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보수인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도 아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과 증오 말이다. 보수라는 자들이 기껏 지키고 있다는 것이 일제가 식민지에서 작동시켰던 수탈 자본주의였다. 일제가 식민지에서 운영했던 시스템에서 횡행했던 조선인에 대한 경멸과 멸시 그리고 증오는 그대로 친일파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과연 보수인가!
한나 아렌트가 그랬다. '악의 평범성'이라고. 나치 전범이 법정에 나왔을 때 한나 아렌트는 많이 놀랐다고 했다. 흉악하고 사악하게 생긴 사람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웃집 아저씨 같이 생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나치 전범으로 재판정에 나왔다는 거였다.
이 나치 전범들이 바로 행여나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해 한 명의 유태인을 더 가스실로 보내지 못 하지는 않았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심지어는 유태인을 더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저 시달리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지극히 자상한 가장이 되었던 거였다. 반면에 독일의 지식인들은 나치의 폭력 앞에 인간으로서의 삶의 추구를 체념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었다.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악은 우리 주위에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머물게 된다고 말한 것이 바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다.
영국에서는 하층민을 '차브'라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었다. 신자유주의가 성행하던 때다.
차브는 ‘더러운 공영주택에 살면서 정부의 복지 예산을 축내는 소비적인 하층계급과 그들의 폭력적인 자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차브라는 말에는 경멸과 증오마저 실려 있다. 오언 존스는 2011년에 출간한 책 '차브'에서 차브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 등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하는 경멸적인 언어라면서, 중간 계급 이상 영국인들이 차브라는 말을 구사하며 하층 계급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영국 주류사회는 차브라 표현하며 숨김없는 혐오를 표출한다. 영국 정부도 차브가 공영주택에 살면서 변변한 직업 없이 복지 예산만 축내고 있다고 비난한다.
영국인 모두가 중산층으로 향하는 시대에 복지예산에 기대 자신들의 게으름에 빠져있는 계층을 차브라 칭하며, 차브로 인해 영국인 모두가 중산층이 되는 것이 방해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브라는 말에는 영국 중상층의 하층민에 대한 ‘계급 혐오’가 담겨 있다고 오언 존스는 썼다.
우리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일제 때의 수탈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던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 운영으로부터 배어나온 경멸과 증오가 수탈 자본주의와 함께 아직도 작동 중이고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 때는 불령선인이라 불렀다.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조선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 일제가 물러가고 그 자리를 친일파들이 차지하면서 이번에는 빨갱이가 등장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골짜기로 데려가 죽였다고 골로 간다는 말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근래에는 노동귀족이나 전문 시위꾼이란 말로 경멸과 증오를 표현하고 있다.
수탈 자본주의라 말하면, 지금 어느 적 이야기를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민주화 된 사회에서 엄연히 삼권분립이 작동되고 있으며, 압축성장으로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대 강국에 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보자.
일제 때에도 삼권분립은 있었다. 삼권분립이 민주화의 산물은 아니다. 일제 때에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있었다. 우리의 법 체제는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곳곳에 배어있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다를까? 다르지 않다. 행정부와 입법부에도 일제의 시스템이 골격이 되었다. 이 말은 곳곳에 수탈 자본주의를 위한 장치들이 작동 중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세계 경제 10대 강국은 어떨까? 소득의 양극화로 빈부 격차가 미국 다음으로 극심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제 다시 말해 보자.
수탈 자본주의가 아닌가? 수탈 자본주의에서 횡행하던 경멸과 증오가 아닌가? 이러한 수탈 자본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 일제의 수탈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가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진정 보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