나님으로 바뀐 것일까요? 성전이 왜 필요합니까? 사람이 지은 고정된 집이 왜 필요합니까? 고정된 성전은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안식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도 안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안식에로 이끌기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는 봉헌식 때 외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겠습니까?”(왕상 8:27) “하지만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들으시옵소서.” 이제 성전은 하나님일 기쁘게 예배하는 장소가 됩니다. 누구나 나아와서 예배하는 장소가 됩니다. 성전예배가 시작되면서 기쁨의 예배, 환희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이방종교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다른지요? 겁을 상실한 결과일까요? 아닙니다.
시편 122편을 보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에 하나인데요. 순례자들이 절기가 되어 집을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문에 발을 내디디면서 외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할 때에 너무 너무 기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너무 너무 기쁘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미 예배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었습니다.
3. 신약의 예배- 하늘(예루살렘) 체험
산에서의 그 굉장히 두려웠던 체험, 성전에서의 그 따뜻하고 평온한 체험을 지나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교회도 성전, 그리고 회당을 이어받아 예배합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인 히브리서 말씀에 보면 신약 신자들에게 ‘너희가 이른 곳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예배하면서 이르게 된 곳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시내산에서 예배했지요. 예루살렘에서 예배했지요. 그런데 너희들이 이른 곳은 어디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묻고 있는 이유는 예배가 시들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는 너무 너무 좋았는데 이제는 교회의 예배가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핍박도 심하고요. 그래서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예배하던 그 체험이 훨씬 더 강력하고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배하면서 이르게 되는 곳이 어딘지 아냐고 묻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른 곳이 어디라고 합니까? ‘시온 산’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상의 도성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 곳이라고 합니다. 신약교회가 예배할 때 도달하는 곳은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교회는 예배하면서 하늘을 체험합니다.
신약의 예배를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소가 어떠하든지, 건물이 어떠하든지 신약의 예배는 지상의 모든 산을 넘고 넘어 하늘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등산에 비유할 바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가 이른 곳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 곳으로 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 분이 흘리신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는 자신을 죽인 형 에서를 벌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께 상처받은 몸을 내보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성자께서는 언약의 중보자로 일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신약교회의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신약예배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가 계시니 예배를 통해 하늘과 이 땅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에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연결됩니다. 신약예배는 시내산과 성전이 그림자처럼 보여주었던 바로 그곳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 곳에 이릅니다. 신약신자의 체험은 그리스도체험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 오직 믿는 마음으로만 나는 이 선물을 받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 내가 한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교회와 내가 영원히 있다는 믿음입니다.
중세교회는 하늘에 가 계신 그리스도를 이 땅으로 끌어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장소를 하늘을 재현하는 곳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그랬습니다. 키에프 공국의 대공이 보낸 사절들이 그 성당에서 예배하고는 자신들이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꽃이라고 하는 고딕성당이 그랬습니다. 건축술의 발달로 높이고 넓힌 거대한 공간에 스테인드글래스를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와 천상이 펼쳐졌습니다. 예배는 보는 예배가 되었고, 심지어 종교 일반의 예배인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예배를 개혁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늘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 하늘에까지 고양시켰습니다. 종교개혁의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하나님께서 올려드리는 예배를 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성령의 능력으로 힘입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예배를 개혁하여 삼위 하나님과 언약적 교제를 즐거워하게 해 주었고, 천상을 맛보고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지상을 살지만 천상을 사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요? 아무리 난리를 쳐도 그 순간뿐이지요? 공개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예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해보니 뭐 하냐? 라는 생각이 들지요. 다들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다음에 있을 각종 모임이나 활동들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평생 예배했는데, 말씀 들었는데 한 치도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가 삼위하나님을 체험하고, 삼위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우상숭배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불안과 죄책감을 부추기거나, 그것들을 일시적으로 잠재워 보려는 푸닥거리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내일 이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언제까지 예배만 할 거냐는 말을 우리가 쉽게 합니다. 이제부터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 안 믿는 사람들조차 예배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예배하는 인간이니까요.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존재목적이 드러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배할 때마다 생겨난다고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교회는 예배 하나만 잘해도 됩니다. 예배가 유일한 일입니다. 예배가 우리가 사회에 해 줄 수 있는 제일 좋은 선행입니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예배는 인류 최고 최대의 자산입이다. 그래서 교회를 공교회라고 부르고, 예배를 공예배라고 부릅니다. 예배는 사유화할 수 없는 인류 전체를 위한 자산입니다.
등산과 같은 강렬한 체험을 원합니까? 집과 같은 포근함을 원합니까?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비한 체험을 원합니까? 소리를 꽥꽥 질러댄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을 조작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예배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에 우리는 하늘에까지 올라갑니다. 우주인들을 인터뷰한 일본작가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우주인들을 인터뷰 해 보았는데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우주에 같다 오고 나니 결코 예전과 같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버뷰 임펙트’라고 부릅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것은 에베레스트 등정하는 것, 달나라에 갔다 온 것과 비교할 바가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 하늘에까지 올라갔다 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예배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예배가 온 세상을 심판합니다. 신자는 예배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습니다.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신자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다 부어주십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 마지막 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소멸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예배해도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을 견딜 수 없습니다. 다 불타 버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와 신자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
출 19:16-25 / 엘림전원교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사흘을 준비하였습니다. 사흘째가 되던 날에 하나님은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산위에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시청각적인 효과를 사용하셨습니다.(16-19절) 여기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백성들에게 가까이오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21-24절) 왜 그러셨을까요?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신적(神的) 거룩함을 실제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은 잘 알지 못하고, 또 교회의 규례를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공부해야 하고 또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여러 가지 모양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항상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적합하게 보이십니다. 최종적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啓示)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함께 장난도 해 주고 놀아주며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려는 노력 이상 하나님은 더 많은 노력을 해 주시지만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장엄하고 경이적이며 인상적인 환경을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아직도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천박한 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기 가마나 좋아하며 자유의 진가(眞價)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너무도 부도덕 하고 우매했으며 감사를 모르는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간증자로, 진리의 수탁자(受託者)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요, 인류의 인도자로 오랫동안 높임을 받아야 할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감명을 준 목적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그들의 죄를 회개케 하고, 그것을 게을리 하면 매우 두려운 결과가 초래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 시내 산의 우레와 또 다른 형태의 공포가 필요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다양한 하나님의 계시 방법을 보면 엘리야에게는 “말씀”, 이사야와 요한 사도에게는 환상으로, 다른 사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엄격한 가르침으로, 바울사도에게는 황홀경 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이곳과 대조적으로 예수의 오심과 성령 강림절에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인 개인에게도 적합하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때로는 희망을 속삭이시고, 가슴속에 믿음을 스며들게 하시며, 사랑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모두 다 인간을 유익하게 함이니 말씀 하실 때 잘 경청해야 하고, 그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삼가 말씀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쫓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히12:25)
2. 시내산과 시온산
이 두산은 이스라엘 전 회중의 일반적인 생활과 종교적인 생활 사이의 양극(兩極)입니다. 시내산은 율법의 산이요 율법 하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두려운 연기와 불꽃 안에서 강림하셨습니다. 시온산은 은혜의 동산입니다. 신약백성에게 임하신 동산이요, 장차 우리가 영원히 거할 산입니다.(시132:13,14) 시온산은 구원의 장소입니다.(시14:7, 사46:13등) 예루살렘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은혜의 요소는 시온 산의 빛에서 옵니다. 시내 산에 강림하심은 잠깐 동안 이었을 뿐이나 시온산에 오심은 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시내 산에서는 두려움으로 나타나셨으나 시온 산에서는 그의 성품의 보다 온유한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시온산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셨으니 그로부터 그의 권능과 보살핌을 내 보이셨으며 복음의 율법이 나오게 되었습니다.(시20:2, 110:2, 사2:2,3) 시내 산의 은혜는 율법의 형태와 형식 밑에 숨겨져 있어서 매우 불안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 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택한 백성들) 사이에서 평안 중에 거하셨으며 그의 명령을 내리셨고 백성들의 경배를 받으셨으며 피 뿌려진 자비의 보좌위에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또 시온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기도 합니다.(히12:22-23)
3. 하나님을 만날 준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구출자임을 알도록 배웠던 바와 같이 또한 더 나아가 율법을 주신 통치자임도 깨닫도록 배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천연 경기장 같은 그곳에서 신비한 여호와를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시내 산으로 모세를 오게 하시고 백성들에게 경고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의 약점은 곧 음성뿐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열망했으나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율법은 울타리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이방 민족과 그들이 지켜야 할 생활의 울타리였으니 바리새인들은 그 울타리에 경배한 샘이니 곧 율법은 음성뿐인 계시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1:14)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음성뿐이 아니라 육신까지였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풍성한 형상이 또한 더한 책임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허물일지라도 어른이 된 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시대에 사는 우리는 더욱 경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22절 이하에 보면 제사장 직분을 맡은 자들은 더 성결하도록 의무를 지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성결케 됨을 입지 못하고 완전 성화되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도 일정한 거리를 경계로 하여 접근 할 수밖에 없으며 모세를 중계인으로 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하나님을 뵈옵고 두려워 탄식했었습니다.(사6:1-5) 베드로도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뵙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위엄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사 노예민족을 자유인으로 세워 주신 것에 감사로 동의한 것 같이 이제 하늘의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그 분의 은혜의 초청에 더 넘치는 감사로 응답해 드립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의 간격
출 19:16-25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 속에서 모세와 대화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절대 넘으면 안 되는 구분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함부로 다가서다가 죽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모세에게 여러 번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이미 산 주위에 경계선을 정하고 백성이 넘어서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드렸으나, 하나님은 다시 한번 내려가서 백성을 단속하라고 명하십니다(23-24절). 이런 반복적이고 엄숙한 경고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구분선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모세는 이 구분선을 넘어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 시대의 모세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엡 3:12; 히 7:25).
하나님이 세워 주신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 왜 중요한가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두려움을 품게 하는 이러한 표현들은 결코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보이려고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과 위대함을 나타내시려는 의도입니다. 출 20:20절에서 모세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이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생명을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함부로 다가서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명하셨나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절대 넘으면 안 되는 구분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함부로 다가서다가 죽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모세에게 여러 번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이미 산 주위에 경계선을 정하고 백성이 넘어서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드렸으나, 하나님은 다시 한번 내려가서 백성을 단속하라고 명하십니다(23-24절). 이런 반복적이고 엄숙한 경고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구분선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모세는 이 구분선을 넘어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 시대의 모세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예표합니다(엡 3:12; 히 7:25).
구약 백성이 누리지 못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는 얼마나 누리고 있나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안될 경계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세와 같은 중보자 역할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수님의 역할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을 찢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이전까지는 경계선을 넘어, 휘장을 넘어 하나님께 가까이가면 죽었으나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사람은 누구나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 주신 형언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죽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 되는 존재 되게해 주신것이 구원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주님의 권위와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와 온 세계가 주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유지되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 한 마디의 권위의 무게롤 바로 알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빛과 언어와 행동안에서 주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