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진 하노버 가문
라뮤나
2022. 11. 28. 0:07
13 의회, 세계 일루미나티 지도자는 "Pindar" 라고 불립니다. Pindar 는 13 통치 가문의 일원이며 항상 남성입니다.
Pindar 라는 칭호는 "Pinnacle of the Draco" 또는 "Penis of the Dragon" 으로 알려진 용어의 줄임말이며 이것은 최고의 힘, 지배, 창조, 관통, 팽창, 침범, 그리고 공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칭호를 가진 계급은 지구 내부의 순혈 렙틸리언 수뇌에게 보고되며 피라미드의 "눈"은 13 통치 가문을 의미합니다.
그 이야기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노버 왕가
독일에 뿌리를 둔 하노버 왕가는 1714년 조지 1세부터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까지 187년 동안 대영국과 아일랜드(1801년 이후) 그리고 인도를 직접 통치하였고 대영제국의 이름으로 확장일로에 있던 세계 전역의 식민 영토를 직간접적으로 통제했습니다.
200년 가까운 하노버 왕조의 통치기는 영 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리기 때문에 이 시기 영국의 의회 정치는 통치 권력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 반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영국 왕실의 정치적 선택이 점차 현대 입헌군주국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즉 하노버는 영국이였습니다.


조지 1세
하노버 왕가는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14년 이후 영국 하노버 왕가의 국왕은 독일 하노버 공국의 제후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1814년 하노버 공국이 왕국 체제로 바뀐 이후 하노버 가문은 영국과 독일의 통합 왕가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조지1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허나 조지 1세의 태생을 설명할려면 또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인 제임스 1세부터 시작을 해야겠네요.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태어나 이름을 여왕의 이름을 따 지었습니다. 이에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아버지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에서 자라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하여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살게도며 10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5녀인 조피는 파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존인하여 조지 1세를 낳게됩니다.

조지 1세는 1698년 38세의 나이로 하노버 선제후에 즉위해 게오르크 1세가 되었으며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자 54세의 나이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조지1세는 영국 국왕이긴 했으나 계승 순위로 인해 자리만 맡아줬을 뿐 하노버의 선제후로서 살았기에 영어에 서툴렀고 독일어와 프랑스어만 할 수 있었기에 영국인 신하들과의 소통을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지 1세가 전격 위임 통치를 하게 되며 영국식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노버는 훗날 비스마르크에 흡수되어 현재 정체성을 잃으면서 조지 1세는 영국 국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내 조피 도로테아와의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내 조피의 신분이 자신보다 낮았기에 결혼 12년만에 아내에게 불륜 혐의를 씌어 이혼하였으며 평생 하노버의 성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들 조지 2세와의 사이도 나빴으며 딸 조피 도로테아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결혼하여 그들 사이의 3남이 프리드리히의 대왕이 됩니다.

조지 2세
조지1세와 조피 도로테아의 아들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감금시켜놓아서 아버지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호엔촐레른 왕가의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결혼하였는데 캐롤라인은 아름답고 총명하여 아이작 뉴턴 등 지식인들과도 교류하며 조지 2세의 정치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가담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식민제국과 전쟁을 벌입니다. 직접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영국 군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조지왕의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캐롤라인에게서 3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아들 웨일스 공 프레데릭은 조지 2세보다 먼저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프레데릭의 아들인 조지가 3세에 오르게 됩니다.
조지 3세
조지 3세는 하노버 왕조에서 처음으로 영국에서 태어난 군주입니다. 뛰어나진 않았지만 추문이 없고 근면검소한 성품으로 성실하고 독실한 군주로 존경받은 인물입니다. 재위기간이 59년 3개월로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세번째이고 영국 남성 군주 중에서는 가장 오랜시간 재위한 군주입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 큰 사건들이 모두 일어났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한 나라로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탄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9남 6녀의 1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샬럿 왕비가 낳았으며 15명 자녀중 9명이 혼인하여 손주가 8명 있었는데 성인으로 성장한 손주는 6명 뿐이였고 조지 4세의 하나밖에 없는 딸 샬럿 공주가 사망했을때 조지 3세의 손자 중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에 왕자들은 차기 왕을 낳기 위해 노력하였고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브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이라 공주가 왕위를 잇고 그녀가 바로 빅토이라 여왕이 됩니다.

조지 4세
조지 4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품행이 좋지 않기로 소문나있습니다. 경마 등으로 돈을 탕진해 왕실 비용의 절반 수준의 빚을 지었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인 루이 18세를 후원하였습니다.
조지 4세가 죽은 후 동생일 윌리엄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윌리엄 4세
13세에 영국 해군에 입대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수병으로 복무해 항해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1772년 왕실혼례법에 따라 왕의 허락없이 결혼을 할 수 없었기에 허락 없는 결혼하에 아이가 태어나도 왕위 계승권이 없었었습니다. 이 법률에 반발해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조지 3세의 몇몇 아들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고 동거를 했으며 조지3세가 죽자 1830년 64세의 나이로 즉위를 하게됩니다.
윌리엄 4세 또한 후사가 없었기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를 하지만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 왕국의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오르게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여제,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기도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전성기의 영국을 통치하였으며 2대 정당제 의회정치가 전개되면서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독일 출신인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영국에 온 외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앨버트에게 반하여 1840년 앨버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1861년 남편 앨버트 공이 42세에 세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은거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긴 시간을 여왕으로 재위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하노버 왕조는 빅토이라 여왕에서 끝이 나며 장남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오르며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이어집니다.
식민지
하노버 왕조가 들어선 18세기 내내 유럽의 패권국가들은 세계 전역에서 세력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노버 왕가의 통치 전반기에 해당하는 18세기 동안 영국은 유럽 본토와 해외 식민지 전쟁에 가리치 않고 뛰어들었고 확고한 우위를 차지합니다.
영국의 주요 상대는 프랑스였으며 유럽의 7년전쟁이 파리 강화조약으로 끝이나면서 식민지 전쟁도 함께 종결됩니다. 이로써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북미 지역의 상당 부분의 영토가 승전국인 영국에게 이양되었으나 영국이 상당한 비용을 사용하였기에 북미에 인지세를 비롯하여 갖가지 명목의 과세를 대폭 늘려 독립전쟁의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하노버가 만든 산업 제국
인도 지배와 면직 산업
16세기 중반가지 영국의 주요 산업은 양 목축업에 기반을 둔 모직 산업이였습니다. 그러나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인도를 사실상 지배하게 되면서 면화를 바탕으로 고대부터 번성해온 인도의 면직물 기술을 약탈적 방식으로 영국으로 흡수를 합니다.
1767년 하그리브스가 근대 발명사의 쾌거 중 하나인 방적기를 고안해내면서 면직물산업은 탄력을 받으며 여기에 1775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 동력과 풍부한 탄광 자원이 더해지면서 18세기 후반 이후 면직뭉 산업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선도한 산업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해외 자본을 끌어 모으는 계기가 됩니다.
곡물법과 신, 구 자본 대결
1815년 나폴레옹의 전쟁이 끝이나자 대륙봉쇄령으로 닫혀 있던 영국의 대외 교역이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영국의회는 곡물법을 통과시켜 유럽과 신대륙에서 값싸게 수입되는 곡물로부터 자국 농산물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이는 거대 경작지를 보유한 대지주들의 이해를 반영한 법안이었고 따라서 도시 부르주아와 상공인의 반대가 상당히 심하였습니다. 또 저렴한 수입 농산물 대신 비싼 자국산 농산물을 소비해야 했기에 임금 노동자를 비롯해서 도시 빈민들 역시 불만이 생기게 되며 서민의 노동 임금이 상승하면서 생계비 상승으로 이어져 낮은 임금을 유지하려는 공장 자본가들도 반발하게 됩니다.
결국 곡물법은 1848년 사회 여러 계층의 저항에 부딪혀 폐지되며 곡물법이 시행되고 폐지되는 과정은 17세까지 이어져온 전근대적인 토지 자본의 사회경제적 주도권이 18세기 상공업 중심의 신흥 자본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업 제국의 뒷면
산업제국에는 앞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산업 노동자층과 도시 빈민의 생활조건은 참담한 수준이였고 도시 내에서 기사급수적으로 증가한 하층 빈민의 수는 왕실과 귀족층은 물론 부르주아의 안락한 생활에도 위험 요소로 작용되었습니다.
이에 1833년 공장법을 개정하여 9세 미만의 유아노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여성 노동자와 소년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강제로 감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듬해 연이어 구빈법을 통과시켜 구빈원 제도를 마련해 사회 최하층에 지원금을 투입하였으나 19세기 말까지 아동과 여성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비용을 줄이려는 자본가의 탐욕은 지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