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이성부
벼는 거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붚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음을 덮는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시집 『우리들의 양식』, 1974)
[작품해설]
이 시는 ‘벼’라는 생명 표상을 통해 민족⸱민중의 공동체 의식을 나타낸 작품으로, 비유와 상징의 기법으로써 주제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성부의 시에는 분노와 사랑의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내면세게나 자연과 같은 서정보다는 사회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는 흔히 참여시로 분류된다.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벼’는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민중⸱민족의식과 생명 의지로 상징된다. 기⸱승⸱전⸱결의 4연 구성의 이 시는 벼의 외면적 모습, 벼의 내면적 덕성, 배의 내면적 태도, 벼에 대한 예찬의 과정에 딸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1연의 ‘햇살 따가워질수록 /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라는 구절에 온갖 고난을 이겨낸 민중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는 구절에는 겸손한 자세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민중의 삶이 나타나 있다.
2연에서 보듯, 이러한 민중들이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었을 때, ‘더 튼튼해진 백성들’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민중의 저력이 바루히됨을 의미한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이 죄지은’것처럼 권력에 짓밟혀 숨죽이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힘이 강해질 때면 그들은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바와 같이 가슴엔 세상을 향한 강렬한 저항의 불길이 일어나며, 자신들이 떠나야 할 때는 소리 없이 떠날 줄도 알고 있다.
3연은 2연의 부연 단락으로 민중들이 어질고 현명한 존재임을 보여 준다. 하늘로 표상된 저대자를 향하여 서러움을 달랠 줄도 알고, 시련이 닥쳐올 때면 노여움을 삭일 줄도 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불의의 사회 현실에 대해 저항할 줄 아는 ‘더운 가슴’이 용솟음치는 민중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4연에는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주체로 일어서는 강한 민중의 생명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벼는 피 흘리며 베어지지만, 자기희생을 통해 이룩한 ‘넓디넓은 사랑’에 만족하며 조용히 쓰러진다. 쓰러짐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아는 벼의 고귀한 희생을 거쳐 새로운 벼가 탄생하듯, 이러한 연속성 속에서 인간의 삶이 유지되는 것을 민중들은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이성부(李盛夫)
1942년 광주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9년 광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남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당선
1961년 『현대문학』 에 시 「백주」, 「열차」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糧食)」 당선
1967년 김광협, 이탄, 최하림, 권오윤 등과 『시학』 동인
1969년 제15회 현대문학상 수상
1977년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시집 : 『이성부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7), 『전야』(1981), 『빈 산 뒤에 두고』(1989), 『야간 산행』(1996), 『저 바위도 입을 열어』(1998),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