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어둠이 길을 덮자 그가 기어 나온다
천 년 묵은 너구리 털 이 바닥에 흥건하거늘 몇 개
의 얼굴을 가진 놈의 정체를 모를 리 없다 지식창고
몰래 뒤져 남의 지식 훔쳐다가 네 것인 양 둔갑하여
밥상 술상 받아놓고 가식적인 수상 소감 가타부타 늘
어놓네 너구리굴 들락거리며 빼 먹은 내공들로 오동
통 살만 찌운 너구리 여기 있네
늘어진 웃음 뒤편에 숨겨놓은 네 꼬리
데자뷔
우리 한 번 만났던 적 있었던 것 같은데
눈 내리는 창밖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천 년 전 목소리 자꾸만 붙잡고 싶은 어제 같
은 오늘의, 당신에게 달려가다 자꾸만 넘어지고 넓은
그늘 아래서 울던 소리 들려오면 가슴 한쪽 털리고 속
이 텅 빈 하늘가에 언젠가 본 적 있는 계수나무 한 그
루 그 푸른 나무 아래서 하나둘씩 펼치던 꿈 언젠가
와 본 적 있는 이곳에서 길 잃었네
천 년 전 당신 손잡고 걸었던 이 밀밭길
이동식디스크
끝없이 펼쳐진 초원, 길의 끝은 어디인가
저 푸른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는 무리들 암호를 두
른 길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
는 별 바람 햇살들, 게르*의 침대 위에서 하룻밤을 보
내고 또 다시 길을 만들며 길을 다시 지우는가 모서리
없는 길들을 밤새워 끌고 간다 사막의 한가운데 멈춰
선 모래시계 사라진 길 위로 꿈들도 흩어진다 하늘에
뜬 별들도 그물처럼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진 길에 너와 내가 갇힌다
*몽골족蒙古族의 이동식 집
월식의 종류
시간의 문이 스르르 닫힌다
첫눈이 내리고 번지는 푸른 빛 입안 가득 차가운
말들을 머금고 오물오물 삼키다 뱉어낸 한숨들 머뭇
머뭇 놓친 길이 눈앞에서 꿈틀거려 미끄러져 뭉개진
발그림자 어른거려 옷섶에 물을 쏟은 밤 스르르 떠올
라 흘러내린 기억을 슬며시 닦으며 고개를 말없이 돌
리다가 보았지 문틈에 낀 옷자락처럼 걸려있는 흰 달
을 어둠이 먹다 만 저녁 밥상을 덮고 있어
눈군가 문을 두드리며 내 눈을 보고 있어
- 시집 『대명사들』 다인숲,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