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기 Home Coming Day 행사 이렇게 마쳤다. | |
우리 공군학사장교 51기가 1965년 3월 5일 당시 대전에 있는 공군기술교육단 항공병학교에 입교하여, 16주의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동년 7월 1일 201명이 빛나는 diamond 계급장을 양 어께에 달고 공군소위 초급장교로 임관했습니다. 임관 50주년이 되는 이날: 2015년 7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공군장교가 되게 교육훈련 시켜준 공군교육사령부를 기념방문 할 것을 2013년 12월 2일 월례회의에서 결정하고, 이를 Home Coming Day 행사라 명하여 황재선 행사 준비위왕장과 운영위원들의 거의 일 년 반 동안 헌신적인 노력과 뜻 있는 동기들의 필요 경비의 협조와 많은 동기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의 결과로, 2015년 4월 22일 회원부부 23쌍, 홀로회원 26명, 합계 72명이 임관 반세기 만에 교육사령부를 방문했습니다. 교육사령부 이왕근 단장과 그 예하부대장병 그리고 134기 학사장교후보생들은 우리의 방문을 반가운 마음과 뜨거운 환영으로 맞이 해주었습니다. 51기 Home Coming Day 행사를 이렇게 마쳤습니다. 2015년 4월 22일, 23일 양일간 교육사령부방문과 남도의 사적지 관광을 다녀온 발자취를 먼 훗날 언잰가 되 새겨볼 수 있게 아래와 같이 기록으로 남깁니다. 임관 50주년 교육사령부 기념방문을 만들어준 준비위원장, 운영위원 그리고 협조해주시고 동참해주신 여러 동기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
내 용 | |
시 : 분 |
2015년 04월 22일 수요일. 맑음. |
07:30 출발전: |
|
|
아침 일찍 황재선 위원장이 압구정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에서 차량 등 각종준비사항 점검과 아침식사 및 간식준비. |
|
* 1호차 차장 문장훈회원의 신갈에서 승차로 임규연회원이 대행해서 1 호차 탑승원에게 좌석번호가 적힌 이름표를 나누어 줌. 각회원은 이름표 뒤에 적힌 좌석번호에 따라 승차하였음. 문장훈회원부부, 김종호회원부부 죽전에서 승차. 김동수회원부부 진주에서 승차. 김영하회원부부 개인사정으로 불참. 1호차량 승차자----- 계: 24명 |
|
* 2호차 차장 김동회원. 2호차 탑승자에게 좌석번호가 적힌 이름표를 나누어 줌. 최광진회원 부부 죽전에서 승차, 이병호회원부부, 이순모회원부부, 전영길회원부부, 천정웅회원부부 신갈에서 승차. 임향순회원부인 개인사정으로 불참. 2호차량 승차자------------------------------------------------------------------ 계: 23명 |
|
* 3호차 차장 조용원회원. 3호차 탑승자에게 좌석번호가 적힌 이름표 나누어 줌. 김승열회원, 옥내윤회원, 장주환회원, 죽전에서 승차, 이은상회원 신갈에서 승차. 이동룡회원, 김삼묘회원 진주에서 합류. 도용재회원 개인사정으로 불참. 3호차량 승차자 ------------------------------------------------------------------계: 24명. |
4. 안용일 회원의 진주에서 별도차량으로 참가. 개인 별도--------------------------- 계: 1명 | |
|
행사 참가 인원: 1) 부부참가 : 23쌍, 2) 홀로참가: 26. 총 참가인원 : 72 명. |
|
교통안전, 안내 책임자들: |
|
1호차 선임 가이드: 이순호, 운전기사: 김동욱. |
|
2호차 가이드 : 김민수, 운전기사: 박진관. |
|
3호차 가이드 : 송후남, 운전기사: 이원형. |
|
4자가용 . 운전기사. 권정현. 기타 인원: 가이드: 3명, 운전기사: 4명, 기타 총계: 9명 |
07:30 |
1, 2, 3호차가 차례로 정시에 압구정 주차장 출발. |
07:50 |
* 죽전 1, 2, 3호차 승차인원 지연 없이 전원 승차. |
08:00 |
* 신갈 1, 2, 3호차 승차인원 지연 없이 전원승차. |
아침식사 |
신갈 지나서 아침 식사로 승차자에게 맛있는 김밥과 준비위원장이 집에서 직접 packing한 과자와 음료수가 든 간식 봉지 그리고 물 한 병씩을 나누워 주었다. |
10:00 |
* 금산인삼랜드 09:40도착 10:00 에 출발. |
11:40 |
우리 차량이 교육사령부 가까이 도착 했을 때 경남혁신도시의 이정표에 공군교육사령부 위치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나왔다. |
11:50 |
처음 만남: 교육사령부 정문 입구에서 당번헌병의 거수경례를 받으면서 정문을 통과하여 정명수 대위의 안내로 헌병차의 escort를 받으면서 입구 도로 양쪽에 도열한 134기 학사장교 후보생들의 열렬한 박수의 환영과 정의관 건물 앞에서 공군 군악대가 계속해서 연주하는 공군가와 빨간마후라를 들으면서 충성관 앞 운동장 도착. 1호차부터 회원과 그 부인들이 버스에서 내려 이완근 사령관과 이광수 훈련단장, 그 예하부대 장병들의 반가운 만남의 환영의 악수를 교환했다. |
| |
12:10 |
사관후보생들의 안내: 충성관 앞에서 기념촬영 행사를 하고 곧 바로 명예관 건물 앞에 있는 식당입구에서 134기 사관후보생들 우리를 각 각 한사람씩 담당하여 안내하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관후보생들은 배식을 도왔고 식사를 같이 하면서 후배는 후배로서 가진 관심사와 선배는 선배로서 가진 관심사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식사를 마치고 병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생활관과 그 생활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충성관에 입실 할 때까지 친절하게 상대를 해주었다. 고마웠다. |
|
134기 학사장교후보생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식당에 들어가 식사 tray에 점심을 받아 놓고, |
. |
|
환 영 사 |
이왕근 사령관의 환영사: " 51기 선배님들 이번 방문을 환영합니다. 서울에서 멀리 오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이곳 교육사령부는 88년도에 이사를 하여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상당히 현대화된 교육훈련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공군의 정예장병을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공군에 관해서 뉴스나 신문지상에서 보고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정말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항공기를 가지고 작전을 펼칩니다. 우리공군은 훈련기를 받아가지고 이제는 전투기까지 곧 생산하는 그러한 project를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공군이 이렇게 발전을 이룩한 것은 51기 여려 선배님들을 포함해서 선배님들의 피땀 어린 정성과, 정열, 시간과 투자 이런 것들이 공군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배님들이 사회에서 늘 공군에 대한 성원을 해주시는데 대해서 늘 반갑고 감사드린다."(박수)는 이번 방문의 반가움과 오늘의 공군 발전을 위해서 선배들의 헌신적인 공헌에 대한 감사의 마음 전달과 앞으로 발전을 위해서 이런 열정, 시간과 투자를 하여 더 공군을 발전시킬 것 과 134기를 포함하여 멋진 공군이 될 수 있게 후배들과 함께 최선을 다 하겠다"는 다짐과 " 짧은 이번 만남의 시간이나마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며 뜻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는 당부하는 요지의 정겹고 뜨거운 환영사였다.(transcript) |
|
|
답 사 |
황재선 준비위원장의 답사: “자랑스러운 공군교육사령부 이왕근 사령관님을 위시해서 예하 지휘관참모후배 장병 여러분, 그리고 134기 학사장교후보생들 반갑습니다. 먼저 이 노인들을 위해 사령부를 개방하고 열렬히 환영해준데 대해서 고맙다. 이왕근 사령관님이하 여러 장병들 과 134기 학사장교 후보생들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이왕근 사령관님의 따뜻하고 정겨운 환영사를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사령부 정문을 통과하면서 마치 제가 반세기동안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다가 따뜻하고 정겨운 고향의 품에 안기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 번 더 후배 장병들에게 뜨거운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친애하는 51기 학사장교 동기생들과 그 배우자님들 반갑습니다. 서울, 대구, 부산 특히 멀리 미국 LA에서 온 김휘렴 동기생과 그 부인, 안용일 동기생 그리고 최웅일 동기생과 그 부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우리 학사장교 51기는 지금부터 50년 전 1965년 3월 5일 당시에 대전에 있던 공군기술교육단 연병장에서 전국각지에서 전공과목에 따라서 60대일 100대일의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elite 201 명이 집결하여 또다시 연병장에서 영어시험과 정밀 신체검사를 받고 최종합격하여 머리를 깍고 7일간의 가 입교 기간을 거처서 항공병학교에서 16주간의 강도 높은 군사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1965년 7월 1일 201명이 빛나는 diamond 소위 계급장을 양 어께에 달고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가장 높은 자량스러운 대한민국의 공군 초급장교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임관과 동시에 교유부터 시작해서 화생방에 이르는 15개 특기를 부여받아 특기교육을 각자의 임무에 따라 일정기간 이수한 후 당시 공군본부 배치가 어려운 공군본부를 위시해서 백연도 까지 각 부대에 배속되어 4년간 충실히 근무하고 근무 후 1969년 6월 말일부로 동기생들 이외에 일부 동기생들이 공군에 남고, 나머지 동기생들이 전역을 해서 관계, 학계, 교육계, 언론계, 산업계 등 각계 분야에서 오직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 하에 우리가 너무나 못 살던 때이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노래를 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조국의 민주화와 산업화에 주연의 역할을 성실히 담당하였습니다. 한편 우리 배우자들은 이세들은 물론이고 부모님들을 봉양하고 가정생활전부를 도맡아서 일을 잘해주어서 직업전선에서 가정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남편이 직장에서 일만 할 수 있는 내조를 해주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우리 부인님들에게 감사의 마씀을 드립니다.(박수) 사령관님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우리공군은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높은 정예 공군으로서 우리가 근무 할 때에는 F86, F5A/B가 주력기종 이었으며, 펜톰기 도입하려는 시기에서 전역을 했는데, 지금은 최첨단의 기종이 F15를 운영하는 눈부신 발전을 했으며, 멀지않다 stealth 기능까지 가춘 최첨단의 기종으로 무장을 하고 최정예공군으로 발전하여 하늘에서 우주로 세계로 향하는 선진 정예공군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공군 교육사령부 이왕근 사령님과 전 후배 장병들은 공군이 힘드리는 우주로 세계로 향하는 우수한 주춧돌이 될 우수한 정예공군 후배들을 양성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수). 이제 저희들은 조국의 근대화와 선진화에 답하는 이엄숙한 역사의무대에서 그동안 주인자리를 해왔습니다만 주연의 자리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조요히 이 성스러운 역사적이 무대를 에서 내려와 조용히 사라질 것 입니다. 다시 한 번 따뜻하고 열렬하게 맞이해주신 이왕근사령관님과 그리고 예하 후배장병들의 무훈을 기원하며, 134기 학사장교후보생들은 남은 훈련을 충실히 이수하여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키는 가장 높은 정예공군의 훌륭한 초급장교로 태어날 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이 뜨거운 환영은 노병들의 가슴에 각인되어 영원이 기억 될 것 입니다. 고맙습니다. 여려분, 사랑합니다!" (transcript) |
|
답사에서: "주연의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조용히 사라진다” 는 말은 마치 1951년 Douglas MacArthur 장군이 52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면서 미국국회의 고별연설에서 "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라는 연설 문구를 상기시킨다. 또한 우리 51기가 국가 근대화와 발전에 주역을 맡으면서 지나온 지난날의 삶이 진하게 배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
|
|
격려금전달과 동영상 CD 전달 |
격려금 전달과 CD 선물: 최광진 51기 초대회장이 교육사령부 장교교육대대장에게 후배 격려금 전달이 있었으며, 교육훈련단에서는 답례로 51기 앨범에 있는 사진을 모아 제작한 동영상 CD를 답례선물로 전달했다. 후식으로 제공한 요풀래는 51기에서 준비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
|
|
사관후보생과의 식사: 배식은 50년 전과는 많이 달랐다. 50년 전에는 누가 밥통에 손을 댈 수가 있었던가? 그냥 배식당번이 떠주는 데로 가져다가 먹었지만 현재는 밥도 먹을 만큼 각자가 떠가고 반찬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먹을 만 큼 조정할 수 있는 배식 system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번 점심 메뉴는 조밥, 미역국, 오징어 야채무침, 연근, 닭 순살 조림 이었으며, 50년 전에는 국이 주로 콩나물국이 많았고 꽁치조림이 주 인기 반찬이었는데, 나의 안내자인 정재철 학사장교후보생에게 요사이도 꽁치조림이 나오느냐고 물어봤더니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 당시 많이도 나오던 “도래미 탕” 역시 알지 못했다. 후식으로 51기에서는 요플래 한 개 씩을 제공했으며 모두들 맛있다고 했다. 식사 tray를 앞에 놓고 환영사와 환영사의 답사를 마치고 나니, 국과 밥이 식은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후배와 같이 이야기를 하며 의견을 주고받다 보니 식사 시간이 짧아서 시간이 거의 끝날 때 급히 밥을 입에 넣고 난후에 후식인 요풀래는 먹을 시간이 모자라 큰 밥 spoon으로 급히 몇 번에 떠먹고 tray를 반납하고 식당을 나왔다. 또한 지금은 spoon 과 수저를 식당에서 제공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 50년 전 교육받을 때는 stainless steel spoon으로 식사를 했으며 언재나 그 spoon은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이야기 하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의 안내자 정재철 후보생은 자기소개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통역특기라고 해서 우리가 교육받을 때는 통역특기가 없어서 다시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니 특기의 다양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개의 외국어를 하는지 물었더니 영어이외에 중국어를 조금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외근무시의 이야기를 조금하고 즉, 외국어는 어려운데 고급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고, 외국어 통역특기면 최소 3개의 외국어는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서반아어나 프랑스어를 해보라고 권했다. 서반아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많아서였다. 그리고 외국인과 어울리자면 일반 상식 즉 시사도 중요하지만 세계 문화사 같은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외국어는 세월이 지나고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외국어라고 했다. | |
교육시설 설명 |
교육시설 설명: 식사가 끝난 다음 명예관 앞에서 훈련에 대한 설명으로 현재 교육훈련은 사격훈련, 유격훈련, 화생방훈련 등 다양한 훈련들을 하고 있으며, 교육시설에 대한 설명으로는 1971까지 간부학교, 항공병학교로 대전에서 1988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1995년에 7월 1일부로 항공병학교에서 훈련단으로 승격하여 현재의 건물은 2007년에 완공하였으며, 장교교육대대의 slogan은 3가지로 명예, 충성, 정의인데 , 명예관, 정의관은 숙소생활관으로 되어있고, 충성관은 강당으로 약 600여명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학과장은 별도로 되어있다. 또한 식당, 목욕탕, 이발소, 그리고 미용실이 갖추어있다는 설명과, 51기간 훈련받을 때는 기본교육이 4개월이었는데 현재는 3개월이 되어 134기는 6월 1일 임관을 한다고 한다. 황재선 위원장의 “남자 훈련생과 여자 훈련생이 어떻게 훈련을 같이 받을 수 있는가 ?” 라는 질문에 대해서, 학사장교여군을 2001년 학사105기부터 최초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현재로 15년이 된다, 1년에 약 50여명 여군학사장교를 양성해낸다, 현재 학사장교후보생의 생활관인 명예관은 1층부터 5층까지가 있는데, 이중에 1개 층 전체를 여군학사장교 후보생이 사용하고 있으며, 남 여 후보생 간의 교제는 불가하며, 또 남자 후보생들의 여군숙소 접근이 불가하다. 남녀후보생들은 서로 남자와 여자로 보기 보다는 친구로서 잘 지낸다는 설명과 현재 여군 후보생이 사용하고 있는 4층은 남자 후보생은 접근 금지구역으로 CCTV 로 항상 감시하고 있다. 남.녀 학사장교 후보생들에게는 남자와 여자의 이성으로 대하기보다 오히려 동질감 동지애, 전우애로서 후련 후 임관하고 난후에도 친구처럼 잘 지내는 사례가 많다. 공군에도 학군사관후보생(ROTC)이 있다. 여기에는 항공대, 한서대 2개소가 있으며 학군단을 이용하고 있다, 남자장교 후보생과 여자장교후보생의 훈련강도는 동일하다, 다만 유격훈련시에 남자후보생은 배낭의 무게가 20kg인데 여자후보생은 12kg정도이다. 이 경우 좀 다르다. 다 같이 장애물훈련도 같이 한다. 다음으로 이순모 회원의 이야기로 학사장교 55기의 서용길 후배의 손녀 유지o 소위 가 금년에 공군사관학교 63기 소위로 임관하여 교육사에 배속되어 구대장을 직을 맡고 있다는 소개로(박수). 50년 선배인 51기 정일영 선배 구대장과의 뜻 있는 만남이 있게 되었다. 50년이란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남자구대장과 50년 후배의 여자 구대장이 같이 만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
생활관 견학 |
장교 대대 장교 생활관 견학: 우리는 명예관 1층을 견학하면서 통과해서 충성관으로 갔다. 지금도 아침, 져녁점호를 엄격히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입교시에 한사람에게 지급되는 개인 물품대금이 70~80만원이라고 한다. 생활관은 4인 일실 2중침대로 되어 있었고, 세탁실, 의료실, 세면장, 독서실 등이 잘 갖추어 있었다. 50년 전에는 시험공부를 위해서는 불빛을 찾아 화장실에 가든지 해야 했는데 현재에는 훈련을 다 마치고 공부를 할 수 있는 독서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50년이 지난현재의 생활관과 교육환경은 많이도 변해있었다. 훈련 교육기간 중 임관 전에 휴가가 한 번 있다고 한다. 이 말은 훈련기간이 3개월밖에 안되는데도 임관 전에 2박 3일 휴가를 간다고 하니 내가 이해가 안가는 사항이라고 했다. 여자 훈련생들의 생활에 대해서 방문한 할머니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는데 아직 그런 예는 없는 것 같다. |
|
|
충성관 영상 관람 |
충성관에서의 훈련 영상물 관람: 기본교육훈련단의 소개를 담당한 계획차장 김치운대위(?)의 “학사 51기 선배님들이 기본군사 훈련단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 는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소개에 앞서 민간인을 군인으로 기르는 교육사령부 홍보 동영상의 시청이 있었다. 공군 학사사관 장교후보생의 생각에 대한 동영상 즉, 입교부터 기본군사훈련 과정에 공군의 리더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을 거친다. 식사는 전군 최초 인공조미료가 없는 식사며 맛도 유명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고 공군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각 자의 종교의 자유 등에 대한 설명과 전문교육에 대한 설명 등의 설명이 있었음. 하늘로 우주로의 정예공군의 교육훈련관련 동영상을 관람했다.
교육대대의 기본군사 훈련단에 대한 설명과 장교교육대대에서 제작한 임관50주연 기념영상 시청: 기본훈련단의 일반형황, 시설현황, 교육 현황 순으로 진행되었다. 공군 기본군사 훈련 단은 1951년 에 창설 되었다. 1995년 현재의 기본 교육훈련단으로 승격되었다. 교육훈련단의 조직과 후보생들의 훈련사항, 연병장, 종합훈련장, 장병들의 생활관 등 각종 훈련 시설에 대해서 설명이 있었으며, 교육훈련으로는 총검술, 재식훈련 등을 훈련 할 수 있는 전천후 훈련장, 사격훈련, 화생방훈련 등을 하고 있으며, 교육훈련에 대한 설명이 있다. 마지막으로 장교 교육대대에서 51기 앨범을 근거로 제작한 당시의 훈련 모습을 담은 영상물 상영이 있었다. 50년이란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
위원장덕담 |
사회자의 황재선위원장의 덕담요청에 대한 답례: 우리 단장님 그리고 후배님들 그리고 특히 134기 후배후보생들의 뜨거운 환영과 열의를 보여주셔서 해주어서 정말 감동하고 감사합니다. 특히 50년 전에 우리가 23~24살 이때의 모습을 우리 후보생 여려분들에게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50년 전에는 여러분들과 꼭 같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다 늙어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도 없어지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경험을 말씀드리면 우리 사람들은 다른 동물과 달리 성장에 즉, 태어나서 부모님에게 도움으로 교육을 받고 사회에 발디디는 기간이 약 30년, 그다음에 사회에 공헌하면서 일하는 기간이 또한 약 30년이 될 것 같으며 나머지는 그냥 쉬는 기간인데, 우리 134기 후보생들에게는 꼭 말하고 싶은 것인데, 지금 이순간이 정말로 귀중한 값진 그런 시간이다. 여러분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본일 들의 능력과 끼를 발휘하는 최선의 노력을 해주시면 반드시 결과를 보게 되어있고, 우리 조국에도 크게 기여하는 그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답사에서도 잠깐 말했습니다만 우리 51기는 한 30여 년 간 각계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조국의 근대화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임관할 때에는 us$60~100 이었었는데 지금을 약 us$30,000 가까이 되고 , 우리가 전역할 때는 약 us$1,000정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배고픔을 실감했던 그런 세대였습니다. 50년 전의 저희들의 모습을 여러분들 한데서 발견하게 해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환영해주신 이 뜨거운 열정을 저희들의 가슴속에 머리 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기억할 것입니다. 앞으로 임관할 때 까지 남은 고된 훈련을 열심히 받고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는 건강한 초급장교가 되리를 바라며 주어진 시간을 값지게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후배들이 전역하면 지금까지 약 36,000명이 회원인 공군 학사장교회의 회원이 된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한버더 말씀드리자면, 50년전 우리의 모습을 여러분에게서 발견하게 하여 정말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훈련단 이장군님에게 우리들을 위해 훈련시간까지 변경하여 환영해주신 데 대해서( 단장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51기가 우리 후배들을 위해서 크게 박수 보내드리자는 황재선 위원장의 요청에 큰 박수 보내다.(박수) 여려분 감사합니다.(transcript) |
|
사회자의 작별 인사: 공군교육단의 방문을 항상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선배님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
환송과 이별 |
예하부대의 장병들과 134기 후배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이별의 아쉬운 장을 닫으면서 다음 행선지를 위해 버스에 올랐다. |
14:10 |
우리를 태운 버스가 차례로 교육사령부를 떠나다. |
시 : 분 |
2015년 04월 22일 수요일. 맑음. |
14:30~ 18:00 |
향일암 관람: 버스에서 내려 얼마가지 않아서 작은 암자로 올라가는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되어있어 처음에는 올라가기가 힘들었지만 대부분 회원과 그 부인들은 guide의 안내를 받아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계단 오름이 힘든 최광진 동기와 함께 계단 없는 둘래 길로 올라가기로 하고 가다가 최광진 동기가 지팡이신세로 힘들어해서 길가의 마루에 쉬고 있는데, 나는 올라가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늦게 뒤따라 올라 오는 안정희 회원이 있어 같이 올라가니 대부분의 회원들은 이미 관람을 마치고 떠난 상태여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내려왔다. 그러나 이순모 회원은 남아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국내 최고의 해돋이 명소로 알려진 향일암은 작은 암자로서 우리나라 4대 관음 기도처 중 하나로 부처님한데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안정희 회원은 불상앞에 업드려 조용히 소원을 기원하는 것 같았다. |
|
|
18:00~19:00 |
향일암에서 다다해물식당으로 이동, |
|
|
19:00~ 20:00 |
다다해물 정식집 져녁 식사: 개인 적 판단으로는 음식이 다양했고 식사는 좋았다는 생각이며, 특히 생선회가 위주였고 대부분의 회원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송파구 시의원인 김동수회원의 따님이 특별히 주문한 복분자 술 1.8리터짜리 6병을 선물로 선사 해 주어서 많은 회원들이 고맙게 생각하고 즐겼으리라 생각합니다. |
|
|
20:00~ 20:30 |
여수야경 버스 관광(돌산대교): 져녁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구경한 여수 야경은 높은 고지에서 볼 수 있는 불빛이 휘황찬란한 큰 항구의 도시의 야경과 같이 아름답고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멀리 보이는 해안마을의 불빛은 찬란한 항구의 야경을 회상하게 해주었고, 돌산대교를 지날 때 이은우 회원이 돌산대교가 사장교이며 대형 우물통 기초위의 철근 콘크리트 교각위에 세워진 얇은 강판으로 만들어진 다리로 건설에 어려움이 많은 공사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돌산대교를 지나면서 보면 저 멀리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cable car가 불빛을 나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지나가는 길 옆의 각 건물에는 나름대로의 neon sign을 장식한 것을 보면 야경의 정취를 내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노력을 불 수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이정덕 회원이 저녁에 한잔한 기분으로 “듣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고 전제를 하고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 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어간다.”는 내용으로 된 판소리 단가 “사철가”를 북 장단이 없이도 멋지게 불러주어 백발을 이고 가는 우리의 심정을 어김없이 말해주는 듯 했다. 야경구경은 사철가와 함께 회원들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
|
|
20:30 |
히든베이호텔 도착 check in: 특급호텔답게 깨끗하고 특히 바다를 향하는 호텔방들의 view가 좋았다. 밤이어서 바다가 검게 보여 멀리 까지는 잘 보이지 않아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바다 쪽 창문을 통해서 멀리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었고, 가끔 검은 바다 위를 지나가는 배의 작은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 하자마자 guest room key를 받아 곧바로 입실 할 수 있게 사전에 조치를 해준 한진관광에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
|
|
시 : 분 |
2015년 4월 23일 목요일. 맑음. |
08:30떠나기전 |
히든베이 hotel의 아침식사: 아침은 buffet식 호텔식사로 만족스러웠다는 생각이다. 좀 일찍 짐을 챙겨 식당으로 내려온 회원도 있었는데, 7:30경에는 많은 회원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식사 전 후에 회원들이 호텔 주의를 산책하는 것도 보였고, 아침바다를 감상하는 것도 보였다. |
08:30~09:00 |
히든베이 hotel에서 오동도로 이동하는 길옆에는 열대 지방의 palm tree가있었고 동백꽃은 많이 보이지 않았으나 연산홍은 붉게 피어 있었다. |
|
|
09:00~11:00 |
여수 오동도관광: 오동도는 버스 정류에서 어림으로 약 1km 가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바다와 섬을 연결하여 설치한 방파제 길을 한 15~20 여분 걸어서 오동도 들어가는 방법과 동백열차가 있었는데 일부 회원들은 조용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걸어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고, 일부 회원들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추억의 동백열차를 타고 들어가기도 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원래는 오동도의 지명의 유래는 섬모양이 멀리서보면 오동나무 잎 같아 보이고 또한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아서 오동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오동나무 대신에 키가 큰 동백나무가 많이 들어 서있었다. 우리가 찾았을 때는 동백꽃이 가끔 피어있는 나무가 있고 낙화를 가끔 볼 수 있었다. 동백꽃이 많이 피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다. 등대가 있는 정상으로 가는 길옆은 작은 대나무(이대)들이 있어 작은 굴을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등대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2003.10. 15에 鍾鼓會에서 세운 “여수항 경치 노래비”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거울 같은 바다 위에 고기 잡는 배 돛을 달고 왔다 갔다 오동도 바다. 아, 아름답-구나 여수항경치.” 이 노래는 조종웅 여수상업고등학교 국어교사가 작사 작곡했다고 한다. 정상에 있는 등대에 올라가는 방법으로 elevator를 타거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기도 했다. 등대에 올라가보니 등대에서 멀리 까지 보이는 앞 푸른 바다와 멀리서 한가하게 누워 있는 산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등대의 벽에 붙여 있는 poster에는 세계최초의 철갑선“ 거북선” 무적의 신화, 세계최초의 돌격용 철갑선, 1591년(선조 24년)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순천부에 영지에 부임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특수전함인 거북선 제작을시작하여 1592년 3월 27일에 여수 앞바다에 거북선을 진수했다(난중일기 기록). 30전 30승, 불패의 신화를 이룬 이순신장군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3척, 영조 때 14척, 정조 6년에는 40척에 달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척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 아래는 약간 작은 글씨로 “ 해상왕 장보고 바닷길을 열다.” 청해진과 해상로 해상 왕국을 건설한 장보고. 민군을 조직하여 당나라와 왜구의 해적을 소탕하기위해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상권을 확보하였으며, 신라인의 인신매매 문제를 해결했다. 는 장보고의 업적도 적혀 있었다. 구경을 하고 내려오는 산길 옆에 바다와 접하고 저 멀리까지 확트여 햇 볕에 반사되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회원들이 모여서 밀려오는 물결의 춤을 감상하고 파도가 연주하는 노래 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옥내윤회원이 가수 안다성씨가 한때 크게 히트했던 "바다 가에서“ 라는 노래를 한 곡조 뽑아 모두의 동참을 유도해 같이 노래를 불렀다.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의 춤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노래가 끝나고 황재선위원장이 부부가 함께 온 회원의 자기소개를 제의해서 자유 순서대로 부부가 같이 참가한 회원들은 자기 자신과 배우자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버스에 도착시간이 약 30분이나 늦게 되어 계획된 시간에 약간의 차질이 발생하여 원래는 10시20분에 오동도를 떠나기로 했던 계획이 약간 지연되어 10시 50분에 승차가 완료되어서 11:00 시에 오동도를 떠나게 되었다.
|
|
|
11:00~ 11:40 |
여수 오동도 출발 순천정원박람회 도착: 오동도에서 순천 정원박람회로 가는 중에 옥내윤 회원이 승객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위해 3호차에서 2호차로 환승하여 50년 전 우리가 대전 항공병 학교에서 교육받던 시절 교관들에게서 들었던 Y담을 선사를 했다. 고마웠다. 이 바람에 2호차 김민수 guide가 옥장군으로 승진 시켜서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
|
|
11:40~12:40 |
순천정원박람회 관람: 정원박람회에 도착이 11시 40분, 약 한 시간의 관람을 하고 12시 40분에 승차완료 해야 한다는 시간적인 부담을 가지고 관람하기에는 정원박람회가 너무 크고 넓었다. 생각 없이 돌아보다가 버스가 제시간에 떠나지 못하면 약속된 식사시간에 갈 수 없다는 guide의 말에 정해진 시간에 버스가 떠나게 하기위해서 정원을 돌아보는데 많은 시간의 제약을 느꼈으리란 생각이다. 오동도의 경험덕분에 회원들의 협조로 모두 제시간에 bus 정차장으로 돌아와서 정해진 시간에 떠나게 되었다. 정원박람회에는 모두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입구 쪽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는데 특히 여러 색색의 tulip이 아름답게 피어 있고, 각 나라마다의 정원이 특색이 있었다. 노산 이은상씨의 “ 나무의 마음” 이란 비석에는 “나무도 쓸어주고 만져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꺽으면 눈물 흘리죠“ 라고 글이 있는 시비가 있었다. guide가 설명한 것과 같이 너무 넓고 다양하게 꾸며져 있는 정원 전체를 둘러보기에는 1시간이란 시간이 너무나 부족해서 아쉬웠다. |
|
|
12:40~13:10 |
정원박물관에서 꼬막정식 식당으로 이동. |
|
|
13:10~14:00 |
꼬막 맛집 점심식사: 꼬막맛집의 점심 반찬이 18가지였으며 꼬막으로 만든 반찬은 3가지에 불과했지만 모두들 즐겼으리라 생각한다. 막걸리 공급이 늦어 불편했던 회원은 있었지만. 최광진 회원 부부가 꼬막을 깨주고 맛을 즐기는 모습이 정다워 보였으며, 옆에 상에는 멀리 미국서 날아온 최웅일 회원 부부가 같이했는데, 최웅일 회원의 부인은 우리말을 하지 않기에 알아본 결과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최웅일 회원이 음식의 명칭을 설명하는데 열심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이제 갈 곳으로 낙안읍성민속마을과 전주한옥마을이 남아있는데 두 곳을 다 들리면 서울도착시간이 많이 늦어진다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논의 한 끝에 전주한옥 마을 관광을 아쉽지만 포기하고 낙안읍성민속마을 관광을 하기로 결정했다. |
|
|
14:00~14:20 |
꼬막맛집 식당에서 낙안읍성민속마을로 이동. |
14:20~15:50 |
낙안읍성민속마을 관람: 이곳 樂安마을은 즐거울樂 편안할 安의 낙안이며, 낙안읍성이 생긴 것은 고려 태조 23년 940년으로 약 1,000년이 조금 지났다. 낙안읍성은 외부의 침입이 약 350여회 정도 있어서 그 곳의 태생 양해군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았는데 후에 충민공 임경업장군이 석성.증수했다. 현재 98세대 230 여명이 초가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과 낙안읍성에는 아무 성씨나 살고 있다는 요지의 설명과 제 5 공화국 때 문화공보부 장관인 허문도씨가 88 올림픽 때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약 30년 전에 사적으로 지정한 마을이라는 현지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다. 집들은 우리가 어릴 때 시골에서 살던 그 초가의 모습이었고, 마을 안 한 공터에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나무로 만든 장승들이 조각된 제 각각의 얼굴 모습을 하고 서있었으며, 각 개인의 집을 돌아보는 대는 제한이 거의 없었다. 간장을 담그는 장독대와 지금 거의 보기 힘든 방과 방사이에 설치되는 나무 마루를 볼 수 있었으며, 가끔 길가의 집에서는 관광객을 위해서 간단한 대나무로 만든 컵 등 토산품을 팔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돌아보고 오는데 한집에서는 한아주머니가 한복을 차려입고 춤을 추면서 판소리의 한판을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읍성 밖에도 초가가 있었으며 옛날 시골 마을을 연상시켰다. |
|
|
15:50~19:00 |
낙안 읍성민속마을 에서 천안으로 이동. |
|
|
19:00~20:15 |
천안의 오 샤부뷔폐 져녁식사 : 천안에 도착이 약간 늦었지만 70여명이 식사에는 매우 분주했다. 그러나 각자가 가져다가 먹은 buffet 방식이라 serving하는 인원이 별도로 필요 없어 약간은 불편했으나 그런대로 여러 사람의 빠른 식사를 위해서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곳에서 김삼묘회원과 이동룡 회원이 식사후 약간 먼저 귀가 길을 떠났다. |
|
|
20:15~21:45 |
천안에서 서울로 이동: 서울로 오는 도중에 각자의 귀가의 편리에 따리 신갈과 죽전에서 각 회원들이 내렸다. |
|
|
21:45 |
압구정동 도착: 마지막 종착역 압구정 공영주차장에 도착이 늦어질까 했는데 약 15분간 지연은 되었지만 다행이 잘 도착했다. 올 때는 운전기사가 승차자들의 주문을 받아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좀 시끄러운 면도 있었지만 노래 중에는 "빨간 마후라" 도 있어 잘 왔고, 오는 도중에 각자 소감 한마디 씩. 대부분 즐거웠다는 말로 헤어짐을 말을 해주었다. 이 도착을 마지막으로 51기 Home Coming Day 행사 겸 남쪽여행 1박 2일의 막을 내렸으며 즐거운 추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기 타 | |
* 계획에는 전주 한옥마을 관광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서울도착 지연이 예상되어 아쉽지만 한옥마을 관광을 취소했습니다. | |
* 김동수 회원 따님이 특별히 주문한 복분자 술 1.8 lit. 6 병을 협조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 총 참석회원 72명, 부부참석: 23, 회원 단독참석 26명 계: 72명 | |
* 불참회원에게 작은 선물 준비했다고 차장 김동회원이 전했습니다. | |
* 운전기사와 가이드에게 안전운전과 친절 안내에 대한 답례로 약간의 사례가 있었다고 김동회원이 전했습니다. | |
Home Coming Day 행사에 참여한 동기들: | |
1. 1호차 승차(부부): 황재선, 문장훈, 김길웅, 윤석홍, (김동수). 김회렴, 송석훈, 양광남, 강종호, 김두한, 박창근, 유병권. --------------------------------------------------------------계: 22(24)명. | |
2. 2호차 승차(부부): 김동, 이병호, 이은우, 이정덕, 전영길, 천정웅, 최웅일, 홍범표, 이순모, 임향순(홀로), 최광진, 임규연. ---------------------------------------------------------------계: 23명. | |
3. 3호차 승차(홀로): 조용원. 김경환, 정영일, 김종국, 박종규, 옥내윤, 이영수, 김삼묘, 박수규, 김승렬, 김진식, 박광수, 서성식, 윤중길, 이운상, 홍사영, 정동래, 김영철, 남궁원, 정규현, 안정희, 최겸수, 장주환,- 계: 23명. | |
4. 진주에서 합류: ( 김동수 부부), 이동룡, 안용일. ------------------------------------ 계:4(2)명 (임향순회원, 안용일회원 사령부식 참석마치고 귀가) | |
** 승차 좌석은 4월 22일 과 4월 23일은 각각 다른 좌석으로 배정되었음. | |
*** 이번 행사에 지나온 곳들: 서울 압구정 공영 주차장--> 죽전,일산간이정유장경유--> 금산인삼휴계소-->교육사령부--> 향일암-->여수 다다해물정식식당--> 돌산대교--> 히든베이 호텔--> 오동도-->순천정원박람회-->꼬막맛집식당--> 낙안읍성 민속마을--> 천안 오-샤부식당-->서울 압구정 공영주차장.
| |
note: 본 글은 2호차를 타고 행사에 참가한 작성자가 행사기간 중에 체험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 정리한 것이며 주관적인 가감을 최소로 하려고 하였으나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 작성: 임규연) | |
첫댓글 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씨를 똑똑하게 진하게 하여주시면 그리고 글씨 크기를 12 내지 14 정도로 키워주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