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466)/ 스웨덴
팔룬의 구리 광산 지역
(Mining Area of the Great Copper Mountain in Falun; 2001)
스웨덴 달라르나 현[Dalarna Province]의 팔룬(Falun)에 있는 옛 구리 광산 지역이다. 거대 수갱으로 알려진 엄청나게 큰 채광 발굴지는 최소한 13세기 이후 이 지역의 구리 생산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독특한 경관이다. 17세기의 계획 도시 팔룬에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건물이 많이 있고, 달라르나 지역에는 광산업 유적과 주거 유적이 넓게 퍼져 있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컸던 광산 마을 경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팔룬의 경관은 구리를 채굴하고 생산한 유적이 가장 중요하게 특징적으로 남아 있다. 광산 채굴은 일찍이 9세기에 시작하여 20세기 말에 막을 내렸다. 17세기, 팔룬은 구리의 주요 생산지였고, 200년 동안 세계 광업 기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팔룬은 구리 산업이 ‘가내 공업’ 형태로 시작하여 완전한 산업 생산에 이르기까지 경제 사회적 발달 단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풍부한 산업, 도시, 주거 유적은 이를 증명한다. 팔룬에 있는 거대한 구리 광산과 그 문화 경관은 역사적 산업과 독특한 건물, 촌락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는 기술의 집합체이다. 거대 구리 광산[Stora Kopparberget; Great Copper Mountain]은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광산이자 세계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산업 유적이다. 광산을 둘러싼 인공적인 경관은 스웨덴 기준으로나 세계 기준으로나 매우 놀랍고 독특하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지역은 거대 구리 광산, 광산 주변의 마을 지역인 코파르베르그슬라겐(Kopparbergslagen), 용광로, 수로, 연못, 운하, 오래된 광산촌 유적 등이다. 지하 채굴을 하던 거대 구리 광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물은 1288년의 것이지만 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그 기원은 8세기 또는 9세기부터라고 추정한다. 이 시기 스웨덴의 공업은 독일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층 발전하였을 것이다. 독일인이 스웨덴에 정착했으므로 이때 스웨덴 산업이 독일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화력 채굴과 광산 배수 같은 기술을 적용한 증거가 상당히 많으며, 이 기술은 하르츠(Harz) 산맥과 같은 유럽 대륙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347 헌장[The 1347 charter]’으로 독특한 인공 경관이 생겨났다. 광부들은 토지 주인에게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 숲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할 권리를 얻었다. 동시에 토지나 임야에 대한 세금도 면제받아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15세기는 무역 제한과 함께 과세 제도를 반대하여 무장 분쟁이 벌어지던 불안한 시기였다. 구리 광산의 ‘자영 광산업자’들은 무역 제한과 과세 제도에 반대했다. 이러한 충돌은 1531~1534년 절정에 달하였고, 그 결과 팔룬의 저명한 시민 몇 명이 구스타브 바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했다. 16~17세기에는 거대 구리 광산이 스웨덴 경제의 중추가 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팔룬에서 세계 구리 생산량의 70%를 담당하면서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 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구리는 전 세계로 수출되었는데 예를 들면 베르사유 궁전의 지붕이나 스페인의 주화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구리에서 얻은 수익은 30년 전쟁(1618~1648)에 스웨덴이 참전할 당시 자금원이 되었다. 거대 구리 광산은 회사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자영 광산업자[베르그스만]들은 구리 제련소에 그들의 지분에 비례하여 주식을 소유하였다. ‘1347 헌장’은 광물 채굴, 주거, 무역을 다루었다. 이는 나중에 등장한 주식회사의 선도자라고 할 만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라고도 한다. 팔룬 주변에 발달한 코파르베르그슬라겐으로 알려진 문화 지역은 스웨덴 특유의 마을이다. 당시에는 이 지역에 구리 용광로가 140개나 있었으며, 자영 광산업자들은 제련소 가까이에 토지와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농촌에는 주로 목초지가 있었다. 17~18세기에는 팔룬 방식이라는 5년 주기의 윤작이 발달했다. 거대 구리 광산과 주변 지역에서는 수준 높은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하였으나 불가피한 사고들이 있었으며, 특히 생산 활동이 왕성하던 17세기에 사고가 많았다. 1687년에 가장 끔찍한 사고가 있었는데 대규모 산사태 때문에 이곳에 거대 수갱[Stora Stoten]이 생겼다. 구리 용광로는 일찍이 13세기에 수력을 동력으로 하여 연못・수로・운하를 건설하여 제련소와 광산에 물을 공급했다. 현재 남은 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기의 것이다. 팔룬 도시는 17세기에 건설되었다. 1,646개의 격자형 지구를 갖춘 바둑판형 가로(街路) 계획과 세 곳의 목조 주택 지구를 갖추었으며, 스웨덴에서 두 번째 큰 도시로 인구가 6,000명에 달하였다. 감라 헤르가르덴(Gamla Herrgarden), 오스탄포르(Ostanfors), 엘스보리(Elsborg) 세 지역의 1646년 도시 배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구리 용광로는 일찍이 13세기에 수력을 동력으로 사용하였으며, 1555년에 노천 광산인 블랑크스토텐(Blankstoten)에 최초로 수력 승강 장치를 건설하였다. 연못, 수로, 운하를 건설하여 제련소와 광산에 물을 공급했다. 현재 남은 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기의 것이다. 17~19세기에는 외국에서 많은 과학자와 기업인이 팔룬을 방문하여 어마어마한 광산 규모와 용광로에서 오르는 연기, 구리 산업과 관련된 놀라운 구조물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거대 구리 광산은 스웨덴 제일의 명소가 되었고, 1824년부터 ‘관광’이라는 용어가 기록되었다. 팔룬은 16세기부터 기술 발전의 중심지였다. 기계공학자 크리스토퍼 폴햄(Christopher Polhem)과 화학자 제이콥 베르젤리우스(Jons Jacob Berzelius)가 이곳에서 일하고 연구했다. 18~19세기에 들어 구리 수요가 주춤하면서 구리 광산에서는 황, 아연, 납, 은, 금 등 다른 광물 자원 생산을 확대하였다. 1888년에 옛 회사가 현대적 유한회사, 스토라 코파르베리 베르그슬라그 AB로 재편되었다. 이전의 낡은 용광로를 버리고 새 공장을 크게 지었다. 팔룬 외곽에서 철광산을 사들여 제철소를 세웠으며 이 분야에서 스웨덴의 주요 기업이 되었다. 또 다른 삼림 지역에서는 제지와 목재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거대 구리 광산은 스웨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고, 이 회사는 1988년에 700주년을 기념했다. 그러나 1992년에 이용 가능한 광물이 거의 고갈되면서 1998년 12월 8일 마지막 발파를 끝으로 채굴은 중단되었다. 1998년경 팔룬에 유일하게 남았던 산업 활동은 매우 독특한 빨간색 페인트를 생산한 것인데 이는 스웨덴과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목조 건물 보호에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