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무덤
김영태
6월 16일 그대 제일(祭日)에
나는 번번이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지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가던
좁은 잡초 길엔 풀꽃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피어 있겠지
금년에도 나는 생시(生時)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대신에 산 아래 사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시집(詩集) 한 권을 등기로 부쳤지
객초(客草)라는 몹쓸 책이지
상소리가 더러 나오는 한심한 글들이지
첫 페이지를 열면
그대에게 보낸 저녁 미사곡이 나오지
표지를 보면 그대는 저절로 웃음이 날거야
나 같은 똥통이 사람돼 간다고
사뭇 반가워할 거야
물에 빠진 사람이 적삼을 입은 채
허우적 허우적거리지
말이 그렇지 적삼이랑 어깨는 잠기고
모가지만 달랑 물 위에 솟아나 있거든
머리칼은 겁먹어 오그라붙고
콧잔등엔 기름칠을 했는데
동공 아래 파리똥만한 점도 찍었거든
국적 없는 도화사(道化師)만 그리다가
요즘은 상투머리에 옷고름
댕기, 무명치마, 날 잡아잡수
겹서선 신고 뛴다니까
유치한 단청 색깔로
붓의 힘을 뺀 제자(題字)보면
그대의 깊은 눈이 어떤 내색을 할지
나는 무덤에 못 가는 멀쩡한 사지(四肢)를 나무라고
침을 뱉고 송곳으로 구멍을 낸다우
간밤에는 바람 소리를 듣고
이렇게 시든다우
꿈이 없어서
꿈조차 동이 나니까
냉수만 퍼마시니 촐랑대다 지레 눕지
머리맡에는 그대의 깊은 슬픈 시선이
나를 지켜주고 있더라도 그렇지
싹수가 노랗다고 한마디만 해 주면 어떠우
(시집 『어름사니의 보행』, 1984)
[어휘풀이]
-제일(祭日) : 제삿날
-객초(客草) :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둔 담배
-도화사(道化師) : 민속극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익살을 떠는 역할을 맡은 배우
-상투머리 : 머리털을 끌어올려 틀어서 감아 맨 머리
-제자(題字) : 책의 머리나 족자. 빗돌 따위에 쓴 글자.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 김수영(金洙暎)의 제삿날, 그의 무덤을 찾아가지 못하고 대신 그의 누이에게 자신의 시집을 보낸 일을 노래한 작품으로, 담담하면서도 약간은 해학적으로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화자는 김수영이 죽은 이후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고백하는 형식으로 시상을 전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시집에 대해서는 유쾌한 투로 설명함으로써 죽음에 관한 어둡고 슬픔 느낌들을 슬그머니 지워 없애고 있다. 마치 죽은 김수영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이 시는 제삿날에도 그의 무덤을 찾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화자는 ‘금년에도 나는 생시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그 ‘대신에 산 아래 사는 /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 시집 한 권을 동기로 부쳤’다고 말한다. 『객초(客草)』라는 표제의 이 시집에는 죽은 김수영에게 부치는 ‘미사곡’[원제: 「김수영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동생의 죽음과, 그를 위해 정결하고 경건하게 추모하는 그 누이를 대상으로 한 시 「신귀거래 7」(누이야 장고하나!)을 쓴 바 있는데, 김수영이 이 작품에서 자신을 풍자적인 웃음으로 몰고 갔던 것처럼 김영태 역시 자신을 해학적인 몰골로 그려 내는 것이다.
김영태는 김수영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깔린 ‘풀꽃’과 자신의 시집 『객초』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시상을 전개시킨다. 그것은 마치 김수영의 ‘풀’과 자신의 ‘풀’을 대화시키는 듯한 모습이다. 또한 무덤이 있는 산 아래 살고 있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는 김수영의 시 「누이의 방」에 등장하는 그 정결한 누이이기도 하다. 김영태는 김수영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그 누이의 정결함에다 자신의 너저분함을 대비시켜 김수영에 대한 애도의 슬픔과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해학을 절묘하게 대응시킴으로서 놀랄 만한 시적인 화음을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김수영에게 대한 추모의 정을 표현하면서, 김수영이 추구했던 시 세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한편, 그것이 자신의 시 세계에 적지 않은 변화글 가져다주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국악인 김영동이 「멀리 있는 빛」이란 노래로 바꾸어 부름으로써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김영동은 전통과 현대, 순수와 대중음악의 세계를 넘나들며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음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작곡가이다.
[작가소개]
김영태(金榮泰)
1936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1959년 『사상계』에 「설경」, 「시련의 사과나무」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2년 현대문학상 수상
1982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서울신문사 제정 예술평론상 수상
무용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시집 :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1965), 『바람이 센 날의 인상』(1970), 『초개수첩(草介手帖)』(1975), 『간주곡』(1979), 『북(北) 호텔』(1979), 『여울목 비오리』(1981), 『어름사니의 보행』(1984), 『결혼식과 장례식』(1986), 『매혹』(1989),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1989), 『고래는 명상가』(1993), 『현대시 94』(1994), 『침묵으로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1994), 『남 몰래 흐르는 눈물』(1995), 『하늘 바람꽃이 핀다』(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