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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십계명 1
출 20:1-11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1 / [십계명] 이 말씀은 모두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이다. 2)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었다. 노예였던 너를 내가 해방시켰다. 3) 너는 ㄱ)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모시지 말아라. (ㄱ. `내 앞에서'로 읽을 수 있다) 4) 너는 신상을 새기지 말아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이나 어떤 것이든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5) 그 앞에 절하지도 말며 섬기지도 말아라. 네 하나님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갚되 삼사대 후까지 갚으리라. 6)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내린 명령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7) 너는 네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10) 이레째 되는 날은 네 하나님 나 여호와의 안식일이므로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집의 가축이나 네 집에 몸붙여 사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어내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즐거운 날로 삼고 거룩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노정 중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1-2)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지역적인 인구이동이 아니라 이 땅에 실재하는 하나님나라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 세우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강성함을 보고 출산 시 유아 살해, 남자아이의 나일 강 유기, 험한 노동으로 인구를 줄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인구증가의 약속을 잊지 않고 더 강성하게 하셨습니다(창 12:1-3). 이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상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상에 보여줄 때가 된 것입니다(출 19:5-6).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7) 세상 사람은 다른 여러 신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외에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모두 가짜라고 하시며,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숭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 배타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말씀이기보다, 세상의 가짜에 속아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도록 하나님만 섬기며 살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지 않도록 하찮게 취급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8-11) 안식일은 예배와 쉼의 날입니다. 안식일에는 거룩한 모임인 성회로 모였으며(레 23:3), 모든 사람과 종, 가축, 손님까지 일하지 않고 쉼을 얻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쉼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강제노동에 동원되었고 스스로 짚을 주워 벽돌을 굽게 할 만큼 학대와 압제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에 쉬는 날을 율법으로 제정해 주셨습니다. 주인만 쉬는 것이 아니라 종과 가축도 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유와 평등, 은혜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적용: 십계명은 당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말씀 속에서 그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내일 할 일이 두 배가 되고 원래 내일 하려고 했던 일은 또 다음날로 미루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미루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변화를 꿈꾸면서도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계명들을 미루지 않고 실천해 나갈 때 내일 주시는 말씀도 기대하며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출 20:1-6 / 이필재 목사
지난 월요일 제가 새벽기도 마치고 출국해서 어제까지 아이티 선교현장에 다녀왔기 때문에 오늘은 아이티 현장 상황과 선교 보고로 주일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먼저 현장 사진을 한번 보여주십시오. 아이티의 수도는 99퍼센트가 이렇게 폐허가 되었습니다. 쓸 만한 건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무너져서 이렇게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화면에 보시는 바와 같이 흉악한 폐허이고 재앙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슬픈 현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100만 명가량이 천막을 치고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천막은 좀 좋아 보이실 텐데 군인들 것입니다. 유엔군들이 갈 곳이 없으니까 이런 정도의 천막을 치고 그 무더운 열대 지방에서 땀을 흘리며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아이티에 간 이유는 현지 목회자들이 최광규 선교사를 통해서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현지 교회 지도자들의 판단은 아이티의 문제는 영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이 영적 회복이므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함께 하는 영적 부흥집회를 아이티에서 한 번도 안했는데 이번 기회에 갈보리교회가 해결해 달라고 요청을 해서 제가 간 것입니다. 사람이 5~6천명이 모이려면 경비가 좀 필요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졌으니 이 목사님이 강사도 하시고 경비도 좀 책임져서 아이티가 영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아달라고 요청을 하셔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반가웠던 일은 아이티는 교회 역사가 우리보다 깊고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티에 유명한 교회 지도자들이 이번 집회에 모두 모여졌습니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이 분들입니다. 저와 최광규 선교사가 앞에 앉아있고 뒤에 앉아계신 분들이 아이티 전역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교회 지도자, 목회자들인데 이번에 다 모여져서 아주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평신도들은 계산해볼 때 약 4~5천 명 정도 모였습니다. 지금 그 나라 형편이 당장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 상황인데 예배 보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모두들 이렇게 많이 모일지 몰랐다며 놀랍게 평가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건물이 모두 무너졌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릴 만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열대지방의 뙤약볕 야외에서 진행할 수도 없어서 마땅한 장소를 찾아보다가 그 나라에서 제일 역사가 깊고 오래된, 그리고 제일 큰 교회 하나가 건축하다가 중단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이는 이 교회입니다. 지붕도 없이 기둥 세우고 벽돌만 쌓아가는 중이었는데 이것도 제일 잘 쌓은 쪽을 찍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 들어가서 이렇게 응달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전부 사람을 안내했습니다. 1층, 2층, 3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빽빽하게 응달이 될 만한 곳에 모여서 스피커로 방향을 양쪽으로 몇 군데로 틀어놓고 집회를 한 것입니다. 그 다음 화면을 보시면 하얀 옷을 입고 머리에 무엇을 썼는데, 이런 복장은 주로 가톨릭 신자들이 합니다. 제가 보니까 가톨릭 신자들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임이 있다고 하니까 모두 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햇볕을 가릴 수 있는 곳에 4~5천명이 모여 스피커를 여러 군데로 방향을 잡아서 집회를 했습니다.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오후 1시 30분에 끝났으니까 6시간 반 계속 집회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더운 날씨에 6시간 반 예배를 한 시간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계속 기도하고 통성기도하고 찬양하고 설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길게 예배드리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강사로 설교를 하고 최광규 도미니카 선교사가 설교를 하고 그 나라에서 최고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돌아가며 간단히 설교를 하고 기도 인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두가 대단히 만족하였는데 끈질긴 요청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 아이티에서는 이런 집회가 처음입니다. 갈보리교회가 도와주어서 이런 집회를 해주었는데 이렇게 2~3일에 끝나는 집회 말고 일주일 영적 부흥 운동을 시켜주는 일을 금년 안에, 10월 정도에 다시 한 번 해주십시오. 이 목사가 그때 와서 다시 해 주십시오. 우리가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해주십시오.” 그런 끈질긴 요청을 받았는데 제가 확답은 못하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스케줄이 다 되어 있어서 일 년에 한 곳에 두 번 가는 것은 힘들기 때문입니다. 확답을 안 하니 그러면 1월 달에 오라고 얼마나 끈질긴 요청을 하는지 모릅니다. 11명의 우리 아이티 갈보리교회 선교사들 모두 만나서 여러분이 주신 위로금 잘 전달하고, 도미니카 선교사 10명에게도 위로금을 전달하고 왔는데 바로 여기 제 뒤에 서계신 분들이 아이티에 있는 갈보리교회 선교사들입니다. 이분들 아주 열심히 일 잘하고 얼마나 고맙게 표현을 하는지 이번 지진으로 인해서 아이티를 돌아보는 데가 없는데 우리는 계속 열심히 후원하고 기도해 드리니 정말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소식이 왔을 때 선교사 한 분이 건물에 깔려 돌아가셨다고 저에게 이메일이 와서 저도 그런 줄 알고 여러분에게 광고를 했는데 그게 아니고 선교사의 부인이 건물에 깔렸었습니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저 빨간 옷 입은 여자 분입니다. 갇혀 있다가 12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어 나오셨습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남편입니다. 그래서 부부인데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사입니다. 12시간 만에 살아나와 너무 반갑고 감사하다고 공항에 마중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 부부와 동행하였고 특별히 음악은 도미니카 빅터 선교사가 했는데 더욱 고마운 것은 그 나라의 경찰 최고 책임자인 경찰 총장이 축사를 해주셨습니다. 이 분이 와서 해주셨는데 지금 아이티의 문제는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치안 유지이며 하나는 영적 부흥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영적 부흥 운동의 기초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게 되어서 희망이 있다고 감사하다고, 나는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할 테니까 여러분은 영적 부흥 유지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축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권사님들이 사주신 자동차에다 음악 기구, 스피커를 싣고 도미니카에서 그곳까지 갔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저 자동차입니다. 이 자동차를 이번에 얼마나 잘 썼는지 감사해서 다시 한 번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 그 나라 수도 포토프랭크인데 대통령 궁을 비롯해서 건물들이 모두 못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건물 99퍼센트가 다 무너져 버렸답니다. 그 나라에서 지금 그렇게 판단합니다. “수도 재건은 할 수 없다. 이 도시는 이제 폐허 빈터로 그대로 두고 폼페이 도시와 같이 폐허 관광지로 그냥 쓰고 다른 곳에다 수도 건설을 새로 설계해서 하는 것이 돈이 절반 밖에 안 된다.” 제가 가서 볼 때도 그렇게 판단되었습니다. 그 쓰러진 건물들을 포클레인으로 다 긁어내어야 하는데 도저히 할 수 없고 그 나라에는 포클레인도 없습니다. 전부 괭이나 삽을 들고 있는데 그게 뭐가 됩니까?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나라에서조차 그렇게 판단하고 이것은 “폼페이 최후의 날”과 같이 그냥 폐허 관광지로 유지하고 “그때 지진이 나서 이렇게 망가졌다.” 그렇게 남겨두고 다른 곳에 수도 건설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너진 건물을 정리할 수 있는 장비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며 집계로 30만 명이 죽었다고 통계를 냈는데 그것은 찾은 시체만 그렇습니다. 건물더미에 아직도 깔려있는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비가 있어야 들춰내는데 손으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만 찾아낸 것이지 진짜 깊숙이 묻힌 사람은 한 사람도 못 찾습니다. 그대로 그냥 덮여 있는 겁니다. 그러니 숫자는 30만의 배가 될지도 모르는 현상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약간의 치안 유지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유엔군 때문입니다. 유엔군 장갑차들이 거리에 즐비하게 질서 유지를 하고 있는데 특별히 미군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들이 와서 천막을 치고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고 먼지 구덩이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질서 유지를 하느라고 노력하기 때문에 질서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아주 기적 같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99퍼센트가 다 무너졌는데 미국 대사관은 벽에 금도 안 갔습니다. 100퍼센트 그대로입니다. 지금 아침마다 이 미 대사관 앞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으로 살러가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한 1천 명씩은 늘어서서 서류를 만들어서 대사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고아들을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데려다가 키워주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고아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아가 있으면 금방 누가 와서 자기가 키우겠다며 데리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도 몇 만 명 데리고 가서 입양해서 다 살지 않았습니까? “아이티 고아들도 우리가 책임지겠다.” 그런데 세계 각국에서 “미국이 아이티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다.”며 난리를 치기 때문에 활성화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는 원합니다.
약 100만 명 정도가 간단한 천막을 치고 살고 있는데 다행과 불행이 있습니다. 일기가 춥지 않아서 천막생활이 가능한 기후입니다. 이것은 아주 고마운 것입니다. 천막 하나 쳐놓고 사는데 추우면 얼어 죽잖아요? 그런데 그 나라는 일기가 일 년 내내 따뜻하고 더우니까 그런 염려는 없습니다. 불행은 뭐냐? 우기 철이라 비가 쏟아지면 이게 다 물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유엔군들도, 그 나라 사람들도 운명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계 3대 빈민 지역이라고 있습니다. 저는 모두 가 보았습니다. 이 아이티의 빈민 지역은 지진이 나기 이전에도 세계 3대 빈민 지역에 들어갑니다. 80만 명이 살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거의가 다 하루에 1불 정도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위생은 최악의 상태라서 그 나라에 가서는 물도 마시기 힘든 상황이고 빈민촌의 아이들은 60퍼센트 이상이 학교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거지 떼가 되어서 그냥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시나 가보실 분들은 생각하실 것이 매우 위험합니다. 외국인들을 보면 무조건 달려들어 떼거리로 무엇을 얻으려고 돈을 갈취하려 하니까 힘이 듭니다. 그래서 자동차도 그 나라 사람이 운전을 해야 그냥 두지 외국인이 운전하는 것을 보면 가로 막습니다. 그러면 끌어내려서 다 강탈해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집단적으로 죽음의 극한 상황에 빠지면 모두 폭도로 변하는 군중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현장에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것은 유대 백성의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견디었을까?’ 지금 온 세계에서 아이티 구호금을 모금 했는데 사실 얼마나 많이 걷히었는지 그 돈만 가지면 아이티 재건은 넉넉한 금액이 됩니다. 거기에 있는 한국 대사도 현재 4천만 달러 모금액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가? 돈이 아이티로 안 오고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줄 곳이 없습니다. 아이티는 지금 행정 마비입니다. 돈을 줄려고 해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도 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은행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거래가 되는 것인데 은행 건물들이 모두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재정 업무가 모두 마비되니까 돈을 주려고 해도 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한인 교회들도 모금을 많이 했는데 어디, 누구한테 보낼 대상이 있어야 보내주는데 지금 보낼 수가 없습니다. 공중에 날려 보낼 수가 없잖아요? 행정 마비입니다. 지금은 우리 갈보리교회처럼 현장에 가서 현장 식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위로해주는 일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상태입니다. 더군다나 10월 달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현재 대통령은 재선될 가능성은 하나도 없는 무능한 대통령입니다. 현 정부를 믿고 그 관리들을 만나서 돈을 갖다 준다는 것은 그 관리들을 돈 보따리 갖고 도망가기 좋게 만들어주는 일 밖에 없다고 모두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돈을 보낼 수도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재건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희망이 안 보이는 캄캄한 지옥과 같은 현실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 살아있는 생명을 기약 없는 내일로 비참스럽게 연결하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것을 심판적 재앙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적 재앙이니까 영적 부흥을 하기 전에는 재건이 어렵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사위가 들었던 호텔도 가보았습니다. 이웃 호텔은 무너져서 그 호텔에서만 300명 정도가 죽었는데 제가 갔던 호텔은 심한 정도가 아니라서 살았던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제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서 “여기 내가 실제로 와 보니까 이렇게 위험하고 한국 사람들이 거리를 가본다는 것은 도저히 걸어가 볼 수 없는 형편인데 그 몇 식구 먹고 사는 문제 가지고 이런데 까지 와서 사업을 해야 하느냐? 여기 보니까 매우 위험하다.” 저는 가족이니까 걱정되어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대답을 뭐라고 하느냐? “그렇게 위험한데 아버님은 왜 거기 가 계십니까? 선교하러 다니는 사람이나 사업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사업가는 아이티가 아주 매력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아이티에 러브콜을 계속 보내고 있으니까 아이티 제품을 계속 받아주고 있습니다. 벌써 내가 수십만 장 제품 만들어서 미국으로 선적했습니다. 그리고 위험스럽긴 해도 사업가들은 흥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런 기회를 왜 놓치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거기에서 수입되는 금액 그 나라 고아들을 위해서 몇 프로를 쓰기로 이미 계획을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시고 기도 많이 하시고 이번 수요일에 제가 또 들어가니까 수요일까지 거기 계십시오.” 나에게 그렇게 전화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잘해라.” 그러고 돌아왔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그 나라에 있습니다. 열매가 많은 나라이라서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이번 집회에 최고로 수고를 많이 한 그 나라 최고 지도자 총회장이 나더러 호텔은 언제 무너질지 몰라 위험하니까 자기 집에 와서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해서 당신 집은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고 물으니 1층이라서 무너져도 탈출할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자고 하며 총회장 집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잤는데 그런 현장에서 우리가 먹을 밥을 어떻게 해달라고 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도미니카에서 컵 라면을 사가지고 들어가서 컵라면을 끓여서 먹고 과일을 따먹었습니다. 아이티는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과일나무가 집집마다 있는데 야자수, 망고, 아보카도, 바나나가 많이 열립니다. 그래서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화면에 나오는 사진이 식사하기 위해 제가 야자수를 따서 먹는 겁니다. 저렇게 따면 물이 한 컵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 최광규 선교사와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야자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야자수를 쪼개면 속에 하얀 속살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수저로 긁으면 식량이 됩니다. 그래서 물을 마시고 식량으로 먹고 그 집에서 있던 바나나, 망고도 먹었습니다. 다음 화면 장면은 제가 감사패를 받는 모습인데, 이번 총회장이 행사를 다 마치고 저에게 감사패를 하나 주어서 받아서 저 분 댁에서 잤습니다. 이번에 최고 수고를 많이 하셨고 꼭 다시 한 번 찾아달라고 교인들에게 광고를 하면서 지금 감사패를 주는 장면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 세상 어디나 열악한 곳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후가 춥지 않으니까 이것을 견딜 수 있고 열매가 많으니까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그 거리에는 자기 집에서 열매를 따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 파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습니다. 식량이 없으니까 잘 팔리고 싼 값에 살 수 있으니까 오고 가는 사람들이 길에서 식량으로 사서 먹는 상태에 있습니다. 공항 청사도 폐쇄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고 건물에서 컴퓨터 입력 없이 얼굴 보고 ‘맞겠다.’ 생각되면 도장 하나 찍어주면 그냥 들어가고 나올 때도 그렇게 하는 형편으로 지금 치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공항에는 지금 도와주기 위해 찾아오는 미국 비행기들이 하루에 수십 대씩 뜨고 내리는 상태입니다. 이런 발걸음이 오고가면서 재건의 희망을 보이는 겁니다. 우리 한국의 어떤 NGO 단체가 현장에 가서 비상식량 나누어 주는 작업 하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질서가 유지되는 한국 같은 사회인 줄 알고 비상식량을 펴놓고 하나씩 나눠주는 작업을 했는데 5~10분 만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다 가져가버리니까 생명 유지하기도 힘들겠다 싶어서 다 버리고 도망을 간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형편이 그렇습니다. 이 공항에는 사람들이 볼 일도 없으면서 먼지 구덩이에 바글바글 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공항에 있느냐? 외국에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의 가방을 대신 들어다주고 1불짜리 돈을 주는데 1불이면 하루 식량이 됩니다. 제가 일을 다 마치고 도미니카를 나오니까 마치 지옥을 빠져서 천국에 온 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그 나라를 위해서는 영적 회복이 제일 큰 문제이고 그들의 제일 큰 희망은 미국입니다. 미국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인 판단을 해볼 때 그 나라의 목회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목회자들의 확신은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부두’라고 하는 미신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두의 제일가는 대상이 뭐냐 하면 뱀입니다. 그래서 이 부두신 뱀에게 나라를 바치는 행위를 많이 해 왔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정보를 준 그 목사는 2006년에 이 나라 국회가 국회 안건으로 부두 뱀신에게 나라를 바치는 결정을 국회가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모인 목회자들은 “이 나라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영적 회복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 우리가 몇 년 전에 미국 루이지애나에 태풍 피해로 아이티 같은 피해가 온 것을 우리가 본 바 있습니다. 미국이기 때문에 복구가 빨리 된 것뿐입니다. 바로 그 루이지애나 피해 지역에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이티 이민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민 가서도 바로 이 미신종교행위를 거기서 얼마나 많이 행했는지 루이지애나 빈민촌은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아이티 이민자들에 의한 우상숭배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거기를 싹 쓸어버리는 재앙을 받으신 것이라고 아이티 목회자들이 해준 이야기입니다. 뱀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문화는 성경에도 얼마든지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성경에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 역할을 뱀이 했다고 나타나 있습니다. 뱀은 마귀의 상징입니다. 시편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용의 머리를 부시도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용이 하나님인줄 알고 섬기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용보다 크시고 능력 있으신 분인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용 문화는 옛날 바벨로니아에서 시작된 우상종교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용은 실제로 없는 허구성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을 찾다가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중국으로 들어와서 중국은 용 그림 문화로 유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문화가 용문화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에도 그 영향이 크게 나타나서 용 문화는 무시 못 하게 전해 내려와서 우리나라에서 심청전 같은 소설이 유명해진 것입니다. 뱃사람들이 오고 가는 뱃길이 편하려면 인당수 깊은 물에 살고 있는 용에게 처녀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무속신앙이 설득력 있는 국민 민간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던 심청이가 공양미 300백 시주를 하면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이 떠질 것이라는 그 말을 믿고 팔려가서 인당수 물에 잠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오랫동안 이 소설이 큰 역할을 했잖아요?
애굽 문화의 중심인 스핑크스의 이마에 붙어있는 것을 보세요. 코브라 뱀입니다. 이 뱀 문화는 마귀를 창조주로 섬기는 문화 이것을 디아볼리즘(Diabolism) 문화라고 합니다. 지금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세계적 사업하는 사람들이 ‘디아블로(Diablo)'라는 상표를 만들었는데 ‘디아블로'는 마귀입니다. ‘디아볼리즘'이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생각이냐? 이 ‘디아블로’는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치고 나가는 힘이 있어서 성공할 확률이 너무나 높다. 하나님도 치려고 했던 힘이다.” 마귀가 그랬잖아요?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한 스포츠 회사가 지금 거기에 제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골프채라든가, 운동화라든가 상표를 만들어서 내보냅니다. 그런데 다른 회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때 자기들 상표를 ‘디아블로’라고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치고 나가라. 그래서 우리가 앞서나가야 된다.” 이런 것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이 쓰시는 화장품에도 디아블로 화장품이 자꾸 생기는 이유가 “디아블로는 힘이 있다. 치고 나가라.” 그런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세계는 와인 경제가 벌어지고 있잖아요? 칠레 와인이냐, 프랑스 와인이냐, 캘리포니아 와인이냐? 그런데 지금 한쪽으로 몰리고 있잖아요? 여러분이 비행기 타시면 “칠레, 프랑스, 캘리포니아 중 어느 와인을 드시겠습니까?” 항상 묻잖아요? 이 세 와인 회사들이 와인 경쟁을 벌리고 있는데 한쪽이 도무지 따라갈 수 없으니까 어느 한쪽에서 상표를 디아블로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치고 나가는 힘이 강하니까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지금 향수도 디아블로 향수가 많이 나와 있잖아요? 아마 우리나라 기업도 어느 때 디아블로가 나올지 모릅니다. 이것이 디아볼리즘(Diabolism) 문화라고 합니다. 마귀의 세력의 한 모습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저는 국제 경기에 자국인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제가 반대하는 것은 ‘붉은 악마’입니다. 외국 가면 묻습니다. “한국은 기독교 강국인데 왜 붉은 악마의 이름으로 나오느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왜 가만히 있느냐? 붉은 악마는 나쁜 것이지 않느냐? 성서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한국은 왜 붉은 악마의 문화로 변했느냐?” 사실 저는 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에서 그랬는데 도대체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붉은 악마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누구도 거부 못하는 거센 물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파란 티셔츠에다 하얀 글씨로 ‘푸른 천사’라고 하는 것이 어떠냐?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게 제가 제안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붉은 악마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사랑하고 있습니다. 붉은 악마라고 요즘에는 뿔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악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사랑스럽고 귀엽고 안아주고 싶은 존재로, 그래서 그 옷을 입고 뿔을 달면 너무나 예쁜 문화로 변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막 붉은 악마의 역할을 하다가 그 중에 교회에 왔는데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이 악마는 사탄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벌주실 것이다.” 이렇게 마귀를 때리는 설교를 하면 ‘어? 내가 악마인데? 내가 붉은 악마인데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나라에 이런 문화가 생겼단 말입니다.
마귀는 머리가 영리하여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성공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 그래서 창세기의 뱀은 간교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문화를 타고 들어가기도 하고 뭐든지 타고 들어가서 이 세상을 나쁘게 만들어놓습니다. 성경에도 보세요. 지금 붉은 악마는 젊은이들에게 귀엽고 예쁘고 아주 사랑스럽게 보잖아요? 뿔까지 다니까 더 예뻐 보입니다. 창세기에 보세요.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그것을 따먹었다고 했습니다. 죄의 시작이 그렇게 된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렇게 말씀이 다 나와 있잖아요? 오늘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광야 사막 모레 벌판에서 아이티 국민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뜨거운 열매 기후에서 빈약한 천막 하나를 치고 그날그날 생존을 위한 식량 구하기 비상 작전을 벌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래도 지금 아이티는 농촌으로 가면 맑은 물이 있고 푸른 벌판이 얼마든지 있고 일 년 내내 과일 나무가 열매를 내주고 세계인의 관심과 구호품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고 유엔군이 와서 치안군을 맡아주고 있고 온 세계 NGO단체들이 서로 이 돈을 좀 받아 달라고 구호 보따리를 들고 아이티 구원을 외치고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 날마다, 날마다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도와주러 오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비행기들이 아이티 공항에 수십 대씩 뜨고 내리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백성들은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안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상황의 방향을 잃은 백성들에게 절대적 방향제시를 하는 십계명이 발표되는 시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살길이 무엇이며 희망이 무엇인가? “미국도 유엔도 우방도 NGO도 아니다. 하나님이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 절대의 신 하나님을 섬기면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며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저 평화의 땅으로 너희가 갈 것이다.” 이 하나의 목표 때문에 질서 유지를 하고 그 하나의 방향을 향하여 그들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은 절대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이 천대까지 나타납니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까불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 하나님의 심판적 재앙은 인간이 까불다가 얻어맞은 하나님의 심판 아닙니까? 911 테러가 났을 때 미국의 설교자는 거의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이여! 겸손 하라. 경고 받은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태극 마크를 팔뚝에 달고 그 먼지 구덩이 위험한 폐허 속을 그래도 무엇인가 도움을 주려고 땀을 흘리는 우리 한국 청년들을 만났을 때 참 눈물겹게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돌아오는 길에는 예전에 LA에서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오랜 친구 목사를 만나서 피차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무슨 일로 여기에 왔어?” “아니, 이 목사는 무슨 일로?” 둘 다 대답은 “무슨 일을 찾아보려고….” 저는 할 일을 찾고 왔습니다. “아이티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아이티를 살린다. 아이티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필요한 부분에 도움을 주고 선교사들 더 많이 파송해주는 일이 아이티를 살리는 길이다. 지난번에 착한사마리아인 주일 지켜준 헌금을 들고 또, 교우들이 협조한 헌금을 들고 가서 이번에 그들이 말하는 아이티 회복의 기초가 오늘 놓아졌다. 여기서 끝나면 안 되니까 계속해서 이 모임을 해가자.” 거기에 모인 모든 목회자들이 아름다운 반응을 보여주었고 우리 예배 보는 것을 전국에 라디오로 생방송 중계를 했고 마지막에 “아이티여, 일어나라!” 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모든 순서를 끝냈습니다. 오늘 말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나님만 섬기는 우리 갈보리교우들, 하나님만 섬기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돌판에 새겨진 말씀
출 20:1-3 / 이규현 목사
오늘날 우리 시대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위기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혹시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온통 위기라는 이야기를 요즘 참 많이 듣습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위기 가운데 하나는 기준이 희미하거나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를 상대주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주의의 반대말입니다. 상대주의라는 말은 절대주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소위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절대적 진리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절대’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절대라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화는 "너 자신을 믿고, 네가 옳다고 하면 네가 옳다. 너의 감정에 충실하라! 믿을 것은 너밖에 없다."고 합니다. 개성이 강조되는 세상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봄에 겨울옷을 입든, 가을 옷을 입든, 속옷을 겉에 입든, 아내를 남자로 하든 취향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도 취향이라고 합니다. 성적기호, 개인의 기호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방종의 시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사기가 그랬습니다. 사사기의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의 key 구절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죄란 무엇입니까?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기준에서 비껴난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 기준을 무시하고 벗어나 자기가 옳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자기 마음에 끌리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은 결국 혼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방향을 잃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졌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를 판단한 기준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해졌다는 것은 죄라는 단어 자체가 실종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은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법으로 구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normal, 정상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abnormal,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이 비정상이 되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순리를 거부하며 역리를 씁니다. 사랑이 왜곡되고, 결혼이 왜곡되고, 가정이 흔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분별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자유가 오는 것이 아니고 혼란이 옵니다. 세월호 2주기를 맞았습니다. 왜 멀쩡한 배가 바다에서 갑자기 침몰하고 말았습니까? 설계도면을 무시한 것입니다. 원래 그것을 디자인한 설계도면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해버리고 변형을 시킨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자기 욕심이 기준이 되면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죽입니다. 내 기호, 내 생각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본래의 설계 도면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길을 잃는 것입니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다 쪽으로 향하다가를 반복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전투기 조종사들이 헷갈릴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바다로 내리꽂습니다. 그런데 헷갈릴 때는 자기의 기분, 느낌, 자기의 눈을 믿으면 안 됩니다. 계기판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적인 방종과 타락이 거세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삶이 깨어지고 망가지는 이유는 우리를 지켜주는 절대적 기준을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켜줄 울타리가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덜너덜해져 버리거나 없어져 버렸습니다. 기준은 없는 것입니다. 기준은 ‘나’가 되었습니다. 최소한의 규칙이나 룰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각자 자기만의 룰이 있을 뿐입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왜 십계명을 다루어야 할까요? 우리의 삶이 왜 힘든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이 바로 십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혼란의 시대에 방향 표시등과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삶의 기준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십계명은 단순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 메시지가 십계명 안에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계명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십계명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성경에서 두 번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있습니다. 신명기 5장에서는 모세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목전에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노예생활을 끝내고 광야 생활을 끝낸 백성들이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삶이 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기준, 규칙, 원칙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 자체는 아주 간결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삶과 신앙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두 돌판에 새겨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역사를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핵심적 계명입니다. 구약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에서 십계명은 “열 마디”라는 뜻이 있습니다. 데카로그스(Decalogues)라는 영어를 씁니다. 열 가지 말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계명은 어떤 제안이 아니고 권고가 아니고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엄중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명령, 이것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지키면 축복이 되지만 지키지 않을 때는 그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은 바로 불순종한 당사자가 지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계명을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깁니다. 사실 이 십계명이 기록된 것은 B.C. 1300년경입니다. 아주 오래된 고대사회에 어떤 히브리 민족에게 주신 하나의 법전을 오늘 시대에 어울릴까,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진리는 세월이 바뀌면 또 다른 진리로 변형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문화와 민족과 역사를 통틀어 어디에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언제나 영원합니다.
그리고 인간도 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죄짓는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형태만 다를 뿐이지 똑같습니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시대가 변했다고 수정해야 할 내용이 아니고 절대적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열 가지 제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은 누가 주셨을까요? 주신 분이 누구이신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주셨는가를 바로 알아야 순종을 결정하게 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십계명은 하늘로부터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기준을 제시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시고 하나님은 법칙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이 원리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세상이 돌아가고 운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질서 아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용설명서를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규범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십계명이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핵심 요약,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삶이고 우리의 삶의 근원, 원칙, 법칙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용설명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있을 때, 큰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줬습니다. 좋은 장난감을 사줬더니 무언가 복잡했습니다. “순서를 바꾸면 망가집니다.”라는 경고가 있었습니다. 순서를 한 번 잘못 끼우니 안 되기 시작했습니다. 끝난 것입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의 근원을 따라 들어가면 출발지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진단을 하지 않고 미봉책을 자꾸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면 우울증 약을 처방하면 우선은 해결됩니다. 의학적 처방은 마땅히 해야 하지만 의학적 치료만으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인생이 허망한지, 왜 내 삶에 기쁨이 없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요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돈을 못 벌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습니다. 불안하고 삶이 힘들고 지치면 어디에 휴가 갔다 오면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휴가를 갔다 오면 일시적으로 긴장은 완화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즘 가정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답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미봉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십계명을 보면서 우리의 창조의 하나님이 디자인하셨던 원형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십계명 안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지침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거나 살인하지 말라거나 거짓말하지 말라거나 보편적인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십계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먼저 허락하시고 자유함을 얻은 백성들이 그 자유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불러냄을 받은 백성들이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이교도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백성들이 되었지만 이전의 애굽에서 살 때 삶의 기준과 방식을 버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준,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십계명이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누구인지, 자기의 아이덴티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구별된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불러내셔서 구별된 백성으로 우리를 모아 주신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닮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다른 자들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시는 부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신자들마저도 기준이 모호해진 시대입니다. 십계명을 잘 모르기도 하고, 잘 다루지도 않고, 십계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삽니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직장 속에서, 세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 구별된 백성인가?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세상 속에서 기준을 지키고 십계명을 붙잡고 나아갈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 안에서 순종하고 질서를 지켜갈 때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유지하고 통치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쓸데없는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진정한 행복,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바깥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무엇을 달라고 하면 손을 씻고 오라고 합니다. 그럴 때, 따지면 안 됩니다. 씻고 오면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부모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준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아이를 괴롭히기 위해서 규율을 만들고 명령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셨음으로 이제는 구약의 율법은 의미가 없다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신약의 시대는 오히려 구약 때보다 율법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되고 율법의 역할이 달라졌습니다. 율법의 효용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신약시대에는 더 구약시대보다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행했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 하나님의 말씀들이 귀중해 진 것입니다. 억지로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 잘하고 은혜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은혜 받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니 이 명령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꾸어 놓는 원리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주실 풍성한 약속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심각한 훼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도 세상의 영향을 받아 기준이 모호해 졌습니다. 그래서 신자임에도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원리들, 기준들을 내가 무시하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계명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철학과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과 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고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기분이나 우리의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론과 하나님의 주장과 하나님의 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꾸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수학문제를 풀다가 풀리지 않으니 공식이 문제가 있다고 공식을 내가 만들어서 풀려고 해 보면 완전히 꼬입니다. 풀리지 않는다면 공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우리의 기준과 규칙을 깨뜨려야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다원주의 시대에서 십계명과 같은 말씀은 결코 달가운 말씀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다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대중성이 없는 설교입니다. 이미 세상에 많이 물들어 있는 분들일수록 십계명은 매우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어그러지고 꼬였던 문제를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맛보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언제든지 곁길로 빠질 수 있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믿던 사람도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 자신도 모르게 변질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고.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려는 내 삶의 기준을 내가 세우고 누구에 의해서 간섭받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인간의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 우리의 감정, 우리의 기호, 우리의 기분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향을 조금이라도 용납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내 삶을 내가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요즘 좋지 않은 중독에 빠진 환자들이 많습니다. 중독이란 자기가 자기를 다룰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통제 바깥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들입니다. 갈수록 더 매이고 더 구속되고 더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십계명은 로드맵이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짐이고 거추장스러운 것 같지만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 계명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며 주님이 우리의 멍에를 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주신 계명도 사랑하게 되고 기쁨으로 따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십계명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그 앞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에 놀라운 회복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인 줄 믿습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관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둘 중의 하나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십계명 안에는 관계라는 주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가운데서도 십계명 속에서 앞의 세 가지 계명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이 세 계명을 단단하게 붙들어 놓지 않으면 뒤에 나오는 계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누구와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총체적 회복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1절과 2절을 다시 한 번 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이고 친밀하고 인격적으로 대하시시지 어떤 규정으로 노예로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친밀하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고 우리 삶에 관여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며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계명 안으로 들어가 보면 막힌 관계를 회복하게 해 줍니다. 결국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면 반드시 이웃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나와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그것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온전한 회복이 되지 않으면 나와 나와의 관계도 회복이 안 되고 나와 이웃과의 회복이 안 됩니다. 총체적으로 내 삶이 꼬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모든 것을 여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의 절망과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깨어짐은 우리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이 없는 곳을 달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동차에 엔진이 없는 것, 나무에 뿌리가 없는 것, 아이에게 부모가 없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십계명 속에는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개인은 물론 나를 둘러싼 주변과 공동체, 온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너무 크고 놀랍습니다.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 도덕적, 사회적, 관계적 모든 영역에서 회복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계명은 단순한 윤리서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기본적인 관계를 바로잡아줌으로 총체적 회복을 가져오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요소가 이 십계명 속에 담겨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여기서 애굽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속한 세상은 어둠의 세력들, 사탄의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자세히 보면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족쇄들이 매여져 있습니다.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족쇄들은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족쇄는 우리가 스스로 풀기에는 버거운 것입니다. 때로는 그런 족쇄가 내 인생을 끌고다니는 데도 불편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난파를 당한 세상과 같은 오늘의 시대. 삶이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고 있는 이 시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마저 너무도 많이 삶이 무너져 있는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무너진 기준을 새롭게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십계명이 너무도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는 가운데 느슨해진 기준을 새롭게 하고 무너진 기초를 다시 견고하게 새우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삶에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던 부분들에 무너진 기초를 온전하게 세워나갈 때 지금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어려웠던 문제들이 저절로 풀려지는 은혜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내 개인의 삶뿐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환경들까지 다 바꾸어 놓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도우시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이 충분히 우리가 감당하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이 십계명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귀중한 기준이 되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기준을 분명히 붙잡는 믿음의 삶을 살기를 결단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와 십계명
출 20:1-5 / 피영민 목사
서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Incarnation)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사건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법을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두 돌비에 써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음성으로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우레와 번개가 치고 산이 진동하는 등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계명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인간의 삶의 기준이 바로 십계명이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죄의 기준이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모두 다 지킨 사람만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일점일획도 어기지 아니하고 다 지킨 사람만 의인입니다. 그런 사람만 천국에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계명을 다 지킨 사람이 있을까요? 의인이 있을까요?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대 선언입니다.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십계명을 다 지켜 의인이 될 수 있는 가?”는 결론이 금방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럴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신성을 가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시다가,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두 가지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죗값을 해결 받는 죄 용서함의 복을 받고, 설령 십계명을 다 어겼다 할지라도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이 자리에 죄가 있어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이 땅을 사실 때 33년을 사셨는데 죄가 없는 완벽한 의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의 의가 옷처럼 우리에게 입혀져서 의를 전가 받았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법적인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의 옷을 입고 법적 의인 대접을 받으며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바로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니까? 이 일에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생각해 볼 것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십계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십계명 말고 또 다른 법을 주셨는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유행했고, 또 대부분의 이단들이 따르고 있는 세대주의 종말론은 율법폐기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법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십계명은 쓸데없고 신약성경이라는 새로운 법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강조하고 십계명을 사랑하고 지키라고 말하는 모든 주장을 율법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대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십계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목적은 이런 유형의 율법폐기론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과 십계명은 역사상 단 한 순간도 폐지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차대한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Ⅰ. 십계명은 성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법인가?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폐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십계명이 아닌 신약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궤변입니다. 그저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십계명과 신약의 법은 대치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고의적으로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려는 말에 불과할 뿐이며, 성립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예수님도 십계명을 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고, 완전케 하려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첫째 돌비와 둘째 돌비로 되어 있었는데, 첫 돌비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고, 둘째 돌비의 내용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법을 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느 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을 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 누구도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십계명이 사람을 의인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십계명 속에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의인의 기준이 될 만한 것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화케 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잘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 목적대로 쓰여야 유익하듯이 십계명 역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십계명은 성도가 복된 삶을 사는 지, 환란을 당하는 삶을 사는 지에 대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입어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어떤 사람은 복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은 환란을 당하기도 하는 데 그 기준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행하지 않으시고, 십계명의 기준을 가지고 복과 환란을 결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내용입니다. “십계명을 잘 준수하면 가나안 땅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을 어기면 기근과 전쟁과 질병을 겪게 될 것이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무시하였고, 서로 다투고 싸우고 우상 숭배하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살면 복을 받지만, 이를 어기면 환란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하고 도적질하고 바람이나 피고 사기나 치는 사람의 삶이 복되겠습니까? 당연히 환란이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부모를 잘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면 그 사람의 삶은 순조롭고 복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기준으로서 엄연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너희가 십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고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이기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면 너희는 반드시 살 것이고 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어제까지 죄를 짓다가 오늘 돌이켜 의를 행하면 오늘부터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의롭게 살다가 오늘부터 죄를 짓기 시작하면 환란이 닥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 시간부터 작심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을 받기 원하시면 십계명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은 거듭난 성도의 새 성품 안에 내적으로 기록될 것이며, 성도는 그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법이 심비(心碑)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상 숭배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다!”, “이웃을 학대하고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 돌비에 새겨진 내용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로마서 7장 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가운데 존 머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위대한 책 『구속론』(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에 “율법폐기론은 인간의 죄성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죄성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을 묵상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 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은 그 속에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같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법 십계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신학생 시절 세대주의 신학사상이 담긴 『율법과 은혜』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책 내용 중에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십계명을 비난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액자에 열 가지 계명을 써 놓은 것과 같다”, “나 외에 다른 남자를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는 내 사진이외에 다른 남자의 사진을 걸어놓지 말지니라” 등등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마치 의처증 걸린 남편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여 십계명이 매우 괴롭고 잔인한 법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매우 고약한 책이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의처증 걸린 남편이 자기 아내를 속박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갖게 하는 세대주의 신학사상이 담긴 책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에게 십계명을 변경 없이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1절에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부모를 잘 공경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이 무조건 옳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교만이 효를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야말로 절대적으로 효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제5계명도 그대로 말씀하셨고, 6계명, 7계명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과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Ⅱ. 신약성경에서 율법에 관하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무슨 의미인가?
로마서 6장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의 의미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Not under the Condemnation of the Law)는 뜻입니다. 십계명은 “네가 십계명을 어기고 범죄했으니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계명의 정죄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기능은 ‘정죄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십계명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이지, 이것을 “십계명 자체를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기능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기능이 ‘성도들의 삶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세번째 기능을 ‘율법의 제3용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폐기론자들은 이 기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세 가지 기능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향해 죽었다’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죽을 노력을 다해보았으나 그런 시도는 모두 헛된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한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그 죄를 고발합니다. “네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 너는 지옥에 가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지옥가야 할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또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의 삶 속에 십계명은 여전히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율법폐기론자입니다. 그 사람은 혹 천국에 가더라도 지극히 작은 자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사람인 것입니다.
Ⅲ. 성도들은 십계명을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먼저 십계명의 모든 법을 외우셔야 합니다. 그래야 십계명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적용하는 첫 번째 방법은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이 포함되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 또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은 탐욕 또한 품지 말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둘째, 십계명은 소극적인 명령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명령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제1계명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적극적으로 섬기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고,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십계명은 부분적인 명령이라고 해도 전체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제유법’(Synecdoche)이라고 합니다. 제유법은 사물의 작은 부분이 사물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예를 들어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데, 이는 “부모님만 공경하고 선생님에게는 무례히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위에 있는 모든 권위를 존중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학교 선생님께도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추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넷째, 십계명 중에 물론 첫째 돌비에 기록된 내용이 둘째 돌비에 있는 내용보다 더 중요하지만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계명하나 사소한 법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여러분, 십계명이 괴롭고 답답한 법입니까? 십계명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생각할 때마다 속박 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마귀의 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 주권에 따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것은 악을 버리고 의를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 한국 기독교는 성령충만을 방언이나 예언하는 것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해서 신비주의로 전락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같은 이단들도 하고 불교의 승려들도 합니다. 힌두교에서도 하고 한국의 무당들도 합니다. 그런 현상만을 가지고 성령충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법을 사랑하고 거룩한 능력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질투
출 20:1-6 / 김영준 목사
오늘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전재하고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노래 중에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오! 크신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더 큰 것이 하나님입니다. 하늘보다도 크고 바다보다도 깊고 우주보다도 넓은 분이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크냐?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같은 태양계가 수억 개가 모여서 만든 것이 은하계인데 이 은하계 같은 것이 수억 개가 모여서 우주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우주는 그보다도 큽니다.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존재인가를 상상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를 생각할수록 사람은 작아 보이고 하찮은 존재로 생각되고 우주의 고독한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인간을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 왜 관여하실까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릴 때에도 나이가 같은 사람끼리 어울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갑이어야 친구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너무 큰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른이 인터넷 상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는데 그 대상이 초등학생들이다, 그건 부끄러운 일로 생각합니다. 같은 사람끼리도 나이가 같고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우주보다도 더 크신 분이 왜 이렇게 작고도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관여하신다는 말인가. 이것이 혹시 과거 인류가 무지할 때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할 때에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축소해서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말했지만 사람이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인류의 의식이 발달하기 이전 미신적인 사고방식의 결과로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정이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일에 왜 간섭하실까. 나의 작은 생각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이런 질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다루고 있는데 특별히 이 제2계명 속에 하나님의 두 가지 상반된 면모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거대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이 계명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늘보다도 땅보다도 물보다도 크신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물이든 다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만을 경외하고 섬겨야지 하나님이 만드신 어떠한 피조물도 두려워 할 필요 없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에요. 이것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현상에 대하여 무지한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하고 천둥이 치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또 폭풍우가 몰아치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섬기고 산이든 바다든 고목나무든 해든 달이든 별이든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어려워하고 섬겼던 무지함과 미신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든 별이든 달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보다도 높고 그보다도 위대하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데 둘째로 오늘 본문에 그와는 상반된 하나님의 면모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구절에서 그 크신 하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매우 인간적이고 하나님을 작게 보이게 만드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다니, 사람 같은 하나님, 그 크신 하나님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의 면모를 발견하는데 그러나 사실입니다. 성경 저자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을 한 계명 속에 담은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배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젊은 남녀가 질투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질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투가 뜻하는 것은 배타적인 사랑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부부가 같이 TV를 볼 때 사모님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저 탤런트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쁘냐고. 그럴 때 남편이 당신이 더 예쁘다고 대답해야지, 만일 글쎄 라고 한다든가 저 탤런트가 더 예쁘다고 말했다가는 큰일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뭣 하러 질문을 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예쁘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첫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과 예컨대 개미와의 관계와 다릅니다. 사람은 개미보다도 크지요. 그러나 개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개미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인간은 지극히 작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가 있고 하나님은 사람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실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어요. 모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비록 작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고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해야 되지만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한다든가 미천한 존재로 멸시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내 자신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되고 내 자신을 학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는 귀한 목적이 있는 것이고 내 인생에는 귀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은 모두가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실 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할 수 있었는지 이것은 늘 신학적인 논쟁의 핵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영지주의자 같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제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이 이렇게 낮은 사람으로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고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든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있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가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류애 같은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류애는 먼 사랑, 막연한 사랑, 안전한 사랑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굶는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저런, 누군가가 도와야 될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막연한 인류애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까운 사랑이요, 배타적인 사랑이요, 위험한 사랑이에요. 위험하다는 말은 아픔을 수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갈 때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고 우리가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므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랑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기를 원하시는지 그걸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뿐만이 아니고 하나님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격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을 수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도 저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알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건 지극히 쉬운 일입니다.
예컨대 책상에 성경책을 올려놓았는데 그 위에 일간지 소설책 · 만화책 · 영수증 이런 것을 올려놓으면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다른 책들을 우선시한다는 그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경책을 올려놓으려면 성경책 위에 다른 걸 올려놓으면 안돼요.
또 주일에 교회 가는 대신에 어디 놀러가는 것. ‘하나님이 얼마든지 이해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니까. 너그러운 분이니까 얼마든지 이해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한 면모만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질투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 놀러가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사람, 마음속에 아직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에요. 적어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놀러가긴 가더라도 별로 재미가 없어야 됩니다. 마음이 편치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놀아야 되나. 내가 이렇게까지 놀 자격이 있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만 계시느냐.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하나님은 초원에도 계시고 바다에도 계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놀러간 사람이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합리화하는 것뿐이지요.
또 봉사하는 일을 맡아 놓고 펑크 내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진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사, 대신 누가 때울 수 있지 아니하냐.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많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기회를 주셨을 때는 나만이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이 계단을 내려갈 때 자기 아들딸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것을 즐거워하지요. 손을 잡아줄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계단을 내려갈 때 손을 잡아줄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봉사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한 것뿐만이 아니고 나의 역할, 나의 사명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생각할수록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랑, 하나님의 질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이 드릴 수 있는 예배와 정성과 사랑과 나만이 채울 수 있는 믿음의 그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크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너그럽게 넘어가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면만을 생각하는 것이지 질투하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죄라는 얘기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a thousand generations -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놀랄 노자에요. 하나님이 이처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잊지 않으시고 천대까지 그것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구절을 알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크고 우리는 이렇게 작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