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송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송은 모든 그리스도인 관상의 목표입니다. 공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영광송을 노래로 불러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고유한 구조에 다가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8. 짧은 마침 기도
오늘날의 묵주기도에서는, 영광송 다음에 짧은 마침 기도가 이어집니다. 이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합니다. 한국 교회는 관습적으로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9. 요일 배분
묵주기도는 날마다 전체를 다 바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많은 사람이 한 주간의 어떤 순서에 따라 하루에 묵주기도의 일부 밖에 바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관습은 묵주기도의 신비를 요일에 따라 배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를 추가하시면서 교황님은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환희의 신비’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를, 목요일에는 ‘빛의 신비’를, 수요일과 주일에는 ‘영광의 신비’를 바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요일 배분은 개인이나 공동체 기도의 합법적인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묵주기도를 언제나 관상의 길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묵주기도를 통하여 한 주간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0. 유의할 점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체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기억은 모든 일에서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당신 아드님 곁에서 보내신 삶의 여러 순간들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느 모로 성모님께서 지상에 사시는 동안 몸소 끊임없이 바치셨던 묵주기도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더없이 훌륭한 관상 기도입니다. 이러한 관상의 차원이 없으면 묵주기도는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관상이 없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아져 기도문만을 반복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 6,7)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본질상 고요한 운율과 생각을 할 수 있는 느릿한 속도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 가장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과 눈길로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 생애의 신비를 더 쉽게 묵상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신비의 헤아릴 길 없는 부요가 드러나게 됩니다.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서귀복자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