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서린 수승대를 찾아
청암선생과 상가댁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아침식사는 8시에 하기로 예정한 후, 이른 아침 수승대 산책길에 올랐다.
거창 수승대는 청암선생 일생에서, 온갖 애환이 서린 참으로 잊을수 없는 그런 곳이란다.
젊은 시절 대구에서 건설회사 대표로 있을 당시,주말이면 버스편으로 이곳 저곳 여행을 다니다가, 우연히도 발길이 명승 수승대에 머물게 되었고,빼어난 경관에 매료되어 놀라기도 했지만,요수 신권 선생이 머물렀다는 함양제의 허술함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에 그곳 주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것이 수승대와의 첫 인연이었다고 말한다.
함양제 관리자가 되어보려고,거창신씨 종친회 대표자들의 청문회(?)를 거쳐, 상당한 거금을 투자하여 재정비를 하기도 했는가 하면,그곳을 오갈때 마다 꽃과 나무들을 가져다가 정성껏 가꾸는 열정을 쏟기도 하였고....
그런가 하면, 수많은 시인 묵객과 명사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고,그런 인연들의 교류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단다.
수승대를 오갔던 세월이 어언 26년이었다니,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쌓였을까 짐작되는 일이며,그 세월 그곳을 지금껏 찾았던 발걸음은 그야말로 지극 정성이었다.
처음엔 상수도 시설도 없어 흐르는 물을 길어다 먹기도 하고,화장실도 수세식이 아니었다니 고생인들 오죽 했겠는가!
대구시절을 거쳐 서울로, 그리고 다시 천안으로 옮겨 다니시면서도, 그 먼곳을 멀다 아니하며 수시로 이곳을 오가며 관리해 왔다니,청암선생의 수승대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일이라 느껴졌다.
그런 추억의 사연들을 반추해 보며,관수루와 구연서원,거북바위와 요수정,연반석과 세필침등을 차례로 돌아보기도 하고,함양제와 원각사에 들려서는 오래도록 옛 추억을 떠 올려보기도 했다.
특히 원각사 현 주지승인 현정스님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려 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문차 찾아간 정도선생 사모님을 여기에 모셨다기에, 더욱 그곳을 찾아간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정도 신정규선생은 청암선생께서 수승대에 머물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던 분이셨다고 한다.
차창밖으로 잡아본 수승대 정문
현판 글씨는 안의 향교 전교를 맡고 계신 유암 신왕용선생이 쓰셨다고 한다.
거창 수승대는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에 위치해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조선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일제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것을 근심하였다하여 근심수(愁),보낼송(送)자를 써서 수송대라 하였는데,한편으론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걱정을 잊을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그후 조선 중종때 요수 신권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을 당시,퇴계 이황선생이 유람차 인근까지 왔다가,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수승대라 고치는게 좋겠다하여 이름이 수승대로 바뀐거란다.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명사들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물이 고인곳은 벼루로써, 선비들이 여기에서 붓글씨를 썼던 곳이란다.
이 돌다리는 홍수에 여러차례 떠내려 갔던 수난사가 있다고 한다.
쓰러질듯 옆으로 비스듬히 버티고 서있는 소나무들
*귀로에 잡아본 북면의 행단정
수승대에에서 북면계곡에 이르는 절경들을 사진에 담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이날 급히 천안에 올라와야 했기 때문인데,공교롭게도 대전을 막 지나칠 무렵, 청암선생과 아주 절친인 동창회장이 별세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또 다시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사진,글/시니어 리포터 박 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