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일본 교토대 교수인 마키타 다이료(牧田諦亮)가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찾아냈는데 여기에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존재했다.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 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백제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의 하나인 노산주(魯山州)에 속한 지모현(枳牟縣)의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그곳이 금마(金馬)라는 것이다. <관세음음험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포착된다. 제석정사가 재난을 당할 때의 피해사례를 언급하면서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1965년 왕궁리 석탑 해체수리 때 사리보(舍利寶)는 물론, 금판 금강반야바라밀경 19매가 발견됐다. 이는 <관세음응험기> 기록을 뒷받침해준다. 1989년부터 본격화한 고고학 발굴결과도 심상치 않았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설, 혹은 행궁설, 행정수도 경영설을 뒷받침할 만한 실마리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우선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에서 통일 말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탄소연대(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 결과 서기 535~630년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제 말기에서 통일 초기에 해당되는 유구는 석탑이 있는 지역의 성벽 유구와 부속된 많은 건물터가 해당된다.
출토된 백제토기와 기와류의 질은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같다. 또한 중국에서도 사례가 많지 않고, 한반도에서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은 연화판문청자병(蓮花瓣紋靑瓷甁) 조각과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또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일국의 군주 거소 및 중앙정부가 있는 도회·수도)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는 문헌에서 확인되는 행정지명을 실제적인 근거자료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백제의 행정제도는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인 <주서> 및 <수서> 등에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옛날에 오부를 두어 37군,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다(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七十六萬戶)”고 했다.
또 <주서> ‘이역전·백제조’는 “수도에 1만가가 있어 이를 나누어 5부를 만들었다. 오부는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이다.(都下有萬家 分爲五部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왕궁리에서는 <주서>에 등장하는 5부 중 후부(後部)를 제외한 4부의 명칭이 모두 발견됐다.
이 5부 명칭 인장와는 부소산성, 부소산 앞자락의 관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에서만 한정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사비시대(538~660년) 백제왕궁 위치는 부소산성이나 그 앞 평지가 유일무이한 후보지이다. ‘수부명’의 인장와는 바로 이 부소산성과 이곳 왕궁리에서만 확인되는 유물이라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왕궁리에서는 또 부소산성(사비성)에서 출토 예를 볼 수 있는 ‘귀달린 토기(耳杯)’가 출토됐다. 그 희귀성과 정교한 제작방식으로 보아 국가가 관장하는 가마에서 구운 이런 토기들을 부여를 비롯한 왕궁으로 공급하지는 않았을까. 특히 서북쪽 성벽 안쪽에서는 공방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조사됐고, 여기에서 다량의 도가니와 도가니에 부착된 금(金) 슬래그가 확인됐다. 이 유적의 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발굴 성과는 이곳 익산 금마 일대에 존재하고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이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혹은 행정수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무왕은 왜 선화공주와 국제결혼을 했고, 익산으로 근거지를 옮기려 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서울의 남쪽 못가에서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서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무왕이 용(龍)과 관계있으며, 고향이 익산이라는 걸 알려주는 기록이다. 만약 무왕이 익산천도 혹은 행정수도 건립을 결행했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왜 불구대천의 원수인 진평왕의 딸과 결혼했을까.
먼저 6~7세기의 정세를 살펴보자. 백제는 551년(성왕 29년) 한강 회복을 위해 신라 진흥왕과 연합, 고구려를 치고 한강유역을 양분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2년 뒤(553년)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 땅 6개군을 점령했다. 분노한 성왕(재위 523~554)은 신라를 치다가(554년) 살해된다. 백제로서는 과거 동맹이던 신라 진흥왕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백제는 전통의 주적(主敵)인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까지 원수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가 계속 괴롭히자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던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는다. 이것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 내막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백제 무왕은 즉위 전반기에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익산을 왕도로 삼았을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고 사비(부여)를 버린 것은 아니었고, 익산과 부여 사비성 등 2개의 도회(都會)를 모두 왕도로 썼을 수가 있다.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무왕은 백제 8대 성씨(沙·燕·協·解·眞·木·國·백)로 알려진 귀족들이 강력한 세력을 떨친 사비를 벗어나 자기 나름의 정치를 펼치려고 익산으로 천도할 꿈을 꾸었을 가능성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