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008] 蘇軾-六月二十日夜渡海(유월이십일야도해)
六月二十日夜渡海(유월이십일야도해)
蘇軾
參橫斗轉欲三更(삼횡두전욕삼경)
삼성은 옆으로 기울어지고
두성은 비스듬히 돌았으니 한 밤중이 되어 가는데
苦雨終風也解淸(고우종풍야해청)
궂은비 멈추고 바람 잦아지며 맑아졌네
雲散月明誰點綴(운산월명수점철)
구름 흩어지고 달 밝으니 가려진 것 전혀 없고
天容海色本澄淸(천용해색본징청)
하늘 모습 바다 색깔 본디의 맑은 제 모습이네
空餘魯叟乘桴意(공여노수승부의)
'올바른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겠다.'고
말한 공자와 같은 뜻이 남아 있으나
粗識軒轅奏樂聲(조식헌원주악성)
황제가 들판에서 연주한 음악의 뜻을
어렴풋이 알았으니 대강의 도를 깨우친 셈이네
九死南荒吾不恨(구사남황오불한)
거친 남쪽 땅에서 아홉 번이나 죽을 고생을 한 것은 한이 되지 않으니
玆遊奇絶冠平生(자유기절관평생)
이번 여행의 기특함은 평생 처음 맛보는 것일세
>參(삼) : 삼수(參宿)별자리 이름,
이십팔수 중의 하나로 오리온자리 중앙에 나란히 있는 세 개의 큰 별
>斗(두) : 두성(斗星) 북두칠성
>欲(욕) : ~이 되려 하다
>苦雨(고우) : 오랫동안 내려서 재해를 일으키는 비, 궂은비
>終風(종풍) : 시경에서 종풍을하루 종일 부는 바람으로 풀이 한데 따름
>點綴(점철) : 단장하다. 얕은 구름이 약간 가리는 것
>魯叟(노수) : 공자를 가리킨다.
>乘桴意(승부의) :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려는 뜻을 가리킨다
>軒轅(헌원) : 중국 고대 전설 속 황제의 이름.
여기서는 헌원이 연주한 고악古樂(= 함지지악咸池之樂)을
바다의 파도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南荒(남황) : 남방의 거칠고 먼 땅을 가리킨다
>奇絶(기절) : 기특함이 뛰어난 것
>蘇軾(소식 1037 ~ 1101)
: 중국 송나라 때 대문호로 자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東坡)이며
시(詩) 사(詞) 산문(散文)에서 송대를 대표할만하고
아버지 소순, 아우 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이다.
[출처] 六月二十日夜渡海(유월이십일야도해)|작성자 simsan54
어떤 고난이든 내 기쁨의 계기로 삼는다네 등록 :2022-09-30 18:34,수정 :2022-10-01 21:42 [선시종가1080 마지막 편] (본문) 구사남황오불회(九死南荒吾不悔)/ 자유기절관평생(玆遊奇絶冠平生) 황량한 남방에서 아홉 번을 죽어도 후회 않고/ 기이한 절경을 유람하니 내 인생의 최고라네
송나라 소동파(蘇東坡·1036~1101)는 쓰촨성 미산(眉山) 출신이다. 인근에는 보현보살 성지로 유명한 아미산이 있다. 산시성 오대산 문수성지, 안후이성 구화산 지장 성지, 저장성 낙가산 관음 성지와 함께 4대 성지로 불리는 지역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남서북에서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미산에서 멀지 않는 곳에 세계 제일의 석각 좌불상으로 알려진 낙산대불(樂山大佛)이 있다. 3개의 강물이 합류하는지라 홍수 방지를 기원하는 기도처로 당나라 때 조성한 것이다. 아미산과 더불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목판 대장경인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蜀板)은 익주(益州·현재 成都)에서 완성되었다. 일찍이 이런 종교적인 분위기에 노출된 주변 문화가 소동파로 하여금 뒷날 많은 선승들과 교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또 관료로서 정치적인 낭패를 당할 때마다 수행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이난섬(해남도). <한겨레> 자료
(해설) 소동파는 1097년 63살이 되던 해에 담주(儋州)로 유배를 갔다. 다음 주는 지금 해남도(海南島), 즉 하이난섬이다. 지금은 유명 관광지이지만 당시 중국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황량한 섬이었다. 구성원 대다수는 원주민이며 대륙 방향 섬 북쪽에만 한족들이 일부 거주했다. 여느 유배지 섬처럼 먹는 것의 질은 거칠고 양은 부족하며 병에 걸려도 약이 없고 밖에 나가도 벗이 없으며 겨울에는 땔감이 부족하다고 묘사되던 지역이었다. 당신으로서는 황주(黃州)와 혜주(惠州)에 이어 세번째로 열악한 유배지였다. 환갑·진갑을 넘긴 노인네인지라 자손들은 이번 이별이 곧 사별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 통곡하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당신은 오히려 담담하게 ‘유월이십일 바다를 건너다(六月二十日夜渡海)’라는 시까지 남겼다. 설사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으며 오히려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최고의 인생기라고 노래했다. 섬이라는 유배 지역에서 살다 보면 두 번 울게 된다고 한다. 들어갈 때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처량해서 울고, 나올 때는 이웃과 정이 들어 떠나기 싫어서 운다고 했다. 소동파 역시 그랬다. 자기 고향은 쓰촨성이 아니라 오히려 해남도라고 말할 정도였다. 유배가 풀려 지역 주민과 헤어지면서 “나는 본시 해남도 사람인데(我本海南民) 서촉주에 잠시 얹혀살았다네(奇生西蜀州)”라고 하면서 도리어 지역 주민을 달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외교적 수식어도 수준급이라 하겠다. 3년 유배를 마치고 66살 때 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常州)에서 세상과 인연을 다하게 된다. 인근 금산사(金山寺)에는 예전에 이용면(李龍眠)이 그려준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었다. 1101년 7월28일 66살 때 ‘금산사에 있는 초상화에 스스로 적다(自題金山畫像)’라는 자찬(自讚)을 남기고 2개월 후 세상 인연을 접었다. 결국 열반송이 된 것이다. 마지막 2행에서 3곳의 유배지가 당신의 문학과 사상과 수행을 더욱 숙성시킨 곳이었노라고 술회했다. “.....평생 쌓은 공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問汝平生功業) 황주와 혜주 담주에 있다고 말하겠네.(黃州惠州儋州)” 하이난섬에 있는 소동파 동상. <한겨레> 자료
특히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을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친구의 도움을 받아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식솔들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이 땅에 동파(東坡·동쪽 비탈진 땅)라는 이름을 붙였고 스스로 동파거사라 하였다. 44살 때부터 50살까지 살았다. 보통사람 같으면 유배 시절에 선비가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짓게 된 농사에 대한 기억을 애써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그때 농장 이름을 자호(自號)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본명인 소식(蘇軾)보다는 소동파로 더 알려져 있다. 59살 때 유배지인 혜주(惠州) 생활도 잊지 않았다. 유배의 결과로 2700여수의 방대한 시작을 남겼고 또 수행자로서 선가의 <전등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모든 것은 황주와 혜주 다음 주 유배지에서 쌓은 공덕이라고 초상화 한 쪽에 스스로 기록했다. 절 집의 표현을 빌린다면 번뇌를 보리(菩提)로 전환했던 것이다. ‘선시종가1080’이라는 큰제목 아래 24번 연재를 거의 2년 남짓 걸려 마치게 되었다. 마지막 선시는 박영환 교수의〈송시의 선학적 이해〉라는 저서의 도움을 받아 소동파 선생이 남긴 마지막 글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대우 꿈동산에 연재를 주선해 준 조현 기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
天容海色本澄清 천용해색본징청
宋代苏拭 송나라 사람 소식(소동파)의
[六月二十日夜渡海 유월이십일야도해] 中
参横斗转欲三更, 苦雨终风也解晴。
云散月明谁点缀? 天容海色本澄清。
空余鲁曳乘俘意, 粗识轩转奏乐声。
九死南荒吾不恨, 兹游奇绝冠平生。
삼횡두전욕삼경參橫斗轉欲三更
삼성과 북두성 자리 삼경이 가까운데
고우종풍야해청苦雨終風也解晴
종일 궂던 비바람 멎고 맑게 개었네
운산월명수점철雲散月明誰点綴
구름 걷고 밝은 달 누가 꾸며놓았는가
천용해색본징청天容海色本澄淸
하늘빛과 바다 색깔 본래부터 깨끗하네
공여노수승부의空餘魯叟乘桴意
공부자 떼배에 오를 뜻 부질없어지고
조식헌원주악성粗識軒轅奏樂聲
헌원의 악곡소리 조금은 들을만하네
구사남황오불한九死南荒吾不恨
남쪽 섬에서 연명하는 것 원망하지 않으려네
자유기절관평생玆游奇絶冠平生
이곳 절경에서 노니는 게 평생 처음 일일 테니
完善译文 参星横北斗转已经快到三更时分,
久雨不停, 终日刮大风, 老天爷也应该放睛。
云忽散月儿明用不着谁人来点缀,
青天碧 海本来就是澄清明净的。
虽乘船渡大海空怀孔子救世之志,
仿佛听 到了黄帝咸池优美的乐声。
被贬南荒虽然九死一生我也不遗憾,
因为 这次远游是我平生最奇绝的经历。
"天容"句: 青天碧海本来就是澄清明净的.
比喻自己本来清白, 政乱污陷如蔽月的浮 云, 终会消散。
天容海色本澄清。出自
【宋】苏轼的《六月二十日夜渡海》
云散月明谁点缀?天容海色本澄清
。青天碧海本来就是澄清明净的。
自己本来清白,污陷如蔽月的浮云,
终会消散。
“천용(天容)” 구절: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는 본래부터 맑고 깨끗하다.
이 구절은 작자 자신이 본래부터 깨끗하고 맑았음을 비유했다.
정치적인 어지러움과 온갖 더러운 협잡이 뜬구름이
달을 가리듯이 세상을 뒤덮고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 흩어져 없어질 것을 시인은 확신한다.
[출처] 해남도 유배를 사면 받다
- 소식의 "6월 20일 밤에 바다를 건너면서
[六月二十日夜渡海]"
소식이 65세 되던 철종哲宗 원부元符 3년(1100) 5월에 사면을 받았으니
그가 남해 고도 해남도海南島에 머문 기간이 삼 년을 막 넘어서던 때였는데
이 작품은 그가 바다를 건너 육지로 돌아오던 날의 정경과 감회를 읊은 것이다.
섬에 머무는 동안 경제적으로 격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정치적 포부가 무산된 것에 대한 상실과 좌절의 크기가 작지 않았을 것이지만
소식의 시에서 읽히는 것은 오히려 낙관과 달관이고 하늘과 달,
그리고 바다로 빗대어 나타낸 자신의 고결함에 대한 자신감이다.
3. 和而不流 화이불류
[중용]에서 공자와 자로의 대화 中
出自《中庸》 “故君子和而不流,强哉矫!“意思是君子待人和气但不随波逐流。
고군자화이불류(故君子和而不流), 강재교(强哉矯)!
그래서 군자는 화이불류하니 강재교(强哉矯) 여기 재(哉) 감탄사이고
그 다음에 교(矯) 이거야 말로 또 강함이라는 의미 거든요.
그러니까 ’강재교(强哉矯)는
‘아~ 그러한 강함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하는 식으로 반복을 해서 이거를 후렴으로 계속 넣고 있습니다.
강재교가 네 번이나 나오죠.
그러면서 나오는게 군자는 화이불류하다.
진정한 강함이라는 게 뭐냐?
여기 이제 중용에 의해서 화(和)가 나오는 거죠.
군자의 강함이라는게 우선 뭐냐면?
화(和) 조화를 이룰 줄 아는 강함이어야 한다.
대의(大義)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화(和) 그런데 화하데 (不流)흐르면 안돼.
그러니까 화 같이 더불어 조화를 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뭐냐면 같이 흘러 버리거든.
맹자의 말이 이 흐른다는 말이 재미난 말이 있어요.
맹자의 양혜왕 하에는 “호화스럽게 뱃놀이를 하면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을 모르는 것을
류(流)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맹자가 참 말을 잘했어요.
그러니까 류라는 건 뭐냐면?
그냥 흘르기만 하고 돌아올 줄을 모른다 이거야
. 그러니까 우리가 맨 날 ‘우리 화목하게 삽시다’.
학교에서도 맨 날 조화를 운운하고 이러는 놈들은
항상 같이 흘르는 새끼들이야. 술을 먹어도 ‘야 좀 먹어라’
그러면서 술 잔을 주고받고 하면서 ‘같이 망가지자’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먹어도 자기가 먹고 싶으면,
자기 혼자 먹으면 됐지. 내가 먹어 가지고 망가지고 있는데
너가 왜 멀쩡한 정신으로 가만히 앉아 있냐?
같이 좀 망가지자 이거야.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화(和)가 류(流)예요. 흘러 버려.
[출처] [도올] 중용 21강 – 자로문강(子路問强) 화이불류(和而不流)
– 강하다는 것은 치우치지 않을 용기
4. 青山欲共松竹吟 청산욕공송죽음
푸른 산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읊고자 한다
青山欲共松竹吟, 意思是品行高洁,
坚韧不屈, 如松柏一般
품행이 고결하고 강인하여 굽힐 줄 모르는 것이
송죽과 같다.
[출처] 20201005 샤오잔공작실|작성자 0704오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