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찾아준 추억
김희식
요즘은 옛날처럼 달력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농협, 새마을금고, 신협 등 은행마다 제각각 날짜별로 달력을 주는 날이 따로 있는 데다가 그마저도 선착순이라 은행 문 여는 시간대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만 음력 날짜도 표기되어 있는 기다란 달력을 구할 수 있다.
우리 세대는 기다란 장달력을 걸어 놓고 집안 모든 대소사를 표기해 놔야 1년 동안 그날들을 잊지 않고 챙길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휴대폰 달력에 일정을 다 저장해 놓고 쓰니 달력이 그리 필요치 않아 보인다. 나는 요즘 세대가 아닌지라 해가 바뀌면 장달력을 필수로 구해 놔야만 하는 의무감이 들어 이곳저곳을 기웃대는 게 신년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두 달 전, 은행에 가서 일 인당 하나씩밖에 구할 수 없는 달력을 안고 막 나오려는데 어디서 들어봄 직한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달력 타러 왔는데요.”
나처럼 달력을 타러 온 여자는 마스크는 썼지만, 눈매는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실례지만 ○○엄마 아니세요? 33전 전, 가정동 태화아파트 살던.”
“어? 맞긴 한 데 저를 아세요? 전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마스크를 벗자, 여자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고,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우리는 같은 세대로서 각별하게 지냈다. 여자는 워낙 말수가 적고 남의 말에 공감을 잘해 주던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 집은 아들만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우리 큰아이랑 같은 학교 2학년이었다. 공통의 관심사가 많아 서로 가깝게 지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무슨 연고인지 친정이 있는 안성으로 이사를 하였고, 그렇게 연락은 두절됐었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느냐고 행방을 물었지만, 그 아주머니도 이사를 간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며 무척 섭섭해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보급된 시대도 아니었고, 집 전화를 쓰던 시대였기에 우리는 그렇게 연락이 끊긴 채로 세월이 무수히 흘렀다. 그 세월 속에서 어느 날은 그 집 여자가, 또 어느 날은 인사성 바르고 착했던 그 집 아이 생각이 나고는 했다.
두 해 전, 남편과 집 앞 산에서 운동을 하고 내려오다가 손주인 듯한 아이 둘의 손을 잡고 가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분명 내가 그리워하던 그 여자 같았지만, 남편이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말조차 걸지 못하고 내려온 적이 있다. 하기야 말을 걸었어도 그 여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는 거였지만 차라리 말이라도 걸어 봤으면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그날의 기억이 영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내 나이 서른넷, 요즘 세대들로 치면 결혼도 안 했을 수 있는 어린 나이에 나는 여자를 만났고, 우리는 서로의 삶을 털어놓으며 서로에게 위로를 건넸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남편들 때문에 가난하긴 했어도 부침개 한 쪽을 먹으면서도 낭만이 있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 그래도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어 꿈만은 잃지 않았던 고왔던 시절이었다.
강산이 여러 번이나 바뀌고, 이제는 ‘할머니’라는 꼬리표를 단 채 만났지만 우리는 가정동에서 살던, 그때 그 시절을 향수에 젖어 회상해 보았다. 지금 그곳은 고층 아파트촌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엔 아직도 우리가 살던 저층 아파트와 나의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즐겁게 뛰놀던 놀이터가 눈앞에 선명히 펼쳐진다.
“나는 그 당시에 우열 엄마 유머 덕에 어찌나 즐거웠나 몰라. 우리 옆집 아줌마도 자기 덕에 우울증이 없어졌다고 했잖아. 우리 언제 만나 식사라도 하자.”
아주 오래전 추억을 더듬은 뒤, 그렇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 넓은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그 여자를 딱 만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젊은 시절, 그토록 그리워할 때는 연락할 방법이 없어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나 싶었는데 늘그막이라도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의 추억을 펼쳐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정말로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