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6](목) [동녘글밭] 모순을 안고 사는 우리들
https://youtu.be/D7byTLZIG6c
대체로 우리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이해하는 상식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상식의 누리이지요.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사는 누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정 반대의 것들을 만나게 되고, 실제로 그 반대의 것들이 아주 큰 힘을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누리를 보다 깊이 이해하자면 그 누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인 ’사람들‘을 먼저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안고 살아가는 모순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요. 좀 더 단순화시키면 모순된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라는 존재가 바로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그러한 모순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깊은 사랑에 목숨을 바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미움이 차지하면 증오의 화신으로 변하니까요. 이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치 뮤지컬로 공연된 ’지킬과 하이드‘ 처럼요.
사람 그 자체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빚어진 인간 세상이 그렇습니다. 모순된 존재로서 모순과 모순이 만나 그렇고 그런 누리를 끝없이 이어가니까요. 그것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린 대로 존재는 생명의 작동 원리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욕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구조적인 ’시작의 모순‘이 스스로 역사와 문명을 이끌어 가니까요.
여기에서 비롯된 상식과 몰상식이 모순된 구조에서 어쩔 수 없는 공존을 낳고, 누리를 열어 갑니다. 그래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이 모순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그것을 인정하고 덜 모순되도록 힘쓰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정하자는 것은 ’욕심‘이며 ’모순‘입니다. 욕심을 없애면 존재할 수 없으니 그럴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모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근본인 뿌리를 상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일에 모두가 하나로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나라도 이 일을 으뜸으로 여기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틀을 갖추고, 온 힘을 기울여 나가야 합니다. 나라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한겨레의 뿌리 얼인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누리로 열어 가는 일‘입니다. 바로 ’공동체 정신‘이지요. 한자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이기에 보다 쉽게 이해가 갈지도 몰라 덧붙인 것입니다.
어떤 알 수 없는 만남으로 목숨을 갖고 누리에 나온 우리들입니다. 그 우리들이 얼마쯤을 살다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자연스레 몸은 산산히 부서집니다. 거름이 되어 윤회로 거듭나게 됩니다. 원소로 돌아가서요. 그런 우리들인데 잠시의 욕심으로, 모순에 ’너 죽고 나 죽는 일‘에 매달려서는 결코, 안 될 테지요. 우리들이 매달려야 할 일은 ’너 살고 나 사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이 꿈꾸는 홍익인간이요, 대동세상이요, 공동체가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나‘와 또 다른 ’나‘인 ’너‘로 된 ’우리들‘이 사는 일일 테지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 갑니다. 모순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너그럽게 봐 주면 참으로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정도를 넘으면 안 될 테지요. 그렇게 되면 그 ’우리들‘이 다 망하니까요.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그 ’우리들‘에 끼어 그냥, 살아 갑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은 '모순을 안고 사는 우리들'이라는 제목으로 글밭을 일구었읍니다.
그게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글밭에 제 생각을 담은 것입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직접 겪으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랬을 경우, 여유가 생기니까요.
그래서 다시금 확인하는 작업으로 찬찬하게 내일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