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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 가문
라뮤나
2022. 11. 26. 0:02
13 의회, 세계 일루미나티 지도자는 "Pindar" 라고 불립니다. Pindar 는 13 통치 가문의 일원이며 항상 남성입니다.
Pindar 라는 칭호는 "Pinnacle of the Draco" 또는 "Penis of the Dragon" 으로 알려진 용어의 줄임말이며 이것은 최고의 힘, 지배, 창조, 관통, 팽창, 침범, 그리고 공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칭호를 가진 계급은 지구 내부의 순혈 렙틸리언 수뇌에게 보고되며 피라미드의 "눈"은 13 통치 가문을 의미합니다.
그 이야기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알프스산맥 언저리 시골 귀족 가문에서부터
메디치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가문 또한 처음부터 뼈대 있는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의 가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0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 근본 없는 가문은 아니었던 것이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대귀족인 에티호넨 가문의 직속은 아니지만 방계 가문이어서 아주 조금의 명예는 존재하였습니다.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명성을 드높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제국 대공위 시대였습니다. 강력한 우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기게 되고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여 대공위 시대의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런 대공위 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에 이루었으나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타협책으로 일부러 힘이 없는 가문을 바지사장 삼아 황제로 내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때 적합했던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인물이 바로 루돌프 1세입니다.
루돌프 1세
새로운 황제가 선출된 건 좋았지만 이게 상당히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서 깊은 부족 공국도, 선제후국도 아닌 일개 백작의 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돌프 1세는 바지 사장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독일계 제후들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보헤미아를 격파하여 그동안 먹은 땅들을 토해내게 했는데 이때 이 지역들을 은근슬쩍 자기 아들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줍니다. 이때 준 영지가 훗날 합스부르크의 본거지가 되는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이 됩니다.
이런 루돌프 1세의 횡보로 제후들은 다시 위기를 느끼게 되고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를 차기 독일 왕으로 선출합니다.
그러자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전쟁 끝에 아돌프를 격파하며 황위를 지켜내는 듯싶었지만 1308년 조카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 다음 대권을 노리게 됩니다.
이에 제국 내 요충지였던 오스트리아를 새로운 본거지로 재정비를 시작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150여 년이 지난 알브레히트 5세대에 이르러 다시금 제국의 왕좌를 꿰찰 수 있게 됩니다.
지기스문트 황제의 딸과 결혼한 알브레히트 5세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점수를 따고 사실상의 상속권자로 지명되면서 지기스문트 황제가 죽은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됩니다. 허나 이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가 한창이어서 알브레히트 5세는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고 이에 친척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가 재차 황제로 선출되면서 권력을 이어받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정략결혼
프리드리히 3세는 A.E.I.O.U라는 머리글자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걸 해석하면 오스트리아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가문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시키며 본격적으로 가문의 영지 확장과 황위 세습을 위한 기틀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황위 세습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나오는 것이 유명한 정략결혼입니다. 정략결혼이 프리드리히 3세부터 빛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최대한 많은 가문과 결혼하고 전쟁은 되도록 피하면서 천하를 손에 넣는다는 전략"
프리드리히 3세는 자기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를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과 결혼시켜 서유럽에까지 영지를 확보하고 황제 자리까지 자연스럽게 넘기면서 세습에 성공하게 됩니다.
막시밀리안 1세 또한 이 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부르고뉴 공작령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 발루아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스페인 왕가와 겹사돈을 맺어 카스티야 여왕으로 즉위까지 하게 되는데 카스티야 여왕이 정신병으로 여왕의 능력으로 인정을 못 받게 되자 카스티야 여왕의 남편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직위를 넘겨받게 됩니다.
허나 이런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일찍 죽자 얽히고 섥히면서 결국은 스페인 왕국이 출범되며 이때 스페인 왕국이 개척하기 시작했던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해외 식민지 그리고 아버지 펠리페 1세의 영지였던 부르고뉴 공작령까지 얻게 되고 거기다 1519년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도 죽으면서 카를로스 1세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영지들까지 모두 물려받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즉위하고 독일 지역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분할
즉 이런 과정에서 카를로스 5세는 독일 왕, 스페인 왕, 오스트리아 대공, 부르고뉴 공작, 신성 로마 황제라는 직위를 가지고 카를 5세가 되며 유럽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상속받은 인물이 됩니다.
이렇게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손에 넣게 되지만 이 거대한 제국은 가문 소유의 영지를 이어 붙인 불연속적인 정치체제였고 이 당시 종교개혁의 불길이 점점 거세지면서 신성로마제국 내부 결속력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성정으로 앉히고 본인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과 네덜란드, 지중해에 집중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성로마제국 황위와 오스트리아 영지는 실질적이었던 통치자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겨주게 되고 스페인 왕위와 신대륙, 부르고뉴 공작령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계열과 오스트이라 계열로 분가되어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설계해 놓은 합스부르크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기와 근친혼
합스부르크는 남자에게만 유산을 상속하는 게르만족의 관습법인 살리카법을 통해 정략결혼으로 많은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결혼 때문에 이걸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여기의 양쪽 분가가 통치하는 지역이 서로 멀고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차이가 있어서 언제 서로 적으로 돌변할지 몰라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남자 혈통이 끊기지 않게 이어가면서 두 분가 사이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방법, 이런 걱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찾은 방법이 바로 "근친혼" 이였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런 위험한 결혼이 많아지면서 세대가 지날수록 유전병을 앓거나 허약한 지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스페인 쪽 분가에 이런 일이 번번해서 가문의 통치 역량을 조금씩 갉아먹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던 오스트리아 쪽은 이런 문제가 덜한 편이였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전쟁과 보헤미아 신교도 세력의 반란 때문에 위기에 처했고 전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되며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분으로 제후들 위에 군림하던 신성로마제국은 빈 껍데기가 돼버립니다.
스페인의 경우 돈줄이었던 네덜란드가 독립하면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포르투갈마저 분리되어 나가면서 해외 식민지 다수를 읽게 돼버립니다.
엎친 데 덮친 격 18세기가 시작되면서 합스부르크 주특기였던 정략결혼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전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영지들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우수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양쪽에서 두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이 이어집니다.
스페인 쪽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합스부르크 레오폴트 1세를 필두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며 부르봉 왕가로 왕위 계승은 넘어가서 루이 14세 아들 필리프가 왕이 되면서 합스부르크 계보는 끊어지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쪽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남부 등 나머지 영지를 인수하긴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상실하면서 서유럽에서의 영향력은 거의 잃어버렸고 이후로는 동유럽으로 확장하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카를 6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이어 받게 되지만 카를 6세의 하나분인 아들이 어린 나이게 죽게 되면서 오스트리아가 스페인과 같은 사태를 맞이할까 두려워진 카를 6세는 자기가 아들을 끝까지 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1713년 딸도 왕위를 상속할 수 있도록 하는 "국사조칙"이라는 법을 제정합니다.
이렇게 1740년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영지를 물려받게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나폴레옹의 등장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기존의 계승권자들이 곧바로 태세 전환하여 군대를 몰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공격합니다. 바이레은 선 제후국이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면서 겨우 계승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전히 남자에게만 넘겨줄 수 있는 신성 로마 황위는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여 프란츠 슈테판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프란츠 슈테판은 로트링겐 가문이었기 때문에 이때 합스부르크-로트링겐으로 계보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루이 16세에게 시집보내면서 전통적인 관행을 깨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뒤 프로이센과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서유럽과 볼 일이 없어진 합스부르크 입장에서는 이제 프랑스보다 독일 지역 내 패권을 노리는 프로이센이 더 위협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허나 이때 프랑스대혁명이 터지게 되죠.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스페인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모두 참패를 겪게 되며 이렇게 합스부르크도 벨기에와 북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 영역의 독일계 제후국까지 모조리 프랑스에 빼앗기게 됩니다.
1804년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를 열어 스스로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까지 해버리면서 지금까지의 유럽의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 하나뿐이었지만 나폴레옹이 이 규칙을 깨버리며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명분과 실체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에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영지를 전부 합쳐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재편하고 스스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즉위하여 나폴레옹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허나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 빈이 함락당하면서 신성 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버리며 중세 초기부터 지속되어 온 종교적, 봉건적 전통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신성로마 황제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지고 있던 독일에 대한 지배권도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첫댓글 ㅈ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