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은 인간이 만든다
흔히 제1차대전은 참호(塹壕)를 사이에 두고 장기(長期)간(間)의 지리(底理)한 대치(代置)과정(科程) 중 총탄(銃彈)이 난무(亂舞)하고 포탄(砲彈)이 불을 토하는 구덩이로 인간들을 마구 몰아넣었던 지옥(地獄)으로만 많이들 연상(聯想)하고 있습니다.
제1차대전을 상징(象徵)하는 솜므(Somme), 베르덩(Verdun), 마른(Marne), 이프르(Ypres) 같은 제1차대전의 주요 전투(主要戰鬪)가 대부분 이런 형태(形態)로 진행(進行)되었기 때문입니다.
↑제1차대전의 대부분은 지리한 참호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와 비교(比較)한다면 탄넨베르크(Tannenberg)전투(1914년 8월 26일~8월 31일)는 제1차대전답지 않은 신속(迅速)하고도 승자(勝子)와 패자(敗者)와 확실(確實)하게 결정(決定)된 보기 드문 전투였습니다.
전투기간도 짧았고 그 결과도 서부전선의 여타전투와 달리 확실하게 나왔습니다.
마치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의 전격전(電擊戰)과 같은 분위기(雰圍氣)를 엿볼 수 있는 깔끔한 (?) 전투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탄넨베르크전투는 제1차대전 답지않은(?) 전투 였습니다
하지만 탄넨베르크전투가 전사(戰史)에 기록(記錄)된 수많은 기념비적(紀念碑的) 전투와 비교(比較)해서도 찬란(燦爛)하게 빛을 발하는 이유(理由)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수(小數)가 다수(多數)를 완벽(完璧)하게 섬멸(殲滅)하였다는 점입니다.
통상적(通常的)으로 대부분의 승리는 승자가 압도적(壓倒的)으로 전력이 우세(優勢)하였거나 아니면 작전이 뛰어나서 이긴 경우라도 전력은 비슷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전투가 길이 기억되는 것은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이런 이유로 세계적(世界的)으로도 소수가 다수를 압도한 이러한 대승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탄넨베르크에서 재현(再現)되었다는 깐네전투(Battaglia di Canne, 기원전 216년 이탈리아 중부 아프리아 지방의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 공화정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던 카르타고군은 완벽한 포위 작전으로 로마군을 전멸시켜 전사상 포위섬멸전의 대명사.
로마군은 5만 이상이 전사하였으나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8천에 미치지 못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살수대첩[(薩水大捷, 612년(영양왕 23) 살수(薩水: 청천강)에서 을지문덕의 지략으로 고구려가 수를 크게 물리친 전투, 수군 9군의 30만 5천명의 정예부대 중 요동성까지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명량해전(明亮海戰, 조선 수군 판옥선 13척과 일본군 함대 133척이 맞붙어서 고작 13척이 전부였던 조선 수군이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궤멸시키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대첩)정도.
흔히 이런 경우의 전투 결과는 기적 또는 전설이 되어 그 찬란한 명성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15세기 독일 기사단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한 것을 기리기 위해 탄넨베르크전투라고 명명합니다
흔히 전사(戰史)에는 삼소노프와 레넨캄프의 이기적(利己的)인 무능(無能), 힌덴부르크의 영도력(領導力) 등을 언급(言及)하지만 앞에서 몇 번에 걸쳐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 전투가 전설로 남는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드러나지 않는 여러 인간 군상(人間群像)들의 행태(行態)가 복합적(複合的)으로 작용(作用)한 결과(決科)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결과에 의해 기적(奇籍)은 일어났고 결국 전설(傳說)로 전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